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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77화 (77/242)

던전 사냥꾼 77화

후우우우웅!

세계수의 씨앗을 심자 중후한 울림이 던전 내부에 퍼져 나갔다. 생명의 트림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포효. 주변의 모든 다크 엘프가 동시다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고작 30미터 남짓의 거리를 남겨 두고 무려 두 개의 세계수가 싹을 틔운 것이다.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역사, 신화, 혹은 전설, 동화…… 어디서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조차 없는 일을 현실로 가져왔다. 바로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길이 남을 업적. 두 개의 세계수가 무슨 효과가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기록하며 전하리라.

다크 엘프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그들의 진정한 터전은 이곳, 던전이 되었다. 이 두 개의 세계수를 지키고자 웃으며 목숨을 내어 줄 것이다. 지킬 수만 있다면…… 보존한 채 후대에 남길 수만 있다면 그들의 번영은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계에서조차 약자 취급을 받은 채 설움의 시간을 가진 다크 엘프들이다. 위대한 지도자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와 진마룡 아오진이 만나 기적적으로 희망을 낳았지만 지킬 수 없었다. 어둠의 정령들과 무슨 심정으로 계약을 했을지 상상도 되질 않았다.

이제는 도약할 때였다.

설움을 딛고, 두 개의 세계수와 함께…….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마왕의 자리를 건 쟁탈전에서 내가 승리할 필요가 있었다. 던전의 존속 여부는 오로지 나의 승패에 달려 있는 탓이다.

‘고농도 마력의 결정체와 합성했기 때문인가? 시작이 좋군.’

이미 자라고 있는 세계수와 달리 지금 심은 씨앗은 태동이 심상치 않았다. 심자마자 벌써 내 몸의 절반 가까이 자라났다. 앞으로의 성장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두 발자국 앞에서 크리슬리가 감동의 눈초리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이번 일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연이니만큼, 몸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이었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리는 다크 엘프들에게 말했다.

“들어라. 두 그루의 세계수를 돌보는 책임자는 크리슬리가 맡을 것인즉. 세계수를 대함에 있어서 너희는 먼저 크리슬리와 상담을 해야 할 것이다. 싹을 틔웠으니 보다 세심하게 관리를 할 필요가 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그 일은 저보다 줄리엄 장로님이 더 어울릴 줄 아룁니다.”

크리슬리가 겸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최고 연장자는 장로인 줄리엄이었다. 여러 방면의 지식이 뛰어나니 웬만한 일에는 적합하다 하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다.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생명의 요람이다. 줄리엄 따위가 책임을 논하기엔 여러모로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선 변수에 능한 자, 세계수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책임자는 너다, 크리슬리.”

“명을 받듭니다.”

이미 확정된 일. 크리슬리가 그를 모를 리 없다.

다소곳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일차적인 정리가 끝났다. 전부 성장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던전의 특성상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리려 할 그때.

후우우우우웅!

지척에서 다시 한번 용트림이 튀어나왔다.

후우우우우우웅!

하지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귀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울림이다. 두 그루의 세계수가 동시에 합주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굳히며 시선을 옮겼다.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앞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합쳐진다?’

새롭게 자라기 시작한 세계수의 싹. 그것이 급속도로 성장하며 바로 옆에 있는 세계수를 향해 가지를 뻗었다. 그러자 반대편의 세계수도 조금씩 몸을 기울였다. 마치 하나로 합쳐지려는 몸부림을 보는 것 같았다.

두 개의 세계수가 동시에 자라는 것도 처음일진대, 그것이 이러한 조합을 꾀하리라곤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조합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세계수 두 개가 함께 있을 때 합쳐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마력의 파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집히는 바가 있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게 크리슬리의 피로 조합된 세계수의 씨앗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마력 파장을 가진 크리슬리가 무언가를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보다 마력에 민감한 게 그녀였다.

크리슬리는 입술을 한 차례 깨물곤 답했다.

“대지룡의 사체에서 추출한 마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상대를 잡아먹으려는 듯이 난폭하기 그지없사온데…….”

나는 곰곰이 그 의미를 생각하다가 침음을 흘렸다.

“대지룡이 생명을 얻기 위해선 거대한 숲 하나를 먹어 치워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수라면 능히 숲 몇 개와도 비견될 생명력을 가졌겠지.”

크리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큰일이 아닌지요?”

“나도 확신할 순 없다. 그러나 숲을 먹어 치우고 대지룡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대지룡은 생명을 얻을 수 없으니 세계수의 모습으로 다른 세계수를 잡아먹으면 뭔가가 나타나긴 할 터.”

거창하게 말했지만 짐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지룡의 마력만이 움직인다면 이 가설이 가장 그럴싸하였다.

꿀꺽!

다크 엘프 일동의 표정에 긴장이 서린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길 주저하지 않았건만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나 또한 손에 식은땀이 살짝 맺혔다. 어쨌거나 두 세계수는 합쳐지고 있었다.

‘막아야 하는가, 놔둬야 하는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층을 달리해 아예 분리시키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지룡이 생명을 얻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궁금하다.’

그 결과가 심히 궁금했다.

숲을 먹어 치우고 생명을 얻는 대지룡. 하지만 세계수는 숲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요람인 것이다. 하여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없었다. 대지룡보다 상위의 존재가 나타날 수도 있고, 애꿎은 세계수 하나만 잃게 될 수도 있었다.

결국 가만히 놔두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두 세계수의 접전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한쪽은 공격을, 한쪽은 방어를 했다.

나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몇 시간이나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만에 하나 더한 일이 생기거든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으므로…….

이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더 지나갔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 중 움직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근처의 숲에 킹 비를 데리고 마실을 나갔던 이히마저 대열에 합류하였다.

마침내 3일째가 되었을 때 변화가 일어났다. 방어를 하는 세계수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느려진 것이다. 반대로 공격을 하는 세계수의 가지는 더욱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공격을 하던 세계수의 가지가 상대의 몸 전체를 감쌌다. 후우우웅! 소리를 내며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두 그루의 세계수가 하나로 합쳐지는 데 성공했습니다.]

[불가능한 업적! 최초로 ‘근원의 나무’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근원의 나무’는 세계가 만들어질 당시 생명을 잉태시킨 ‘시작의 나무’입니다.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칭호 ‘세계수의 주인’이 ‘근원의 주인’으로 변화합니다.]

[3,000,000PT가 지급됩니다.]

두 나무가 합쳐지자 메시지창이 앞다투어 허공에 떠올랐다.

칭호를 변경시켜 주고 거기다가 300만 포인트마저 가져다준 업적!

“허…….”

하지만 내가 놀란 부분은 메시지창이 아니다.

근원의 나무는 은은한 청색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신비하기 그지없는 느낌을 가져다주며 모든 존재를 압도했다. 아직 전부 성장하지 못해 크기는 작았지만 나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는 현묘함이 서려 있었다.

변하리라 예상은 했으나 이건 진화에 가까웠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 상태창을 열었다. ‘세계수의 주인(Ex U, 모든 능력치+2)’이 ‘근원의 주인(Epic, 모든 능력치+3)’으로 바뀌어 있었다.

에픽 등급의 칭호를 갖게 된 건 처음이었다. 전생을 통틀어서도 ‘Ex U 등급’이 한계였다. 스킬이나 아이템이라면 몰라도 칭호는 정말이지 얻기가 힘든 탓이다. 혈족 계승을 통하거나, 극한으로 무언가를 이룩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감회가 새롭군.’

능력치는 이미 전생을 초월한 지 오래다. 허나 칭호를 얻은 건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제대로 일보를 나아갔다는 그런 만족감.

그때 크리슬리가 창백한 얼굴을 들어 내게 물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진정으로 저것은 세계수가 맞습니까?”

“근원의 나무라는군.”

“……창세의 나무! 나,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제대로 들었다.”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근원, 창세, 시작, 기타 등등으로 불리는 게 바로 저 나무다. 크리슬리와 다크 엘프들이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신화 속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실존할 줄이야…….”

“그러니 더욱 너의 책임이 막중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크리슬리가 얼굴을 굳혔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저것이 정말 근원의 나무라면 세계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미간을 집었다.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들었다.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이곳에 모인 이 중 가장 긴장하고 있던 게 나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세계수를 날린다면 피해가 너무나도 막중했다. 세계수의 씨앗을 조합한 것부터 계속해서 도박의 연속이었다. 이만한 피로감은 상당히 오랜만이다.

“뒷일은 맡기겠다.”

무덤덤하게 말하곤 몸을 돌렸다.

크리슬리를 비롯한 다크 엘프 무리가 조용히 무릎을 꿇으며 나를 배웅했다.

* * *

그리고…… 그 시각.

던전을 오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으니.

“용암 거미 두 마리가 추가로 더 다가옵니다!”

“대열을 흩트리지 마!”

“에드워드! 불꽃 도마뱀은 불을 내뿜으니까 정면에 서면 안 돼!”

바로 천명회의 데빌 헌터 공격대였다. 비공개로 받아들인 인원까지 포함하여 도합 12인이 던전의 6층에 오른 것이다.

6층은 용암지대였다.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발을 잘못 디뎠다간 그대로 살이 녹아 버리는 살벌한 장소. 존재하는 마수들 또한 녹록지 않았다.

유은혜가 전기가 서린 검을 휘두르며 에드워드의 뒤를 막아섰다. 본래 하반신이 뭉개진 에드워드였으나 엘릭서의 도움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이후 복수심을 불태우며 강해지고자 미친 듯이 달려왔다.

이제 막 각성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벌써부터 데빌 헌터 공격대의 3인자 자리를 꿰찼다.

만으로 11살, 한국 나이로 고작 12살의 나이지만 키가 160 중반에 달했고 제법 근육이 붙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으나 몇 개월 사이에 10센티 이상이 자라난 것이다.

거대한 불꽃 도마뱀이 불을 토해 냈다. 그러자 에드워드 윈저는 급히 몸을 낮추고 불꽃 도마뱀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갔다.

“누나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이런 도마뱀 따위는 상대가 안 되는데.”

푸욱!

검을 들어 도마뱀의 흉부를 찌른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잔인하게 불꽃 도마뱀의 몸을 찔렀다.

그 모습을 보며 유은혜는 이마를 짚었다.

“너…… 후우! 그래도 공격대는 팀플레이야. 혼자서 앞서 나가는 건 용서 못해.”

“알았어요. 그럼 같이 용암 거미를 잡으러 가요. 다른 대원들이 힘에 겨워하잖아요.”

말과 달리 에드워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용암 거미를 향해 달려 나갔다. 잠시 넋이 나간 유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내 팔자야.”

여태껏 저 천방지축의 뒷바라지를 유은혜가 도맡았다. 팔자에도 없는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격대장이란 이는 저 애물단지 하나만 던져두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으니 절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공대장님, 두고 봐요. 기필코 때려 줄 테니까!’

울상을 지은 유은혜가 급히 에드워드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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