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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86화 (86/242)

던전 사냥꾼 86화

* * *

충격적인 등장.

그 숫자만 천을 넘기는, 중급 이상으로 이루어진 마수 부대가 던전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모든 마족과 천족, 각성자가 던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공세가 멈추고 전장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전쟁의 연장선. 온갖 억측이 머릿속을 맴돌며 소리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마족들의 관심은 유별났다. 저만한 질과 숫자의 마수를 보유한 이는 손에 꼽는다. 공작, 혹은 대공이나 가능할까? 시작부터 고지를 차지하고 움직인 그들이라면 저 정도의 마수를 보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던전 마스터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오로지 마수만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인지, 어느 파벌에 속해 있는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만에 하나 잘못했다간 벌집을 건드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 모인 마족 중 한 명의 던전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감시했다. ‘너냐?’라고 묻는 듯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렸다.

당연히 결론이 나올 리 없었다. 모든 건 추측 속에 있었다. 그나마 저 마수들이 무언가 행동을 보인다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테지만…….

그저, 가만히 있었다.

던전의 입구를 틀어막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던전을 건드리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은빛 갑주의 골렘 M1과 M2는 던전의 베리어를 공격하는 천사만 격퇴하지 않았던가. 베리어의 공격을 멈추자 아예 기동을 중단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13명의 마족이 주저하지 않고 하쉬말을 공격했던 것은 합이 맞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천사 사냥’에 맞춰졌기에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던전의 주인이 가진 의도는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 아예 뒤치기를 감행할 작정이었다면 지켜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다음 나왔다. 이 시기가 굉장히 어중간하기 그지없다.

그것도 모자라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니.

마족의 입장에선 절로 ‘뭐 하자는 거냐.’라는 소리가 나올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자니…… 하쉬말이 신성력을 회복한다. 추가된 천사들을 치료하고 공세에 나서면 다시 기나긴 하루를 반복해야 한다.

움직인다면 여전히 저 던전의 마수들이 거슬린다. 다른 마족들처럼 천사와 하쉬말을 공격했을 경우에야 그냥 경쟁자 취급을 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뒤를 노려지는 건 사절이다. 반나절 전, 마족 ‘사만’이 전기의 용에 의해 증발한 것을 봐서 더욱 조심스럽다.

“어느 파벌 소속인지 모르겠지만 나와라! 안 나온다면 던전부터 깡그리 뭉개 버리겠다!”

후작 아나스타샤가 나섰다. 판데모니엄 휘하 마족들 두 명이 추가로 지원했다. 마족 셋이 힘을 합치면 저 정도 전력을 밀어 버리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뒤에 적을 남길 바에야 먼저 잔가지를 잘라 내겠다는 속셈. 더불어서 저 던전의 주인이 판데모니엄 파벌이 아니라는 증언이기도 했다.

“놀고 있군. 그런 뻔한 수작에 넘어갈 줄 아느냐?”

후작 델라트가 비아냥거렸다.

이곳에 모인 마족들은 기본적으로 신뢰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이가 좋지 않은 두 파벌임에야…… 정해진 수순이었다.

“수작이라니! 그 옹졸한 눈으로 모든 걸 재단하려 하지 마라.”

“옹졸? 하하! 좋다. 그러면 저 던전을 한 번 공격해 봐라. 네년의 언행에 진정성이 있다는 걸 믿어 주마.”

당차게 포부를 밝혔으니 책임을 져 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얼굴만 붉혔다. 깡그리 뭉개 버리겠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었다. 나름 마족들을 선동해 저 던전의 주인을 압박하려는 속셈이었으나 시작부터 초를 친 것이다.

델라트가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들었다.

“시간이 아깝군. 계속 고민하고 있어라. 하쉬말의 목은 내가 받아 가겠다.”

손을 뻗어 진격을 명했다. 마수들이 다시금 하쉬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다. 델라트는 당황하지 않고 냉정하게 전장을 분석하고 있었다. 엉거주춤한 마족들이 방패막이가 되어 줄 터였다.

그러나 숫자가 적다.

하쉬말을 강하게 압박할 순 없었다.

회복을 저지하는 게 전부. 하지만 그 움직임에 따라 마족들의 행동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던전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반면에…… 의심하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다.

촤악!

데스 나이트가 지상에서 주문을 외우던 오크 샤먼을 베었다. 죽음의 말을 탄 채 지상을 거침없이 뚫고 나가, 델라트를 공격했다.

치잉!

“뭐 하는 짓이냐!”

아슬아슬하게 검격을 막아낸 델라트가 눈을 부라렸다. 이 데스 나이트의 주인이 아나스타샤라는 걸 진즉 알아본 것이다.

“……아무래도 수상해. 네 던전이거나 네놈 파벌의 던전이지? 우리를 묶어 둬서 포인트를 독식하려고?”

“이 정액받이 년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델라트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그야 그들은 사이가 나쁘고 서로 공격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틈만 보이면 서로의 목을 따려고 안간 애를 쓸 것임은 자명했다. 하지만 공통의 적, 천족 ‘하쉬말’을 눈앞에 두고 뒤치기를 감행하는 건 제정신이라 할 수가 없었다.

천족에 대한 분노는 마족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이었지만…….

델라트의 눈에 광기가 생겨났다.

“오냐, 죽여 주마. 네년부터 갈가리 찢어 버리리라!”

그것이 기점이었다.

작은 의심은 분열을 불러왔다. 주 전력을 빼내고 주변을 철통같이 지켰다. 마족끼리 다투는 경우도 생겼다. 마수와 마수가 얽히며 전장은 깊은 수렁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천사를 지켜!”

“마수를 쓸어버리자!”

숨통이 트인 각성자들이 혼신을 담아 진격을 시작했다.

* * *

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급하게 세운 계획치곤 선방했다.

파벌 간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천족이라는 공통된 적 앞에서 겨우, 억지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얄팍하기 그지없는 연결은 약간의 혼란만 줘도 끊어 낼 수 있었다.

이 계획의 골자는 크리슬리가 얼마나 많은 마수를 남기느냐는 것이었다. 다행히 천족과의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모양이었다.

다수의 마수. 먼저 처리하자니 이벤트와는 멀어지고, 전력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남기자니 뒤가 근질거린다. 한마디로 계륵과 같았다.

자연스럽게 의심이 생겨나고 마족 간의 연결이 끊겼다.

13, 아니 12명의 마족 중 한 명만 엇나가도 되는 일. 여기에 아나스타샤가 낚였다.

각성자마저 나서자…… 진정한 아수라장이 완성되었다.

‘훌륭하다.’

나는 이 자리에 없는 크리슬리를 칭찬했다. 솔직히 반만 남겨도 대성공이라고 보았다. 설마 3분의 1도 안 잃을 줄이야. 크리슬리의 공이 지대했다.

덕분에 혼란이 가중됐다.

이제, 한 마리의 마수가 아쉬워진 지금 시점에서 수백의 각성자는 천족에게 나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적어도 하쉬말과 상처 입은 천사들이 회복할 시간쯤은 벌어 줄 수 있을 터였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버티는 것이다. 무리할 필요 없다!”

내 외침이 각성자들의 귀에 또렷이 박혔다.

싸우는 것과 버티는 건 난이도가 전혀 다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하쉬말이 내 쪽을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태양이 중천에 걸렸다.

500으로 시작한 무리가 어느덧 절반 아래로 줄었다. 이판사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이었지만 그 정도로 싸움이 치열했다.

나는 분노 대신 레어 등급의 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 검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려 외쳤다.

“우리는 이 나라의 마지막 희망이다! 천사가 모두 죽는다면 그다음은 내가 살던 마을이, 친척이, 친구가, 그리고 부모가 마수에게 유린당할 것인즉! 지켜라!”

내가 한국의 희망을 논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필요한 일이었다. 적어도 각성자들에게 작은 불꽃 하나 정도는 심어 줄 수 있을 테니까.

각성자들은 최대한 오래 버텨 줘야 한다. 게다가 숫자가 적어질수록 이지혜나 유은혜, 에드워드가 위험해진다. 저 셋을 이런 곳에서 잃을 순 없다. 이번 전장에서 성장을 이루는 게 목적이지 죽음은 논외다.

물론 지키려면 지킬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 내 정체가 발각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다.

“빌어먹을. 할 거라고, 말 안 해도 지킬 거라고!”

“으아아아!”

이미 만신창이가 된 각성자들이 내 한마디에 약간의 활기를 머금었다. 희망, 참으로 좋은 단어다.

포션으로 억지로 이어붙인 다리가 덜렁거리고, 얼굴의 뼈가 드러날 만큼 깊게 팬 상처를 가지고도 각성자들은 움직였다. 악에 받쳐 마수들을 썰었다.

이미 제정신은 아니다. 하루 반나절 간 이어진 싸움에서 대부분의 정신이 마모되었다.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진즉 한계를 뛰어넘었다. 먹을 것, 마실 것, 챙겨는 왔으나 그조차 입에 대지 못할 상황의 연속. 서 있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나 역시 ‘겉으로는’ 안간힘을 다해 싸우는 것처럼 비춰졌다.

쉬이이잉!

쾅!

막대한 신성력을 머금은 빛의 창이 지상에 다발로 내리꽂힌다.

‘됐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쉬말. 빛을 머금은 황금색의 눈동자가 모멸 찬 눈빛으로 적을 꿰뚫어 본다.

드디어 모든 충전을 마친 것이다.

본격적인 2라운드의 막이 열렸다.

* * *

마족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즈음.

1만의 마수는 어느덧 5천 미만의 숫자만 남아 있었고,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상급의 마수도 상당수 줄어 있었다.

그제야 열두 마족은 분쟁을 멈췄다.

충전을 끝마친 하쉬말은 강력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 강해진 느낌이다. 암묵적인 동의 아래 모두가 잠시 휴전을 맺고 공격을 감행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몸을 빼기엔 너무 늦었다.

지금까지 본 손해를 메우려면 몇 개월에서 1년 정도는 죽은 듯이 포인트를 벌어야 했다. 아니면 다수의 천사를 사냥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마저도 못하면?

추락이다. 이미 이곳에서 마족들이 가진 마수를 어느 정도 파악하지 않았는가. 언제 쳐들어올지 전전긍긍하며 좌불안석에서 살아가야 할 게 틀림없었다.

후작 델라트와 아나스타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서로가 가진 마수가 비슷해서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자 쌍욕을 내뱉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이라도 이성이 돌아온 덕분에 하쉬말의 견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오라질 놈!”

“쌍년!”

저급하기 그지없는 욕설이나 이미 둘은 만신창이였다. 갑옷이 베이고, 몸 전체에 상처가 그득했다. 광기에 찬 눈빛. 머리가 풀어지며 ‘미친 연놈’을 연상시켰다.

어쨌거나 분열은 멈췄다.

동시에 모든 마족이 한 가지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오래 끌면 안 되겠군.”

“태양이 지거든 승부를 본다.”

단기 결전!

시간을 끌어 봤자 더 이상 좋을 게 없었다.

전력을 부딪치리라.

그렇게 중천에 뜬 태양이 조금씩 기울어지고,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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