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85화 (85/242)

던전 사냥꾼 85화

* * *

크리슬리가 죽음 지팡이를 쥐고 비장하게 말했다.

“한 치의 빈틈없이 막아야 합니다. 상대가 천족이라고는 하나, 우리에게 주어진 전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1층에 모인 중급 이상의 마수가 무려 1,500.

그중 상급의 마수도 다수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설혹 전력이 부족하대도 이 던전은 필사적으로 사수해야 함이었다.

이곳은 마지막 보금자리였다. 근원의 나무를 틔우고 목숨을 다해 지킬 것을 다짐하지 않았던가. 크리슬리를 포함한 모든 다크 엘프의 눈에 각오가 서렸다.

하지만 줄리엄만은 예외였다. 그는 굉장히 걱정이 된다는 눈빛을 짓고선 입을 열었다.

“여왕님, 물러나 계십시오. 천족은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닙니다.”

병이 치료되고 던전 마스터와 의식을 맺음으로써 크리슬리는 다크 엘프의 정식 ‘여왕’이 되었다. 줄리엄, 심지어 크라스라마저 이제는 말을 높인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는 듯 크리슬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장로님, 일곱 기의 용아병과 리치가 바로 근처에서 저를 지키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여왕님은 모르십니다. 천족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이들인지……!”

줄리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계, 그중 오지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 줄리엄은 차원 게이트를 통해 나타나는 천족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하나같이 악랄하기 그지없는 손속으로 마계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려 들었다. 그럴 때마다 줄리엄은 발이 부르트도록 내달리며 생명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천계의 침공이 잦지는 않았다. 수십 년에 한 번꼴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번 나타나면 마계의 중심부를 제외한 모든 곳이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한마디로, 내륙에서 쫓겨난 약자들만 죽어 나간 것이다. 줄리엄이 기를 쓰고 세계수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외지는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항상 함께하고 있었다.

반면 크리슬리는 어리다. 천족의 두려움을 겪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줄리엄은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몸 추스를 정도의 실력은 있습니다.”

크리슬리가 그 걱정을 불식시키고자 환하게 웃었다.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져서, 이제는 같은 다크 엘프라도 그녀의 미모를 따라올 이가 없었다. 천하의 줄리엄도 잠시 넋을 놓았다.

겨우 정신을 찾은 줄리엄이 말했다.

“……이 늙은이가 목숨을 다해 지켜 드리겠습니다.”

“후후. 든든합니다.”

쿵!

콰아앙!

그 순간.

던전이 요동친다. 천족의 공격이 본격화된 것이다.

머지않아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다수의 존재를 포착했다.

크리슬리가 죽음 지팡이를 꽉 쥐었다.

“준비하십시오. 적이 옵니다.”

천사 2백.

권천사 넷.

능천사 하나…….

던전 안으로 들어온 천사의 숫자다.

어둡기 그지없는 던전임에도 전혀 영향이 없다는 듯 천사들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내 고르지 않은 지대에서 샤벨 타이거와 맞닥뜨렸다.

그르르르!

수십의 샤벨 타이거가 천사의 주변을 맴돈다. 빛으로 이루어진 무기를 꼬나 쥔 천사들이 다가서자 샤벨 타이거가 급히 물러난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듯.

그러나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천사들은 대열을 유지했다.

과연 천족들도 단순 무식하진 않다. 이것이 함정이라는 걸 단번에 간파하였다. 크리슬리는 즉시 리자드맨을 투입했다.

도마뱀과의 마수인 리자드맨은 중급 2Lv의 마수. 정면 대결의 귀재다.

스릅! 스르릅!

시미터와 둥그런 나무 방패. 작달만 한 갑옷을 걸치고 50여 마리의 리자드맨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매우 도발적인 작태를 보이며 선공을 가했다.

200의 천사에 비하면 숫자는 적으나 애당초 이길 생각으로 내보낸 게 아니다. 적의 화력 조사 차원으로 내보낸 특공대다.

50의 리자드맨이 모두 사망하는 데 걸린 시간은 8분여.

리자드맨이 처리한 천사는 두 명!

극악의 효율인 데다 뒤의 권천사나 능천사가 나서지는 않았지만 충분하다. 객관적인 지표로 이용할 수 있을 듯싶었다.

“상상 이상군요. 이게 천족…….”

던전 수정구, 던전 내부의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아이템 앞에서 크리슬리가 침음을 흘렸다. 수정구를 통해 목격한 천사의 무력은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높은 위계의 천사는 얼마 없어 보여서요.”

한데, 줄리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크리슬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천족은 위계가 다양하고 복잡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차이가 큽니까?”

“예, 하급 위계로 천사와 대천사, 권천사가 있지만 대천사는 특별한 존재이듯 위계만 보고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중급 위계인 능천사라면 다크 엘프 로드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지요. 그 위에 역천사와 주천사가 더 있지만 이들은 어지간한 최상급의 마수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최강자들입니다. 상급 위계로 올라가면…… 좌천사, 지천사, 치천사가 있다는데 저도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이 얼마나 강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은 천왕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천왕은 천계의 주인이지요. 마계의 주인이 마왕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권천사와 능천사라면 이곳의 마수들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제야 줄리엄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크리슬리는 가만히 수정구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먹이를 더 던지겠습니다. 다음은 웨어 울프의 차례. 모두…… 의식을 준비하세요.”

리자드맨, 웨어 울프, 나가가 차례대로 천사들을 맞이하고 죽었다. 한 마리도 빠짐없이 몰살당했다. 그들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며 천사의 몸에 엉겨 붙었다.

태양이 하늘 위에 있었다면 자연적으로 핏자국이 사라졌을 것이나 이곳은 던전.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어둠뿐인 이곳에서 깨끗함을 바라는 건 사치다.

결국 천사들은 전신에 피를 칠한 채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다시 다크 베어와 트롤의 혈흔을 몸에 새겼을 때 ‘의식’이 시작되었다.

다크 엘프의 의식은 특이하다. 처음에는 그저 말이나 행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혼을 새기자 오랜 시간이 지나며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부족마다 행하는 의식은 대부분이 제각각이었다.

스킬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무언가. 초월적인 의지에 가까웠다.

그리고 줄리엄은 상대를 ‘저주’하는 의식을 알고 있었다. 특정 마수의 피를 차례대로 묻혀서 상대를 약화시키는 고대의 주술.

이미 천사들은 마수의 피를 제대로 뒤집어썼으니 피해 가지 못할 것이었다.

다크 엘프들이 모여 앉아 죽은 마수를 위로하며 천족을 원망하였다. 그 감정이 극에 달해 몸을 부르르 떠는 다크 엘프가 부지기수였다.

잠시 후 샤벨 타이거 한 마리가 죽은 천사를 입에 물고 나타났다.

“날개를 찌르십시오. 죽은 마수의 영혼이 천족들을 저주할 겁니다.”

그것을 본 줄리엄이 단검 하나를 건넸다. 단검은 무뎌지고 색이 바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이었다. 그다지 손대고 싶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저주받은 게 아닐까 싶은 단검을 크리슬리가 건네받았다.

작게 숨을 들이마시곤 바닥에 놓인 천사의 날개를 찔렀다.

히아아아아-

기묘한 신음 소리.

죽은 천사의 입에서 나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저주를 담은 강렬한 마력의 파장이 생성되며 천족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낌새를 느낀 천족들은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수정구를 통해 현황을 지켜보던 줄리엄이 고개를 주억였다.

“성공입니다. 저주의 의식이 통했습니다.”

“……그럼 총공격을 준비하지요. 적들을 몰아내겠습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천사들을 끝장내야 한다.

일단 화력은 확인했고, 저주로 말미암아 더 약화된다면 납득 가능한 선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은 내부에만 있지 않다. 외부에 더욱 많았다. 최대한 마수를 보존해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그 찰나, 크리슬리가 몸을 비틀거렸다. 다리가 엉키며 주저앉으려는 걸 겨우 면했다

“원혼의 아우성을 들은 모양이군요. 제게 기대십시오.”

저주는 시전자에게도 영향을 준다. 상대가 강력한 자일수록 그 반동이 크다. 크리슬리의 지능이 100을 넘어서지 못했다면 며칠을 실신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깜짝 놀란 줄리엄이 부축하려 했지만 손을 뻗어 제지시켰다.

“괜찮습니다. 바깥에서 고생 중이실 그분에 비한다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어 두 발을 곧게 펴고 자리에 선 크리슬리가 마수들과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

‘날이 새는군.’

저녁이 지나간다. 달이 조금씩 가라앉고 불그스름한 황혼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아직 하쉬말은 쓰러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는 마수를 상대하며 그 철벽과 같은 몸짓과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하쉬말…… 그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던가.’

대단하다. 솔직하게 감탄했다. 사실 하쉬말은 전투보다 보조에 어울리는 역할이다. 전생에서 다른 강력한 천사들을 보조하며 1년 6개월이란 시간 동안 막대한 업적을 올렸다.

그래서 조금은 무시한 경향이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리거든 결국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고, 서포터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나를 벅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직 80가량의 천사가 남아 있다고는 하나 결국 그 버팀목은 하쉬말이었다. 하쉬말 혼자서 모든 마족과 마수를 대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빛을 나르는 자. 그 빛을 겨눌 줄도 알았던가.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그 모습을 상상하니 고개가 저어진다.

‘반나절, 길어야 하루.’

나는 내 자신을 잘 안다. 해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다대일의 대결에 약한 편이었다.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그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하쉬말은 아직도 기세를 죽이지 않았다. 태양이 떠오르며 텅텅 비어 버린 신성력을 미약하게나마 회복하고 있었다. 정말 질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덕분에 국면이 전환되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마족들은 상급의 마수를 불러들이고 다시 물량 공세를 행하는 중이었다. 그저 체력만 깎겠다는 의지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일 거예요.”

유은혜가 격한 숨을 몰아쉬고 곁으로 다가왔다.

깨끗했던 얼굴에 지금은 먼지며 피 따위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가지지 못할 정도로 하루 동안 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현재, 공격대원을 비롯한 살아남은 각성자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나마 소강상태로 접어들며 공격의 빈도가 낮아져서 다행이다. 마수의 사체로 벽을 쌓고 그 사이에서 숨을 죽인 채 휴식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

“긴장을 풀지 마라.”

“후! 안 그래도 이대로 긴장 풀면 한 방에 훅 갈 거 같아요. 그 투명 벌레인지 뭔지 하는 것들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띵해요.”

유은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남은 각성자들을 훑었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각성자는 이제 갓 두 발로 선 갓난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아직 달리는 법도 모르는 이들이 이만한 전장을 겪어 본 적이 어디 있었겠나. 그러나 전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저변에 널리자 겁을 집어먹었는데, 지금은 제법 무감각해진 모습이다. 동료가 죽으면 슬프긴 했지만 그것을 질질 끌고 가진 않았다.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다.

잠시간의 휴식. 모든 각성자가 피폐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눈빛은 살아 있었다. 긴장을 놓지 않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물론 도망간 이가 없지는 않다. 이탈자만 벌써 40명에 달했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대열을 이탈하자마자 마수에게 죽임을 당한 게 절반을 넘었다.

오히려 이게 전화위복이 됐다. 도망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더욱 분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승리밖에 답이 없다는 걸 모두가 눈치채고 있었다.

“공대장님, 무슨 소리 안 들려요?”

포션을 상처에 덧바르던 유은혜가 돌연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는 던전이 있는 방향에서 났다.

“처, 천사가 더 있었네요? 그런데 왜 던전 안에서 나오는 거지? 아니, 그보다…… 상태가 왜 저래?”

유은혜가 억 소리를 냈다.

곧 수십의 천사가 입구를 비집고 튀어나온 것이다.

모든 각성자가, 심지어 마족들마저도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바로 던전의 내부를 공략하던 천사들이었다. 하지만 그 상태가 참혹했다. 날개 한 쪽이 찢겨져 있는 건 예사였고, 하반신이 잘린 채 장기가 삐져나오려는 걸 손으로 억제하며 날아오는 천사도 있었다.

‘왔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크리슬리가 수성을 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리듯 다수의 마수가 천사의 뒤를 따라 나왔다.

쿵!

쿠웅!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상급의 골렘이다. 그리고 리치와 다수의 샤벨 타이거 등이 위풍당당한 자태를 보였다.

마족들도 그제야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이 있다면 그곳의 주인과 마수가 있어야 마땅한데 여태껏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그런 마수들이었을 경우엔 무시해도 되겠으나 구성이 만만찮다. 숫자도 상당했다. 단일 세력으로는 단연 돋보이는 수준.

하지만 던전 마스터는 보이지 않는다.

적인가, 경쟁자인가?

두 의미 모두 비슷하긴 했지만 전자냐, 후자냐에 따라서 이 국면이 뒤바뀔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모습을 보였다는 건 분명히 노림수가 있다는 뜻.

소강상태가 해제되고 천족과 마족, 인간 모두가 긴장 상태에 빠져들었다.

특히 각성자들은 더욱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겐 던전에서 튀어나온 마수도 다른 마수와 한통속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은혜가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공대장님, 살아 나가면 제가 진하게 키스 한 번 해 드릴게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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