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78화
* * *
지난 몇 개월 사이 한국은 변혁을 맞이했다.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거대한 후폭풍을 겪은 탓이다. 수천의 군인이 죽고, 수십 조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입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마수가 자국을 횡단하는 걸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굴욕을 겪었다.
안보에 구멍이 뻥 뚫려 버렸으니 민심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책임이 필요한 상황.
한 개 사단이 던전에서 전멸하도록 방치한 일이 함께 불거지자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 수반 전원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대선이 치러지며 정권이 교체되었다.
각성자의 지위가 올라갔음은 당연지사다. 이미 각성자는 국민의 신임을 더할 나위 없이 얻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각성자가 나서서 몬스터 웨이브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전면적인 지원. 국가 차원에서 대놓고 밀어줬다. 덕분에 길드들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이미 몬스터 웨이브는 세계적인 위협이었다. 강한 각성자를 데려가려는 나라는 많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값이 뛰었다.
그러자 자국의 각성자가 국내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골머리를 싸매야 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와 달리 각성자는 빠르게 성장할 발판을 얻었다.
바야흐로 ‘각성자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 * *
“아, 글쎄. 거기가 세이브 존인 줄 알았다니까?”
늦은 저녁.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들이켜며 김춘원이 나름의 하소연을 쏟아 냈다.
오디션을 통해 데빌 헌터 공격대에 소속된 그는 ‘걸걸한 욕쟁이’ 칭호의 보유자였다. 음유 시인이라는 특이한 직업으로 어그로를 끄는 데 특화되어 있었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김춘원을 바라보는 눈길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솔직히 다들 처음엔 세이브 존인 줄 알았잖아요? 설마 여장 다 풀었을 때 마수가 난입할 줄 내가 알았나.”
“아저씨, 아니라고 했는데 우겨서 문제가 된 거잖아요. 인정 좀 하시지?”
탄산음료를 마시던 유은혜가 쓰게 핀잔했다.
던전의 6층, 용암 지대에서 몇 개의 나무집을 발견하고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보통의 세이브 존은 기하학적으로 생긴…… 통칭 ‘똥집’ 주변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춘원은 나무집을 발견한 즉시 세이브 존이라고 박박 우기며 공격대원 전원을 끌고 간 것이다.
하지만 그 주장과 다르게 마수가 난입하며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었다.
김춘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아저씨야? 나 아직 20대 초중반이거든? 그리고 애당초 그런 곳에 나무집이 있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다고. 마수가 집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잖아?”
“왜 없어요? 지능이 있고 이족 보행하는 마수도 있는 것 같던데.”
유은혜의 대답에 김춘원이 눈을 부라렸다.
“이 가시나는 사사건건 딴죽이네.”
“어머, 무서워라. 꼭 어디 으슥한 곳으로 끌려갈 거 같어!”
엄살을 부리며 유은혜가 에드워드의 뒤로 숨었다. 닭 다리를 물어뜯던 에드워드가 김춘원을 바라봤다.
아이답지 않게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김춘원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는 극소수의 몇 명을 대할 때를 제외하면 항상 저런 눈빛을 짓곤 했다.
‘애새끼 눈깔이 무슨……!’
내심 욕지기를 뱉은 김춘원이 맥주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조금 더 건실한 이야기를 위해 이지혜가 손뼉을 쳤다.
“그만해요. 오늘 모인 건 마수 ‘파이록’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함이에요. 저희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을 정도로 강력한 마수이니 작전을 짤 필요가 있어요.”
몬스터 웨이브가 있었을 당시 한 차례 출현한 적이 있는 마수다. 전투기를 떨어트리고 수많은 군인을 학살한 파이록! 작은 용의 몸과 박쥐의 날개를 지닌 그 마수를 6층에서 마주했을 때 공격대는 혼비백산이었다. 대적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저 도망치는 게 전부였을 따름이다.
“언니, 딱 봐도 숫자가 많은 거 같진 않더라. 잘 피해 다니면 되지 않을까?”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유은혜가 의견을 개진했다.
이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문제야. 피해 다녀도 7층은 더 강한 마수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 우리가 5층을 뚫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벌써 잊었니?”
머드 골렘과 꼭두각시 인형, 하피가 주를 이뤘던 5층의 악몽을 떠올리자 공격대원 전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간 능력치를 올리고 스킬의 숙련도를 높여서 공략에 성공하긴 했지만 몇 번이나 전멸당할 위기를 넘기지 않았던가.
“언니, 그럼 방법이 없지 않아? 차라리 밑에 층에서 레벨업을 꾀하는 게 낫겠다.”
“길드에서 주는 압박이 장난 아니야. 데빌 헌터 공격대에 거는 주변의 기대가 너무 커. 적어도 7층 공략에는 성공해야 해. 시간이 많지는 않아.”
유은혜가 이마를 약하게 때렸다.
“에고고, 잘난 공대장님 덕분에 대원들 허리가 휘는구나!”
“그 잘난 공대장님은 지금 부재중이시고 말이야.”
사실 데빌 헌터 공격대의 주가가 이처럼 올라간 배경에는 랜달프 브뤼시엘이라 불리는 공격대장이 있었다.
그 한 명의 존재로 말미암아 데빌 헌터 공격대는 ‘대한민국 최강’이란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는데, 말이 최강의 공격대이지 실속이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유은혜와 에드워드가 최근 부각되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한데 공격대장이란 자가 크라스라와 함께 사라져 버렸으니…… 핵심 전력의 부재가 뼈 아프게 다가왔다.
어떻게든 공격대의 이름값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대원들이 발바닥에 땀나게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인가 싶었다.
급속도로 분위기가 다운되려 할 찰나, 유은혜가 손을 번쩍 들었다.
“다른 유명 공격대의 지원을 받는 건 어때?”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한 공격대면 우리와 페어를 짜려고 하겠니?”
유은혜가 입술을 쭉 내밀곤 투덜댔다.
“하긴, 우리 공격대가 좀 시기와 질투를 많이 받긴 하지. 하여간 너무 잘나도 문제예요.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몰라.”
5대 길드.
그중 데빌 헌터 공격대는 천명회 소속이었으나, 같은 길드 내에서조차 말이 많았다.
랭크전에서부터 시작해서 세계 각지의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낸 것까지 압도적인 위업을 많이 세웠지만 결국 ‘랜달프 브뤼시엘의 후광만이 존재하는 1인 공격대가 아니냐.’는 후문이 간간이 들려오는 것이다.
내부가 이럴진대 다른 네 개의 길드는 어떻겠는가. 다들 공격대장은 인정하는 분위기지만 공격대 자체는 그다지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아예 공격대장인 랜달프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하면 모를까…… 공격대에서 보내는 요청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 버릴 터였다.
“그렇다고 아무 공격대나 받을 수도 없어. 우리 공격대의 뒤를 캐려는 작자들도 많잖아. 괜히 합류했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골치 아파.”
이지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나저러나 데빌 헌터 공격대만으로 해결을 봐야 했다.
“언니, 그러지 말고 이걸 기회로 삼자. 오히려 공대장님이 안 계신 지금 우리가 7층을 공략한다면 ‘1인 공격대’의 오명도 벗을 수 있지 않겠어?”
“그게 오명이라면 정말 좋겠는데.”
대원들 모두가 안다. 공격대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이곳에 모인 모두가 덤벼들어도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진정한 강자라는 걸 말이다.
유은혜가 어깨를 으쓱하며 탄산음료가 든 잔을 들었다.
“에이, 꿀꿀해. 일단 마시자. 일단 마시고 생각하자!”
“가시나. 탄산음료 들고 저게 뭔 또라이 같은 짓, 헉?”
김춘원이 빈정대자 바로 앞 식탁 위에 포크가 꽂혔다.
깜짝 놀란 그가 이를 갈며 포크를 던진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포크가 날아온 각도를 계산하여 산출한 결과 에드워드가 당첨되었다.
“…….”
김춘원이 시선을 돌렸다.
부글부글 끓던 속이 단번에 진정되었다.
아무리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그라지만 저 어린놈의 눈빛만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또 유은혜에겐 정상적으로 구니 아주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에이, 시벌. 마마보이냐?’
어린놈과 싸우면 자기만 손해라며 애써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김춘원이었다.
* * *
던전의 최상층.
나는 가만히 던전 코어 위에 뜬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내정 모드로 들어가 시시각각 일어나는 변화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바로 근원의 나무 때문이다.
풍요의 여신상이 주는 축복의 효과로 가파르게 성장 중이었는데,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았다. 만물상점에서 판매하는 잡화 중 창세와 관련된 서적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독파했지만 근원의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최초로 생명을 잉태했다는 것. 수많은 서적을 읽으며 그 하나만 건질 수 있었지.’
결국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 가시적으로 두드러지는 특징은 나타나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던전 내부를 파악하는 중이었으나 0.5% 정도 번식률이 상승했다는 걸 제외하면 전무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자연적으로 올라간 것인지 근원의 나무가 영향을 준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 시기상조이긴 하였다.
허나 세계수를 잡아먹고 나타난 종인 만큼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창세와 관련된 나무이니…… 작은 것 하나 놓쳐선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눈에 불을 켜고 홀로그램만 주시하고 있는 이유였다.
“마스터, 이히가 아주 재밌는 걸 봤어요!”
킹 비를 데리고 마실을 나갔던 이히가 혼자서 돌아왔다. 항상 웃는 모습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싱글벙글한 상태였다.
“그렇군.”
가볍게 대꾸해 주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히가 눈앞으로 날아와 날개를 퍼덕였다.
“이히가 아주 재밌는 걸 봤어요!”
“비켜라. 안 보인다.”
“힝…….”
어깨를 축 늘어트린 이히가 쓸쓸하게 퇴장했다. 그러더니 혼잣말을 시작했다.
“인간들이 올라왔는데. 드워프가 막 퀘스트도 내리던데. 이히가 진짜 봤는데. 예전에 마스터가 보고하래서 한 건데. 그야 이히가 장난을 조금 치느라 늦기는 했지만 마스터는 너무해. 이히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어요~ 앞으로는 안 알려 줄래요.”
“7층에 인간들이 나타났다는 건가?”
내가 관심을 가져 주자 이히는 급격히 태세를 변환시켰다.
“네, 마스터. 이히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순식간에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더니 다시 헤실헤실 웃는다. 요정은 단순하다지만 이히는 더한 느낌이다. 관심을 먹고 사는 그런 종류의 요정이라고 할까?
“마찰이 생기진 않은 것 같군.”
조만간 인간들이 7층에 다다르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미 대강의 준비가 끝난 상태이긴 했지만 가장 걱정했던 게 인간들이 다짜고짜 드워프를 공격할 경우였다. 다행히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인간들은 멍청해요. 조금만 잘해 줘도 속아 넘어가요. 작은 드워프가 무기를 수리해 준다니까 바로 경계심을 없애는 거 있죠? 그걸 보고 이히는 배꼽이 빠지게 웃었어요.”
“이히, 퀘스트가 정식으로 등록되는 걸 확인했나?”
마수가 인간에게 퀘스트를 부여할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마수가 퀘스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
“작은 드워프가 부탁을 하니까 인간들이 놀라 했어요. 퀘스트창이 떴다면서 막 좋아했어요.”
이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 퀘스트를 부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상당히 중요하고 유용한 정보였다.
즉시 던전 수정구를 꺼내 와 7층의 드워프 마을을 비췄다.
잠시 후 수정구의 표면이 흐려지며 마을의 전경이 펼쳐졌다.
완공된 마을은 제법 볼만하였다.
우선 2층 높이의 건물 10여 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광장에는 조각상이 넘쳐 났고, 시계탑도 세워져 있었다. 특히 건물은 드워프만이 아니라 인간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몇몇 인간의 얼굴이 무척이나 낯익었다.
‘유은혜, 이지혜, 에드워드 윈저.’
모를 수가 없다.
저들은 내가 공격대에 직접 끌어들인 인간들이다.
‘가장 먼저 7층에 오른 게 데빌 헌터 공격대라.’
묘한 기분이었다.
한동안 공격대의 존재를 잊고 있었건만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이야.
뿌듯한 마음도 없진 않았다. 다른 층도 아니고 7층에 최초로 오른 게 데빌 헌터 공격대인 것이다. 나 없이도 해냈다는 건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지켜봐야겠군.’
나는 턱을 쓸며 가만히 수정구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