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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76화 (76/242)

던전 사냥꾼 76화

피의 각성?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한다.

‘반응’을 했다면 본래는 없었다는 뜻.

거기다가 경고 메시지까지 떴으니 가볍게 넘길 사안은 아닌 듯했다.

마스터 가디언으로 선택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음이 틀림없었다.

시선을 옮겨 크리슬리를 바라봤다.

오색찬란한 빛이 고치의 형태로 크리슬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고치가 터질 듯 팽창하며 수축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현상이다.

나는 이상 현상을 예의 주시하였다. 함부로 손댔다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것도 골치가 아프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처럼 우선 결과를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휘이잉!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고치 안은 삼파전이 따로 없었다. 자세한 상황은 알 길이 없지만 세 가지 마력이 서로 부딪치며 혈전을 벌이는 중이라는 건 확실했다.

한참을 부딪치고 마모되더니 세 마력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이어 찬란한 빛이 크리슬리의 몸에 흡수되었다.

[‘크리슬리’가 마스터 가디언으로서의 변화를 끝마쳤습니다.]

[피의 각성 효과로 스킬 ‘태양과 달의 여왕’이 생성되었습니다.]

털썩!

크리슬리가 쓰러졌다.

격한 변화를 적은 체력으로 이기지 못한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크리슬리를 품에 안고 심안을 발동시켰다.

이름: 크리슬리

직업: 마스터 가디언(모든 능력치+5)

칭호 :

* 진마룡의 피를 잇는 자(Epic, 지능마력+6)

* 달의 가호를 받는 자(Ex U, 마력+8)

능력치 :

힘 37(+5) 지능 94(+11)

민첩 41(+5) 체력 39(+5) 마력 66(+23)

잠재력(277+49/484)

특이 사항: 진마룡 아오진과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의 피를 이어 그 성장의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스킬: 대규모 시체 조종술(U), 언데드 제조(Ex U), 태양과 달의 여왕(Epic)

착용 중인 아이템: 죽음 지팡이(Ex U, Set, 마력+4)

[전후 비교]

힘 26 지 100 민 28 체 32 마 73 잠재력(235+24/478)

힘 42 지 105 민 46 체 44 마 89 잠재력(277+49/484)

“……미쳤군.”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가디언의 효과로 말미암아 크리슬리는 압도적인 보정 능력치를 얻게 되었다. 49라니, 나를 웃돈다. 그동안 올린 능력치도 적지 않아서 이 성장세라면 조만간 크라스라를 따라잡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잠재력 한계치마저 올랐다. 478에서 484로! 적지만 분명한 한계 돌파다. 마족도 아닌 마수가 한계 돌파를 행했단 이야기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시체 조종술(R)이었던 스킬도 등급이 올라 고유성을 갖게 되었다. 워낙에 많은 시체를 조종해서 그런지 아예 ‘대규모 시체 조종술(U)’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언데드 제조 스킬 또한 등급을 반 단계 상승시켰고, 무엇보다 새롭게 생성된 부분이 놀랍다.

에픽 등급 스킬.

최상급 마수를 판가름하는 척도 중 하나.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격이 높은 최상급의 마수라면 대부분 하나씩 에픽 등급의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1년 만의 변화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이게 끝이 아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강해지리라. 크리슬리는 내가 지닌 마수 중에서도 군계일학이 될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들은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뛰어난 마수를 휘하로 둔다는 건 뿌듯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나 뛰어나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스킬마저 생길 줄이야…… 마스터 가디언으로 선택한 건 성급한 일이었던가?’

크리슬리는 마계 옥션을 통해 내게로 왔다. 의식을 치렀으니 그 충성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에 한해서다. 크리슬리는 나조차 뛰어넘을 막강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순히 상태창의 수치로 나타나는 그런 잠재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더욱 깊고 넓은, 정의하기 힘든 무언가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에픽 등급의 스킬을 얻었지 않나. 성장세도 말이 안 되게 빠르다. 걷는 법 하나를 알려 줬는데 하늘을 날아 버리는 격이다.

한데 이게 다가 아니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는 강렬한 변수였다.

힘은 모든 걸 바꾼다. 하물며 여태껏 약자의 입장에 있었던 그녀가 막강한 힘을 얻는다면 과거와 같으리라 확신할 수 없다.

다른 마음을 품게 될 공산이 컸고…… 그러한 장면을 나는 전생에서 숱하게 봐 왔다.

보통의 마수는 던전 마스터를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크리슬리는 전무후무한 지능의 소유자였다. 지능이란 능력치에 대해선 많은 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마신이 만든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어 이적을 행할 여지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일편단심? 견마지로? 틀림없이 좋은 말이지만 나는 그게 지켜지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한 말을 사용하는 건 대개가 약자들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입에 발린 말을 내뱉었고, 힘을 얻은 뒤에는 과거를 잊은 듯 막무가내로 행동하기 일쑤였다.

경험에 입각한 나의 주관적인 판단일 따름이지만…… 과연 크리슬리는 저 범주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생각의 생각이 물꼬를 텄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허!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고작 변수 하나가 튀어나왔을 따름이다. 그럴진대 왜 이처럼 확대 해석하며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고민을 하는 걸까?

곧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모른다. 크리슬리를.’

마계 옥션에서 목록이 갱신되는 변수를 맞이했을 때 나는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생에서 숱하게 어둠의 정령이란 존재를 겪어 봤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취할 땐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내게 큰 해가 없으리라는 사실 역시.

하지만 전생에서 크리슬리는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정의할 수 없었다.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여태까지는 그저 휘하 마수라는 생각에 뿌듯해하기만 했다. 그녀를 특별하게 여기진 않았다. 내 손 위에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변수를 맞이하고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랐다.

크리슬리를 안은 채 진중히 말했다.

“지켜볼 것이다…… 너를.”

이미 엎질러진 물.

무엇보다 다른 길을 걷기로 하지 않았나.

전생에서 경험한 일이 하나의 척도는 되어 줄지언정 진리는 될 수 없었다. 내가 겪지 못했다고 그것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고작 이런 변수 하나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돌아온 의미가 퇴색된다.

‘강렬한 변수. 그조차 무력화시킬 강력한 존재가 되면 그만이다.’

고개를 주억였다.

실로 간단하고 명쾌한 해답이었다.

크리슬리가 나를 뛰어넘을 잠재력을 지녔다지만 그것은 내가 현실에 안주할 경우다. 오히려 바로 옆에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경각심을 느끼고 현실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내가 가진 편견을 깨 줄 수 있을지 조금은 궁금하군.’

힘을 얻은 존재는 누구나 변한다. 변해 왔다.

크리슬리는 어떨까? 변칙적으로 얻은 가공할 힘. 이후 더욱 강해진다면 지금껏 내게 보인 충정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까?

툭. 잠든 크리슬리의 볼을 가볍게 두드린 뒤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태양과 달의 여왕’은 공격적인 성향이 짙은 스킬이었다.

태양이 떴을 땐 빛살을 모아 원거리 폭격을 가할 수 있었고, 달이 떴을 땐 대지의 모든 존재를 얼려 버릴 수 있었다.

감히 그리핀의 ‘불과 번개’에 맞먹는 대인 살상용 스킬인 것이다.

어쨌든 한 차례 변화를 겪은 직후 크리슬리는 열과 성의를 다해 마력 추출을 익혔다. 내가 던져 준 스킬북을 받고는 잠자는 시간마저 줄이며 연구에 몰두했다. 지능이 더 높아져서 그런지 그 속도가 아득하기 그지없었다.

대지룡의 사체를 손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틈이 날 때마다 뽑아서 정제시킨 피, 그리고 대지룡이 가진 순수한 마력. 이 둘이 적당한 비율로 조합되어야 ‘마력의 결정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 실험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크리슬리는 자주 내게 찾아와 조합을 해 줄 것을 바랐고,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다. 결정체는커녕 비율이 맞지 않아서 폭발이 일어나거나 재료가 가진 마력이 증발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럼에도 크리슬리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조합되는 비율은 나날이 좋아졌다. 결국 37번째 도전 끝에 ‘고농도 마력의 결정체’가 완성되었다.

“저주는 안 걸려 있는 것 같군.”

엄지손톱만 한 결정체를 들고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전에 조합한 것보다 크기가 크고 색깔이 더욱 아름답다. 저주나 순수라는 단어가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다.

“……제대로 조합이 된 것입니까?”

크리슬리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창백한 안색. 워낙에 많은 피를 뽑아낸 탓에 피부가 살짝 텄다.

대지룡의 사체에서 뽑아낼 마력도 여분이 얼마 없었다. 제아무리 크리슬리라도 애간장이 탈 수밖에 없는 상황.

“조합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 이제 세계수의 씨앗이 발아를 할지 확인하는 일만 남았지.”

“씨앗을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함께 가자.”

풍요의 여신상이 축복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싶어서 씨앗은 그대로 묻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의 결정체가 완성된 지금, 그 결과를 하루빨리 보고 싶었다.

나는 크리슬리와 함께 15층으로 향했다. 숲 지형의 중심부에 다다르자 싹을 틔운 세계수가 벌써 성인의 키만큼 자라 있었다.

그 주변에서 다크 엘프들은 여전히 의식을 행하는 중이었다.

내 출현에 의식이 중단되었고,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간 크리슬리가 땅에 묻힌 씨앗 하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파 온 후 내게 그것을 넘겼다.

“……여기 있습니다.”

씨앗을 넘기는 크리슬리의 얼굴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막상 일을 벌이자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 일이 실패한대도 그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다.”

“하오나.”

“네게 명을 내린 건 나다. 결정체를 보고 조합을 하자 결정한 것 역시 나지. 잘못된다면 그것은 내 그릇된 판단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실패라고 확정된 것도 아니지 않나?”

단호하기 그지없는 어조.

크리슬리는 억지로나마 수긍하려 애썼다. 여전히 불안한 기색은 있었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고 조금은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불안함을 뒤로한 채 오로지 나만을 믿겠다는 태도다.

‘그럼…….’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즉시 결정체와 씨앗을 들고 ‘만물 조합’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어 메시지창 하나가 떠올랐다.

[고농도 마력의 결정체와 세계수의 씨앗을 조합하시겠습니까?]

바로 그 밑에 승낙과 거부가 적혀 있었다.

따질 필요도 없이 승낙을 눌렀다.

그러자 두 재료가 떠오르며 한데 합쳐지기 시작했다.

분해되고 합쳐지길 수없이 반복하더니 조금씩 형상을 갖춰 간다.

벌써 수십 번도 더 본 광경.

하지만 이번에는 감회가 남다르다. 세계수의 씨앗은 하나뿐이었다. 언제 다시 도전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크리슬리와 주변의 모든 다크 엘프가 긴장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길 십여 초.

[고농도 마력의 결정체와 세계수의 씨앗을 조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조합 결과는 매우 성공적입니다. ‘발아한 세계수의 씨앗’이 완성되었습니다!]

세계수의 씨앗.

의식과 축복으로도 꿈쩍 않던 녀석의 겉 표면에…… 싹이 피어 있었다. 그것도 전에 조합한 것보다 생명력이 넘쳤다. 파르르 싹이 떨리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내게 시위했다.

나는 보란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아라.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아아. 진정 믿었습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털썩!

크리슬리가 또다시 쓰러졌다.

긴장이 풀리자 지친 육체가 강제로 숙면을 취하도록 만든 것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피만 주구장창 뽑아 댔을 것이니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지친 기색과는 반대로 얼굴엔 얇은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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