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80화
‘대체?’
헛것을 본 건가? 이지혜가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비비고 또 비벼도 반투명한 ‘요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정이 역정을 내자 킹 비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곤 주눅이 든 듯 펄럭이는 날개의 힘을 쭉 빠트렸다. 누가 봐도 요정에 의해 저 거대한 괴물 벌이 조종당하는 모습이다.
이지혜는 주변을 둘러봤다. 남아 있는 대원의 숫자는 고작 셋이 전부였다. 나머지 아홉은 진즉 땅에 누웠다. 죽은 이는 없지만 위급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요정 이히가 팔짱을 끼곤 거만하게 말했다.
“잘못했다고? 이히는 그런 말, 믿지 않아. 이히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걸 좋아해. 번드르르한 말로 상처 주는 남자가 던전에 너무 많아. 이히같이 착한 요정은 항상 그런 남자의 희생양이 돼.”
이야기만 들어 보면 비운의 여인이 따로 없었다. 남자에게 크게 데이기라도 한 듯 슬쩍 눈시울을 닦는 행동까지 보여 주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러자 킹 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지팡이를 들었다.
“멈춰!”
쓰러지지 않은 대원 두 명이 이지혜의 곁으로 다가왔다. 세 명. 바글바글한 킹 비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꿀꺽!
다리가 바르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이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니, 이 못생긴 계집애는? 꼭 히프그리프 엉덩이 같이 생겨 놓고선.”
“어, 엉덩이? 아니, 그보다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뭐지?”
이지혜가 당황하다가 급히 정색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도망갈 틈을 찾아야 한다. 시선은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뒷짐 진 손으로 다른 두 대원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위급 상황 시 말을 하지 못할 때 의미를 전달하고자 사전에 모의한 내용이었다.
기회, 도망, 도움. 이 세 단어를 대원들이 알아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이히는 입을 가리고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머, 히포그리프 엉덩이 같이 생긴 게 머리도 나쁜가 봐! 혹시 너의 뇌는 배설물로 이루어져 있니? 아우, 냄새나.”
코를 막고 손을 휘휘 젓는다.
“…….”
요정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악덕한 요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동화에 나오는 요정이란 장난기가 많긴 해도 기본적으로 깨끗하고 착한 이미지인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자신을 이히라 칭하는 요정은 정반대였다.
이렇게 막말하는 요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리고 매일 산책하는 경로에 쓰레기가 있는데, 그럼 안 치우겠니?”
“쓰레기……?”
“이히히, 이히는 착한 요정이라 쓰레기를 보면 꼭 치우거든.”
이히가 우쭐했다.
정말 자신을 ‘착한 요정’의 범주 안에 넣고 있는 모습이다.
그때였다. 이지혜의 뒤에 서 있던 두 대원이 뒷걸음질을 치더니 대뜸 달려 나갔다. 킹 비나 이히가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움직인 것이다.
“앗! 놓치면 안 되는데……!”
“쫓아가게 놔둘 줄 알아? 워터 스피어!”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 이지혜가 이히에게 워터 스피어를 갈겼다. 저 요정이 킹 비를 움직이는 주체라는 걸 알았으니 요정만 배제하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요정은 영체다. 거기다가 이히는 던전 코어의 요정이었다. 던전 코어에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이히가 피해를 입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이히는 기분이 나빠진 양 볼을 두툼하게 부풀렸다.
“이 못생긴 계집애! 감히 이히를 공격해?”
“칫!”
혀를 찬 이지혜가 불안한 듯 지팡이를 억세게 쥐었다. 여기서 끝인 듯싶었다.
유은혜라도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여의치 않았다. 던전에 들어가게 되면서 언제고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암담하기만 했다.
“아무리 천사같이 착한 이히라지만 이건 어쩔 수 없어. 너는 혼 좀 나야겠어.”
이히가 검지를 놀려 이지혜를 가리켰다.
위이잉-!
이어 벌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물량. 이지혜의 스킬은 상극이어서 먹히지도 않았다.
푹!
결국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킹 비의 침이 몸에 침입하는 걸 허용하고 말았다. 옆구리에 기다란 침 하나가 꽂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자연스럽게 눈이 감긴다.
이게 끝인가? 이대로 죽기는 억울하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생생한 꿈은 꿔 본 적이 없으니 정말 잔인한 현실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지혜가 완전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이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이히가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거 같아. 그게 뭘까?”
가만히 턱을 쓸면서 고민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에이~ 별거 아니겠지.”
룰루루!
콧노래를 부른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히를 당할 자는 없었다. 고민 따윈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 이히가 퇴장했다. 그 뒤를 수많은 킹 비가 뒤따랐다.
* * *
이지혜가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침대 위?’
포근한 감촉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옆에서 유은혜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언니, 일어났어?”
“은혜야…….”
“뭘 그리 놀래? 걱정 마. 여기 천국이야.”
천국? 이지혜가 입을 크게 벌렸다. 사지가 경직되고 숨이 가늘어졌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하기야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진짜 죽었구나.”
“기분이 어때?”
“모르겠어. 그냥 멍해.”
“조금씩 익숙해질 거야. 나도 처음에 눈떴을 땐 많이 당황했다?”
“흐윽.”
하지만 그다지 위로는 되지 않았다. 이지혜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도리어 당황한 건 유은혜였다.
“어, 언니?”
“미안해, 은혜야. 언니가 너를 지켜 주지 못했어.”
“노, 농담이야, 농담! 안 죽었어. 나 멀쩡해! 여기 천국도 아닌걸.”
“뭐……?”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이지혜가 눈을 깜빡였다. 굉장히 죄지은 기분으로 유은혜는 재빨리 설명했다.
“드워프 마을이야. 드워프들이 우리를 구해 줬대. 미안해, 언니. 이런 장난 한 번쯤 쳐 보고 싶었어. 용서해 줘.”
“살아 있다고?”
“그래!”
유은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이 착한 언니를 놀리지 말아야겠다며 굳게 다짐도 했다.
쓱쓱. 이지혜가 눈물을 닦았다. 동시에 뺨을 꼬집어 보더니 훽! 고개를 돌려 유은혜에게 달려들었다.
“너…… 죽었어!”
“꺄하하! 미, 미안하다니까, 언니!”
10개의 손가락이 유은혜의 옆구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 * *
드워프 족장 스테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오. 설마 그 악덕한 요정을 그대들이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소. 근처를 지나가던 형제가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잘못했다간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소.”
이곳은 장로의 집이었다.
대원들의 몸이 회복된 순간 한 번에 들이닥친 것이다.
이지혜가 격한 숨을 고르며 물었다.
“대체 그 요정은 뭐죠?”
“뭐긴 뭐겠소, 악덕하기 그지없는 요정이지. 간혹 한 번씩 나타나는데 우리도 매우 골치라오. 올 때마다 주변을 깽판 쳐 놓고 가니 우리로서도 방법이 없소.”
스테인은 이히에 대한 뒷담을 서슴없이 행했다.
“그런 위험이 있다면 미리 언질을 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후…… 맞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무구를 하나씩 드리리다. 흑와 10마리를 퇴치한 보상과 내 미안함이 더해졌다 생각해 주시오.”
이지혜가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식으로 따져 봤자 끝이 없음을 인지한 것이다. 그저 대원들 전부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화가 날 따름이었다.
하지만 족장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지 않나. 화풀이를 해 봤자 진전되는 건 없었다. 이쯤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게 자신의 역할일 것이었다.
“계산에 없었다니 어쩔 수 없군요. 좋아요, 저도 이런 식으로 관계가 파탄 나길 바라지는 않으니까.”
“고맙소.”
스테인이 근엄하게 미소 짓는 그 순간이었다.
『‘스테인의 부탁’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의 난이도를 측정합니다. 난이도는 ‘낮음’입니다.』
『최초로 마수가 내리는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상태창에 칭호 ‘평등한 자(N, 힘+2)’가 추가됩니다.』
“칭호다!”
“맙소사, 내가 칭호를 얻다니…….”
단원들 모두가 몸을 들썩였다. 노멀 등급의 칭호라고는 하나 칭호 자체가 얼마나 얻기 어려운지 아는 탓이다.
돌발 퀘스트는 제법 진행이 됐지만 마수가 내려 주는 퀘스트를 이행한 각성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최초’ 업적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이지혜를 향해 스테인이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구려. 그보다 슬슬 일어납시다. 우리의 보물 창고로 용사 분들을 안내하겠소.”
각자 원하는 무구를 하나씩 들고, 데빌 헌터 공격대는 던전을 내려갔다. 안전한 루트를 파악해 뒀기에 내려가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들 드디어 집에 간다는 생각에 지쳐 하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던전을 빠져나오자 이지혜가 말했다.
“병원 들러서 검진받는 거 잊지 마세요.”
“우리 매니저님은 걱정도 많으셔~”
“은혜야, 농담 아니야.”
“넵.”
지은 죄가 있는지라 유은혜는 즉시 꼬리를 내렸다.
이어 던전 바깥에 세워 둔 전용 버스에 올라탔다. 데빌 헌터 공격대에만 지급된 이 버스는 크기도 크기지만 방탄 차량이라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었다. 데빌 헌터 공격대의 트레이드마크인 반쪽짜리 해골이 새겨져 있어서 제대로 홍보도 되었다.
의자에 앉은 유은혜가 기지개를 켰다.
“아, 드디어 집에를 가는구나.”
“안전벨트 꼭 매.”
“언니, 사실대로 말해. 엄마지? 우리 엄마가 둔갑한 거지?”
이지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동시에 피로함이 몰려왔다. 몇몇 대원은 앉자마자 꾸벅대며 졸기 시작했다.
운전대에서 대기하던 전용 버스 기사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피로한 모양이군요.”
가볍게 손을 든 이지혜가 힘겹게 답했다.
“기사님, 천천히 가 주세요.”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운전기사가 엑셀을 밟자 이지혜는 버스에 비치해 두었던 휴대전화를 들었다. 전원을 누르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부재중 메시지 26건’이라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26건 중 24건이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 김용우가 보낸 것이었다. 나머지 두 건은 대출 문자였다.
―랜달프 공대장 기다려도 된다니까, 왜 억지로 무리를 해서 들어가?
―던전 공략 진행 중이야? 후! 미치겠네. 나오는 즉시 연락해.
―진행 상황 어떻게 됐느냐고 문의가 빗발친다. 나오는 즉시 연락해.
문자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답장을 치기도 귀찮다.
이지혜는 최대한 함축적인 단어만 골라서 적은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드워프, 퀘스트, 성공적. 그리고 졸림.
이어 휴대전화를 옆자리에 던져 버리곤 이지혜도 눈을 감았다.
* * *
이히가 던전 코어에 등을 기대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마스터, 이히가 잘못했어요. 겁만 줬어야 했는데 이히가 모르고 큰일을 벌였어요.”
자진 신고다. 딱히 아무런 말도 안 했음에도 이히가 벌 받기를 자처한 것이다. 나는 가만히 이히를 바라봤다.
“그런데 마스터, 못생긴 계집애가 이히를 공격했어요. 이히에게 실체가 있었다면 많이 아파했을 거예요.”
“너는 실체가 없다. 그런 공격에 흥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건 그렇지만요…….”
이히가 시무룩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바란 건 대원들에게 겁을 줘서 7층 이상으로 못 올라가게 하는 것이었다. 8층부터 11층까지는 아무런 마수도 들이지 않은 상태였고, 12층에 존재하는 ‘나가’는 중급 3Lv의 마수다. 파이록 한 마리에도 쩔쩔매는 대원들이 집단생활을 하는 나가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단순히 겁만 줘서 오를 생각을 접게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 이히는 더 나아가 대원들을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조금만 대처가 늦었다면 유은혜와 에드워드를 잃을 뻔했다. 킹 비의 독은 20분 내에 제거하지 않으면 생환이 불가능하니 아찔한 순간이었다.
‘조금 엄하게 할 필요가 있겠군.’
내가 지켜보는 와중에 진행이 된 터라 다행히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안 보고 있었다면 멋대로 폭주하여 사달을 냈을 게 뻔했다.
그간 너무 풀어 준 게 원인일까?
“한동안 너의 권한을 회수하겠다.”
“마, 마스터…… 이히가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이히가 기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턱도 없었다. 이번 기회로 말미암아 제대로 버릇을 들일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네가 만든 정원도 폐쇄하겠다. 그동안은 눈감아 주고 있었지만 그것은 직무를 잘 수행하리라 믿어서 놔둔 것이다. 매번 이런 식으로 실수를 한다면 눈감아 줄 이유가 없다.”
“아, 안 돼요, 마스터. 그러면 꿀벌들이 다 죽어 버릴 거예요. 이히가 매일 돌봐 줘야 한단 말이에요.”
이히의 표정은 절실했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여기서 용서한다면 매번 실수를 반복할 것이었다.
몸을 돌려 15층으로 향했다. 근원의 세계수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마스터! 제발요. 앞으로 이히가 열심히 할게요. 네?”
들리지 않는 메아리. 결국 최상층에는 이히만 홀로 남았다.
“마스터…… 히이잉…… 꺼윽! 흐이잉…….”
손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히가 구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 * *
[차원 게이트 오픈 중…… 13%]
[게이트 코드 강제 변경. 마계에서 지구로 강제 이동 됩니다.]
[주천사 하쉬말 외 천사 2,000기…….]
[모든 플레이어에게 이벤트 메시지 송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