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83화 (83/242)

던전 사냥꾼 83화

* * *

수 시간 전…….

던전의 최상층에서 만물상점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차원 게이트의 출현으로 던전 코어의 기능이 제약됩니다. 만물상점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메시지창만 주구장창 뜰 뿐이었다.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군.’

시간만 버렸다. 이벤트를 알려 줄 때 함께 공지했다면 한결 나았을 테지만 시스템의 친절 부분에 관해선 이미 낙관해 버린 뒤였다.

전생에서 천사가 등장한 건 던전을 잃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당연히 만물상점의 이용 여부를 내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포인트가 많아 봤자 허사. 이래서 많은 마족이 천사에 의해 고통을 당한 건가, 생각하니 납득은 되었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러나 당황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빠르게 마수들을 소집시키고 나는 홀로 던전을 빠져나갔다.

직후 들른 곳은 길드 천명회.

오랜만에 모습을 비추자 시선이 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2층에 올라 데빌 헌터에게 주어진 룸의 문을 열었다. 동시에 보이는 광경…… 커다란 TV를 중심에 두고 모든 대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어? 공대장님!”

가장 먼저 유은혜가 눈치를 채곤 달려왔다. 그 뒤에 에드워드가 빈대처럼 딱 붙어 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디 갔다 오셨…… 아니, 이젠 별로 궁금하지도 않네요.”

이지혜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없을 때 공격대를 이끈 존재가 그녀였다. 눈 밑에 진 그늘이 그간의 고생을 알려 주고 있었다.

“가면의 재고가 얼마나 남았지?”

“해골 가면요? 옆에 있는 성은 유씨요, 이름은 은혜라는 처자가 500개쯤 주문하는 바람에 창고에 그득~ 쌓여 있죠.”

“두고 봐. 나중에는 분명 가면이 부족해질 테니깐.”

유은혜가 입술을 쭉 내밀고 항명했다.

그나저나 500개라.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가면을 모두 꺼내라.”

이지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디다가 쓰시려고요?”

“천사를 돕는다. 우리만으로는 부족하니 당장 모든 웹, 길드에 요청하여 데빌 헌터 공격대의 이름을 달고 사람을 모으도록. 내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 가면은 지원을 오는 이들이 착용할 것이다.”

“일반 각성자라면 몰라도 길드는 반발할 거예요.”

검은색 해골 가면은 데빌 헌터 공격대의 상징이다. 다른 길드들이 그것을 착용하고 활동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니 사전에 공지해야겠지. 시간이 없다.”

“대규모 마수가 출현 중이라는데…… 괜찮을까요?”

“우리가 괜찮지 않으면 누구도 괜찮을 수 없다.”

짧게 답했다.

하지만 충분했다.

데빌 헌터는 이미 세계적인 레벨의, 한국을 대표하는 최강의 공격대다. 대원들 역시 그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1인 공격대라는 오명을 벗고자 솔선수범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알겠어요. 길드 마스터를 협박해서 빠르게 움직여 보죠.”

이지혜가 긴장한 듯 입술을 핥았다.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나의 출현으로 마음이 굳은 듯싶었다.

데빌 헌터 공격대장의 이름과 길드 마스터 김용우의 도움이 있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3시간 이내에 돌아오겠다.”

내가 몸을 돌려 걸어 나가자 이지혜가 급히 외쳤다.

“예……? 자, 잠깐만요! 공대장님, 정말 3시간 이내에 돌아오는 거죠?”

경북 울진.

강남을 벗어나 다음으로 발을 들인 곳이었다.

바람의 가루를 이용해 공중을 날아, 불과 30분 만에 다다를 수 있었다.

높은 마력과 민첩 능력치 덕분이다.

‘제대로 찾아왔군.’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나는 현재 안개형 마수 ‘쉐이드’를 대동하고 있었다. 마치 온몸에서 먹구름이 쏟아지는 것만 같은 모양새. 외견상으로는 절대로 나를 알아볼 수 없다.

주변을 살피자 둥그런 모양의 건축물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인간들이 원자력 발전소라 부르는 것이었다. 막대한 에너지의 집합체. 어마어마한 전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장소. 다른 건 몰라도 인간의 이러한 기술 하나는 인정해 줄만 하였다.

두꺼운 시멘트 벽에 손을 얹으니 그 안에서 용솟음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인위적이지만 제법 맛있어 보이는 성질이다. 특히 아주 밑바닥에 존재하는 원천은 절로 군침이 돌았다. 뇌신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몇 년 뒤에나 손을 댈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이곳 한국은 원자력 발전소에 상당 부분 기댄 채 생활하고 있었다. 당장 발전소가 사라지면 죽어 나갈 인간이 너무 많다. 물론 인간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던 딱히 상관은 없지만 문제는 각성자의 성장이 느려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여 나중에나 먹어 치울 작정이었다. 앞으로 3년 정도만 더 지나면 인간들은 마수의 코어로 ‘신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굳이 원자력 발전소에 기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

나로선 그런 가치 없는 것으로 이만한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게 퍽 신기할 따름이다. 코어는 던전에서 마수를 죽이면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던전의 마력 흐름과 연관이 있지 않을는지 예상만 하고 있었다. 던전 바깥에서 마수를 죽이면 코어가 나오지 않으니 그 외엔 딱히 짐작되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수의 코어는 마족에게 있어서 쓰레기에 불과하다. 한때 연구를 진행하던 마족도 있었던 것 같지만 포인트만 대량으로 날렸다.

하여튼 간에…… 원자력 발전소를 찾은 건 본래 예정에는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사건이 사건이니 별수 있겠는가.

“뇌신, 먹어 치워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뇌신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발전소 안으로 몸을 날렸다.

발전되고 있는 전력은 관심이 없다는 듯 오로지 ‘원천’을 향해 달려 나갔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입을 크게 벌린 뇌신은 단번에 원천을 먹어 치웠다.

이내 메시지창 하나가 떠올랐다.

[‘뇌신’이 막대한 전력을 품었습니다. 전력량 ‘1GW’가 추가됩니다.]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효율이 좋지는 않다.’

1기가와트. 뇌신이 딱 1분 더 활동할 수 있는 전력량이다. 외부의 것을 소화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최악의 효율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게다가 주변에는 아직 몇 개의 발전소가 남아 있었다. 경북 울진에 자리 잡은 원자력 발전소를 차례차례 들른다면 조금 더 전력량이 상승할 것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시간 동안 일곱 곳의 발전소를 탐문한 결과 내 전력량은 기존 ‘16GW’에서 ‘21GW’로 상승하였다. 원천을 먹어 치울 때마다 효율이 낮아져서 기대보단 낮은 수치였지만 그럭저럭 보탬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발전소를 탐하던 순간에 아래와 같은 업적이 떠올랐다.

[쏠쏠한 업적! 국가 기반 시설을 다수 파괴하였습니다. 이제 한국은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릴 것입니다.]

[300,000PT가 주어집니다.]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처음 뇌신공을 연마할 당시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업적이다.

포인트를 얻어 봤자 당장 쓸데가 없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이 역시 내가 우위를 점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21분이라.’

뇌신이 활동 가능한 시간.

필요할 때만 불러내면 시간이야 더 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오래 사용할 순 없었다.

다른 발전소를 더 탐한다고 해도 가파른 전력량의 상승을 기대하긴 어렵다.

이쯤에서 슬슬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던전 베리어의 내구도는 지금도 꾸준히 깎여 나가고 있을 것이므로.

‘뇌신만 가지고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군.’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싸우는 방법은 뇌신을 이용한 타격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를 위해 위장 전술을 펼친대도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발견될 가능성이 무척 높은 탓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현재로선 이 정도가 최선이다.

짧게 침음을 삼키며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 * *

나는 가만히 하쉬말을 올려다보았다.

순백의 날개, 위엄과 품격이 넘치는 자태……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운 외견의 소유자. 하지만 그녀는 사품의 주천사이며 빛을 나르는 ‘전도자’다.

전생의 하쉬말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천사들을 끌고 와 무려 1년 6개월간 마족을 괴롭힌 장본인이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그 가공할 회복력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 그지없다.

결국 대공 아리엘의 전매특허 스킬 ‘어비스 소드’에 두 동강이 나긴 했지만 그 전까지 치러진 격전에 대부분의 마족이 씻지 못할 피해를 입었다.

‘피부가 저릿해.’

당시의 나는 그 격전지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마족과 하쉬말이 싸우는 걸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내 딴에는 그들의 재량을 파악하고 최후에 검을 들이밀겠다는 판단이었으나…… 지금 돌아보건대 결국 변명이 아니었을지.

허나 이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하쉬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름이 돋는다.

피부가 저릿할 수준의 신성력이라니!

즉시 주먹을 불끈 쥐고선 심안을 열었다.

이름: 하쉬말

직업: 주천사

칭호 :

* 빛을 나르는 자(Epic, 지능마력+6)

능력치 :

힘 89 지능 87(+6)

민첩 87 체력 83 마력 92(+6)

잠재력(438+12/471)

특이 사항: 세상에 빛을 전파하는 사품의 천사입니다.

스킬: 빛의 전파(Epic), 수없이 쇄도하는 빛의 창(Epic), 빛의 우레(Epic)

[상대 비교]

하쉬말

힘 89 지 93 민 87 체 83 마 98 잠재력(438+12/471)

랜달프 브뤼시엘

힘 93 지 77 민 88 체 86 마 96 잠재력(392+48/500)

용맹의 향초, 승리의 물방울, 열정의 구슬로 말미암아 보조 능력치가 +3이 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치 총합에서 하쉬말에게 밀리고 있었다.

능력치 총합 450.

혼자서는 아무리 강해 봤자 한계가 있다지만…… 현시점에서 균형 붕괴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존재다. 하물며 에픽 등급의 스킬이 무려 세 개였다.

500만 포인트를 지급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마족들이 불쌍해 보이긴 또 처음이군.’

이곳에 모인 마수의 숫자만 거의 1만에 달했다. 어중간한 마수도 많았지만 하쉬말 하나를 상대하는 데 대부분의 마수가 소진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마족의 진영이 승리하긴 할 터였다. 하쉬말을 보조하는 천사의 숫자가 턱없이 적었다. 단지 누가 더 많은 피해를 입느냐의 기로일 따름이었다.

약세를 보인다면 하쉬말을 처리한 그다음이 문제가 되는 탓이다.

“천사님을 지켜라!”

“하늘의 사자를 돕자!”

우르르 몰려든 각성자의 숫자가 500이었다. 능력치 자체는 볼품없다지만…… 지금 상황에선 충분히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숫자다.

하쉬말과 마족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느닷없이 훼방꾼이 등장한 셈.

“공대장님, 흩어지면 분간이 잘 안 되겠는데요!”

유은혜가 앓는 소리를 냈다.

기세 좋게 등장하긴 했지만 해골 가면을 쓴 사람이 500에 달하니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너희는 내 곁을 벗어나지 마라. 다가오는 마수만 처리한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크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내 의도는 오로지 하나.

각성자들 틈바구니에 숨어서 본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최대한 마력을 억제한다. 누구도 나를 알아차릴 수 없게끔. 다른 모든 걸 봉인한 채 오로지 전력 하나만 남겨 둔다.

“숯덩이로 만들어라, 뇌신.”

치이이익-!

튀어나온 뇌신이 물었다.

누구를?

가만히 손가락을 뻗었다.

캬오오오오!

뇌신이 괴성을 내지르며 마족과 마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