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84화
투명 벌레.
태양빛을 받으면 자동으로 투명해지는 중급 1Lv의 마수.
어린아이만 한 크기인 데다가 개체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숫자가 수천이 넘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날개를 진동시켜 적을 혼란에 빠트린다. 그리고 마치 피라냐처럼 떼거리로 달려들어 물어뜯는데…… 수천 쌍의 날개에서 만들어진 진동이 뇌를 진탕으로 만들어서 정작 뜯어 먹히는 당사자가 크게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천에 달하는 투명 벌레가 지금, 각성자들을 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전뢰!”
쿵!
유은혜가 손가락을 펼쳐 총을 쏘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불꽃이 튀기더니 사방으로 전기가 퍼져 나갔다. 라이트닝 볼트의 등급이 오르며 나타난 레어 등급의 스킬이었다.
투명한 상태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던 벌레 다수가 이 충격에 휩쓸려 나갔다. 제아무리 투명 벌레라고 해도 뛰어난 오감을 지닌 각성자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물의 장벽!”
이어 이지혜가 폭 5미터, 높이 2미터 크기의 장벽을 세웠다. 전번 던전에서 킹 비에게 굴욕을 겪고 새롭게 익힌 스킬이었다. 투명 벌레의 날개에서 쏘아지는 진동을 막아 주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모인 각성자는 나름 수준이 괜찮은 편이었다. 투명 벌레는 중급 마수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에 속했으므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공대장님, 우리가 낄 자리가 없어 보이는데요?”
근처의 투명 벌레를 쓸어버린 유은혜가 이마의 구슬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 근처에선 에드워드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괜찮군.’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에드워드와 유은혜의 조합은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둘이서만 벌써 투명 벌레를 10마리 가까이 처리한 것이다. 미래의 10강과 그에 준하는 여인의 만남. 이 둘이 어찌 성장할지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가 있을 듯했다.
“공대장님?”
유은혜가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나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답했다.
“이 싸움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조금씩 해 나가면 된다.”
“후! 솔직히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지만요. 그나저나 저 날개 여섯 개 달린 천사는 진짜 어마무시하네요. 마수가 불쌍해 보이긴 처음이에요.”
천족과 마족의 싸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할 광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하쉬말이 압권이었다. 수백 가닥의 창을 연이어 날려 마수들을 처리하는 게, 꼭 코끼리가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 같았다.
마족들도 처음에는 하쉬말을 처리하는 쪽으로 가려 했지만 현재는 노선을 바꿔, 주변의 천사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초회복을 시킨 대도 사지가 절단되고 심장과 뇌가 완전하게 파괴되면 복구가 불가능하다. 주변의 천사들을 모두 정리한 뒤 하쉬말을 처리할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뇌신을 이용해, 마수와 마족의 진열을 흩뜨려 놓는다. 실제로 뇌신은 마수들의 사이를 오가며 닥치는 대로 주변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천사의 패배가 뻔하다. 그러나 그런 뻔한 상황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양패구상. 서로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길 진심으로 소망하고 있었다.
마족들도 난데없이 나타난 뇌신에 당황한 모습이다. 곧 뇌신이 스킬이라는 걸 깨닫고 시전자를 찾고자 눈을 굴렸지만 마족이나 천족 외에는 집히는 이가 없었다.
아예 각성자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설마 인간 따위가 저런 스킬을 부리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지. 물론 내가 인간인 건 아니었지만 저 방심은 필시 화를 불러올 것이었다.
‘돌아와라, 뇌신.’
이쯤이면 되었다. 뇌신이 활동한 시간은 고작 5분 남짓이었지만 천사들에게 반격의 틈 정도는 만들어 주었다.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전력량은 무척이나 적은 바, 앞으로 뇌신은 필요한 때만 꺼낼 작정이었다.
거대한 용의 형상이던 뇌신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내 몸 안에 똬리를 틀고 다음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M1, M2. 기동하라.’
그 순간.
지이잉…….
던전의 외벽에서 대기하던 자동 골렘 M1과 M2의 눈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 * *
M1과 M2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골렘 자신과 던전의 베리어를 공격하는 자만 자동으로 격퇴하게끔 명령을 내렸다.
하늘을 노니는 두 은빛 갑주의 골렘은 상당한 파괴력을 선보였다. 신체적 능력치만 따지자면 최상급 마수에 버금가는 강자다. 하쉬말이 직접 신경을 쓰지 않는 한, 일반 천사들로 두 골렘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쉬이익!
하지만 천사들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방진을 짜고 체계적으로 M1과 M2를 노렸다. 활을 든 권천사가 시위를 당길 때마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천사들의 무기는 신성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항마력이 낮은 두 골렘으로선 매우 위협적이었다.
허나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골렘의 싸움 방식은 간단했다. 피한 후 접근하여 천사의 날개를 양손으로 붙잡는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뜯어 버린다.
“아아악!”
천사의 날개는 신성력의 집합체다.
회복하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린다. 초회복도 먹히지 않는다.
날개를 잃은 천사는 바닥으로 떨어져 온갖 마수의 먹이가 되었다.
“…….”
하쉬말이 한쪽 손으로 성호를 그리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천사들이 외벽의 포화를 멈췄다. M1과 M2에게서 급히 떨어졌다.
침착하고 훌륭한 판단이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면서도 M1과 M2가 움직이는 원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놀랄 만한 집중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M1과 M2는 정확히 명령받은 일만 수행한다. 자신을 노리거나 베리어를 공격하는 이가 없으니 기동을 잠시 중단하였다.
하쉬말은 M1과 M2가 기동을 멈추자 그쪽으로의 신경을 완전히 접었다.
콰콰콰쾅!
곧 빛의 우레가 사방을 잠식했다.
“멍청한 놈들. 누가 보면 천족 상대를 처음 하는 줄 알겠군.”
사만이 비릿하게 웃었다.
백작 사만. 대공 우파의 휘하 마족인 그는 천사를 사냥하고자 이번 전장에 참여했다.
“뻔히 태양이 떠 있는 지금 천족을 공격해 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거늘…… 쯧쯧쯧.”
태양은 천족의 공능을 상승시킨다. 마족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무작정 부딪치는 건 자신감도 자신감이지만 이 이벤트의 성향이 쟁탈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마족이 가져갈 수도 있다는 압박이 행동을 서두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사만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정석대로 태양이 지면 움직일 셈이었다.
뒷짐을 진 채 슬쩍 고개를 돌려 데려온 마수들을 바라봤다.
사만은 다른 마족과 달리 많은 마수를 대동하지 않았다.
버그 베어, 뱀파이어, 웨어 울프 킹!
고작 세 마리. 허나 어중간한 마수보다 천 배는 든든했다.
달이 떴을 때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는 마수들로서 천족의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저녁이 된다. 나의 세상이 온다. 흐흐흐!”
사만이 하쉬말을 바라보며 입술을 훑었다.
* * *
태양이 졌다.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아니, 한국 전체가 어둠 속에 있었다.
한 치 앞도 분간이 되지 않을 깊고 깊은 밤.
천사들의 날개에서 주변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 뿜어진다. 하지만 그 숫자가 적다. 던전 안으로 들여보낸 200을 제외하면 고작 130가량이 남았을 따름이다.
반면 마수는 어떤가.
아직도 많다. 7천을 넘긴다. 대략 3천 마리가 반나절 사이에 증발했으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쉬말도 조금은 지친 기색이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태양이 떴을 때처럼 마구잡이로 빛의 창을 날리진 못했다. 혼자서 천 마리 이상의 마수를 몰살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백작 사만과 세 마리의 마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그 베어는 온몸이 새까만 키메라 종류의 마수다. 상위종의 벌레와 다크 베어를 합성하던 도중 우연찮게 태어난 산물. 달이 떴을 때 무척이나 흉포해지기로 유명하다.
뱀파이어, 웨어 울프 킹…… 말이 필요 없다. 둘 다 상급 4Lv의 강자이니 말이다. 특히 저녁이 되면 더욱 강해진다. 일반적인 천사라면 충분히 유린 가능했다.
“크하하! 천족의 씨를 말려라!”
사만이 채찍을 들었다. 다른 마족들이 보라는 듯 유쾌하게 웃으며 천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로 뱀파이어가 박쥐 형태로 변해 천사 한 명을 낚아챘다. 낚아챈 천사의 목덜미를 깨물며 피를 취했다. 피를 빨린 천사가 부르르 몸을 떨며 생기를 잃었다. 뱀파이어가 내리는 저주는 신성력에 상극. 한 번 물리면 신성력을 통한 회복은 먹히지 않는다.
웨어 울프 킹.
킹이라 이름 붙은 마수답게 싸우는 방식도 호쾌했다. 빠르게 도약하며 천사를 양단했다. 날개와 몸통이 함께 찢긴 천사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
그것을 바라보던 하쉬말이 빛의 창 수백 개를 꺼내 들었다. 수백 개의 창이 쇄도하며 뱀파이어와 웨어 울프 킹을 노렸다. 그러나 태양이 사라지고 체력이 고갈되며 전과 같은 위용을 드러내진 못했다. 속도나 명중률이 심하게 떨어졌다.
근처의 중급 마수 몇 마리가 죽었지만 정작 노린 뱀파이어나 웨어 울프 킹은 건드리지도 못한 것이다.
“갈보 같은 년! 네년의 공격 따위에 내 마수가 죽을 거 같더냐!”
사만이 크게 웃어 젖혔다.
이에 다시 한번 하쉬말이 빛의 창 수백을 꺼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날리지 않았다. 도리어 창들을 하나로 합쳤다.
3미터 길이의 기다란 삼지창이 완성되자 하쉬말이 그것을 거침없이 들었다.
싸움이 벌어진 이후 그녀가 무기를 드는 건 처음 있는 일.
그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뜻했다.
마족들의 눈이 빛났다.
“하쉬말의 목을 쳐라.”
“지금이 기회다.”
아껴 두었던 상급의 마수를 하나둘 풀었다.
여태껏 사용한 마수는 거의 다 중급 수준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작정을 했다는 뜻.
사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얌체 같은 놈들! 그러나 너희가 가진 마수로는 어림도 없다!”
버그 베어의 위에 탄 사만은 더욱 열렬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상급의 마수 몇이 더 추가됐대도 뱀파이어나 웨어 울프 킹에는 못 미친다. 특히 둘은 천족과 천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마족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자 결국 하쉬말의 근처를 지키던 유일한 역천사 하나가 최후를 맞이했다.
하쉬말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파악!
와이번 수십 마리를 동강 내고, 다가오는 상급 마수를 차례대로 처리했지만 끝이 없다. 하쉬말은 조금씩 벼랑 끝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심지어 웨어 울프 킹마저 처리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뒤를 이어 날아오는 채찍에는 무방비할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 내가 잡았……!”
사만의 채찍이 막 하쉬말에게 닿기 전.
캬오오오오!
뇌신이 사만이 있던 자리를 크게 한입 물고 지나갔다.
* * *
사만이 버그 베어와 함께 증발한 그 순간.
나는 지상에서 작게 미소 지었다.
‘무리해서 들어온 보람이 있군.’
각성자들을 이끌고 어느덧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던 것이다.
하쉬말이 슬슬 한계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해 억지로 밀고 들어온 탓에 백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마족 한 명과 바꾼 것이라면 매우 값이 싸다.
덕분에 뇌신이 방심한 사만을 먹어 치울 수 있었다.
[마족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칭호 ‘던전 사냥꾼’의 효과로 잔여 능력치 1이 생성됩니다.]
[500,000PT가 주어집니다.]
백작 나부랭이라 그런지 보상이 짰다. 그래도 잔여 능력치를 얻었으니 만족했다.
다른 마족들도 노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뇌신이 사만을 잡아먹는 걸 본 이상 극도로 견제할 게 분명하였다.
그때 하쉬말이 시선을 옮겼다.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알아챘구나.’
뇌신의 주인이 나라는 걸 눈치챘다.
문제는 내가 마족인 것까지 꿰뚫어 보았느냐다. 천족을 도와 마수를 처리하는데, 하쉬말이 나를 마족과 같은 선상에 올리면 앞으로의 일이 귀찮아진다.
최대한 마력을 억제하고는 있다지만 혹시 모른다. 긴장하며 하쉬말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 초의 시간이 지나고, 하쉬말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넘어갔나?’
알 수 없다.
그래도 적대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공대장님, 물러나야 합니다. 더 이상 파고드는 건 너무 위험해요!”
근처로 다가온 이지혜가 간곡히 요청했다.
강한 마수는 전부 하쉬말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마수도 숫자가 많아지면 치명적이다. 하물며 각성자들은 그런 중급 마수 한두 마리만 있어도 상대하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주변의 각성자 중에는 몸 성한 이가 거의 없었다. 포션을 부어 가며 억지로 버티는 게 고작. 트롤이나 비홀더, 밴쉬 따위가 주변에 넘쳐 났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눈 깜빡할 사이에 목숨을 앗아 가는 괴물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버텨라.”
“다 죽을 수도 있어요. 공대장님, 절대로 좋은 계획이 아니에요. 천사들이 밀리면 그다음 표적은 우리 인간들이라고요!”
이지혜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하쉬말을 비롯한 천족들의 진영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다는 걸. 힘 싸움에서 명백하게 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버텨라.”
“이……! 자폭할 생각은 아니겠죠?”
“아니다.”
이지혜가 입술을 꽉 깨물며 지팡이를 들었다.
재참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나는 던전의 입구를 한 차례 바라봤다.
그리고 뒤에서 이지혜나 유은혜, 에드워드 등을 도우며 ‘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