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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87화 (87/242)

던전 사냥꾼 87화

“마스터 바보. 마스터 멍청이! 히잉…….”

던전의 15층.

이히가 그 앞에 앉아 울먹였다.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뒤 이히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장소가 이곳이다.

전원이 바쁜 이때 여기서 근원의 나무나 돌보며 있으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것을 알기에 이히는 쀼루퉁했다. 원래라면 자신이 만든 숲과 정원에서 꿀벌을 괴롭히고 있어야 할 시간. 그런데 그 상황조차 알지 못하니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꿀벌들아…… 죽으면 안 돼. 이 벌 다 받고 꼭 이히가 잘 돌봐 줄게. 간식도 줄게. 많이 안 괴롭힐게.”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곱게 모으고 기도한다.

살아 줘, 꿀벌들아!

마음 같아선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랬다간 던전 마스터의 미움을 더 받을 것이라고 이히는 생각했다. 꿀벌의 죽음보다 그게 더 싫다. 그래서 이 ‘벌’이 끝나기 전까지 이히는 꼼짝도 안 할 작정이었다.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이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나무님, 근원의 나무님. 이히의 꿀벌들을 잘 돌봐 주세요.”

슬쩍 실눈을 뜨며 근원의 나무를 살핀다.

크다. 싹을 틔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 크기가 벌써 5미터는 되어 보였다.

세계수도 본 적이 있고, 그보다 더 희귀하다는 것들도 여럿 보아 온 이히지만 근원의 나무는 처음이다. 다만 상상 이상의 생명력을 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 정도의 나무라면 이히의 소원쯤은 간단하게 이뤄 줄 거야.’

사실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나무님은 뭘 그렇게 드시고 키가 크세요?”

이히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근원의 나무는 하루에도 이히의 키의 두 배씩 자랐다. 아직도 절찬리에 성장 중이니 그 끝이 무섭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히는 괜스레 심통이 나서 뺨을 부풀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철푸덕!

그 찰나, 옆에서 무언가가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히는 던전 코어의 정령으로서 모든 권한을 박탈당해 누군가의 침입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의아함을 느낀 이히가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어…… 뭐야? 천사님?”

날개 한쪽이 잘린 천사가 지면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만신창이라는 말이 어울릴 수준으로 전신이 망가져 있었는데, 천하의 이히마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천사님이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그러나 끔찍한 외양과는 별개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히가 양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히는 모든 권한을 일시적으로 박탈당해 천족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저 ‘적이 쳐들어왔다’ 정도의 정보밖에 없었다.

행동의 자유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이히가 이동할 수 있는 장소는 이곳과 최상층이 전부다. 지금 일어나는 상황 자체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천사가 15층에 난입했으니, 그것도 저런 몰골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요정은 선악의 정의가 애매하다. 자신한테 잘해 주면 선, 나쁘게 대하면 악이다. 요정의 입장에선 천사나 마족이나 인간이나 똑같은 존재인 것이다.

물론 마족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서 곤란했다.

‘왜 천사님이 여기에 나타난 걸까?’

지성이 있는 생명체라면 보통 쳐들어온 ‘적’이라는 게 천사라는 걸 깨달을 터였다. 하지만 이히는 전혀 다른 발상을 떠올렸다.

“아! 나무님이 보내 주셨구나!”

이히가 고개를 돌려 근원의 나무를 바라봤다.

꿀벌을 잘 돌봐 달라는 소원을 이런 식으로 이루어 준 게 분명하다고, 이히는 확신했다.

“그런데 근원의 나무님. 이히가 보기에 천사님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거 같아요. 이러면 꿀벌들을 돌볼 수 없잖아요?”

천사의 상태는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숨넘어가기 직전.

누구를 돌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히는 여전히 양쪽 관자놀이에 손을 얹은 채 ‘음~’ 하며 침음을 내뱉었다.

“이히는 지금 포션 한 병도 살 수 없는 몸이에요. 마스터가 이히의 권한을 모두 박탈했어요. 저 천사님을 치료할 방법이 이히에겐 없어요~”

아쉽다는 듯 곧 한숨을 쉬었다.

터덜터덜 걸어가 천사의 근처에 다다른 이히가 슬쩍 상태를 살폈다.

동시에 천사가 눈을 번쩍 떴다.

“근원의…… 정령이시어…… 허억!”

“아씨, 깜짝이야.”

놀란 이히가 급히 한 발자국 물러났다.

“뭐야? 살아 있으면 살아 있다고 말을 하지. 이히를 깜짝 놀라게 해?”

천사님, 하며 높여 부른 게 몇 분 지나지도 않았지만 이히는 확 빈정이 상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사는 죽어 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할 말을 이어 나갔다.

“거대한…… 뒤틀림…… 허억! 인과율 파괴…… 처단……. 마, 마계로 파견…… 누군가의 개입…… 코드 변경……. 근원의 정령이시어…… 부디……!”

“얘 뭐래니?”

이히가 눈을 깜빡였다.

도무지 천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은 근원의 정령이 아니었다. 요정인 자신을 팔푼이 정령 취급하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천사는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서 고개를 늘어트렸다.

다시 근원의 나무를 쳐다본 이히가 가감 없이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나무님, 근원의 나무님. 보내 주신 천사님이 약간 맛이 간 거 같애요.”

* * *

저녁이 되었다.

지루한 소모전이 끝나고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할 시간.

죽은 마수가 산을 이루고, 시체 타는 냄새가 즐비했다.

이미 주변 지형은 말도 안 될 정도로 파괴가 된 상태. 반경 수킬로가 이런 꼴이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내리라 작심한 마족들은 측근의 마수를 하나씩 풀었다. 상급 마수 중에서도 레벨이 높은 마수가 주를 이뤘다.

“우리는 뒤로 물러난다.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단기 결전이 되리라는 걸 알기에 오늘은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휘하자 이지혜가 물었다.

“저녁이 되었는데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저녁이 되면 천사들이 약해진다는 걸 어제의 일로 깨달은 것이다. 천사를 돕는 입장에서 지금 순간이야말로 가장 열심히 난입할 때였다.

하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지금의 상태로는 합세해 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희망을 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냈지만 슬슬 한계였다. 각성자들은 이틀을 내리 긴장하고 있었다. 억지로 강행군을 이어 가다간 피로가 폭발해 돌연사하는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지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깨물며 이지혜가 물러났다.

100명이 조금 넘게 남은 인원. 그들을 이끌고 전장의 중심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수들, 마족들도 각성자에게 관심을 접었는지 크게 견제하진 않았다. 지금 놈들은 하쉬말에게 온정신을 쏟는 중이었다.

중심지에서 벗어난 뒤, 나는 기다렸다.

마족의 군세가 약해지기를. 하쉬말이 약화되기를!

몇 시간의 사투. 천지가 뒤틀리며 비명을 내지를 정도의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적당히 때가 됐다고 여긴 나는 심적으로 연결된 M1과 M2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M1, M2. 폭주하라.’

신체적 능력치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키고 수명을 끝내는 비장의 스킬, 폭주(U)!

기동을 중단한 채 있었던 M1와 M2의 두 눈에 타는 듯한 붉은빛이 감돌았다.

나는 하쉬말의 약점을 안다.

한 번 정의한 것은 바꾸지 않는 고집적인 성격.

한 번 선한 것은 끝까지 선하며 한 번 악한 것은 끝까지 악하다.

전생에서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이런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 많았다.

하쉬말의 성격을 이용하여 아리엘이 공격했기에 주변의 강력한 천사들을 제치고 그녀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지 못했다면 마족과 천족의 전쟁이 2년은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 방법이란…… ‘관심 밖으로 벗어난 적의 귀환’이다.

나는 M1과 M2가 던전의 외벽만 지킨다는 고정관념을 심어 줬다. 그래서 하쉬말과 기타 천사들은 M1과 M2가 기동을 중단했어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아주 위협적인 순간에 등장한다면 하쉬말은 과연 대처할 수 있을까?

“떨어진다! 잡앗!”

“오늘 밤은 천사의 피로 목을 축이겠구나.”

하쉬말이 조금씩 떨어진다. 신성력은 무한하지 않았고, 날개의 빛이 줄어들고 있었다. 하늘을 쉬이 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몰린 것이다. 저항을 하고는 있으나 시간문제였다.

마족들은 흥분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5,000,000PT. 저 하나로 누구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주변의 천사까지 싹 잡는다면 파벌에서 ‘실세’로 거듭나는 것도 꿈은 아니다.

그럼에도 쉽지 않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 말처럼, 주천사인 하쉬말은 일반적인 천사와 ‘고갈’의 기준이 다르다. 아주 낮게 날며 이곳에 있는 모든 마수를 길동무로 삼겠다는 듯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징그러운 년……!”

마족들도 혀를 내두를 끈질김이다.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질 않았다. 지상에 낙하하면 더욱 위험하다는 걸 하쉬말도 알고 있는 탓이다.

지상에 특화된 온갖 마수들이 그녀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곳.

마수의 지배에서 벗어난, 비좁은 공간이 있었다.

각성자들이 있는 장소다.

오래 날지는 못할 것이라 판단한 하쉬말의 눈에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그 고민의 원인은 바로 나다.

‘뇌신의 주인. 어쩌면 마족이란 것까지.’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었다면 자신을 돕는 인간 각성자들을 여태껏 방치할 이유가 없다.

축복을 걸어 주거나 회복을 시켜 줬을 테지. 그러지 않았다는 건,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올 테냐, 하늘에서 최후를 맞이할 테냐.’

지금 하쉬말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여섯 개의 날개. 그것을 지탱하며 하늘을 날려면 막대한 신성력이 들어간다. 신성력을 아끼고 지상에서 싸우는 편이 하쉬말로서는 적을 하나라도 더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나를 마족으로 규정했다면 지상으로 내려올 리가 없다.

헷갈리긴 할 것이다. 뇌신을 이용해 마족을 공격하거나 인간들과 함께 천족을 돕는 모양새를 취했으니 말이다.

기대가 되었다.

과연 하쉬말이 나를 어찌 판단했을지.

하쉬말이 알아차렸을 땐 공중에서 처리한다.

허나 알아차리지 못했을 경우엔…….

이어 하쉬말이 움직였고,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 *

“고, 공대장님. 천사가 다가오는데요?”

유은혜가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 뒤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에드워드도 놀란 기색이었다. 아니, 굳이 둘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각성자가 그랬다.

“아!”

지상에 거의 하강한 하쉬말에게 거대한 불덩이가 작렬했다. 그것을 유은혜가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봤다.

불시의 습격.

하쉬말이 비틀거리며 추락한다.

나는 지상을 딛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떨어지는 하쉬말의 몸을 받았다.

1초도 안 될 아주 짧은 시간. 하쉬말의 황금색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적이냐, 아군이냐.’ 묻는 것만 같은 그 눈빛에 나는 얕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그러자 하쉬말의 굳은 눈매가 조금은 풀렸다.

“공대장님! 조심하세요!”

그때였다.

불현듯 유은혜가 소리를 내질렀다.

촤악!

촤르륵!

폭주한 M1과 M2가 주변의 마수를 미친 듯이 썰어 대며 순식간에 다가오고 있었다.

마계 옥션에서 구매 당시 둘은 네모난 철판 상태였다. 하여 마족들도 쉽사리 두 존재의 정체를 떠올릴 수 없었다.

최상급의 마수와 비견되는 신체 능력치,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폭주’가 더해지자 마수들은 감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쉬말도 당황한 기색이다. 던전의 외벽을 지키던 M1과 M2가 이런 때에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 그 찰나의 당황이 최악의 틈을 만들었다.

두 은빛의 갑주가 지척에서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들었다.

‘찔러라.’

푸욱!

“아……!”

하쉬말이 단말마를 흘렸다. 나 역시 함께 꿰뚫렸다.

복부가 피로 물들었으나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잘라 내라.’

이어서…… M1과 M2가 하쉬말의 양쪽 날개를 내리쳤다.

천사의 날개는 힘의 원천이다. 방어력이 뛰어나다. 주천사쯤 되는 하쉬말이라면 그 강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온갖 공격을 맞고도 날개가 멀쩡한 게 그 영향이다.

하지만 폭주한 M1과 M2의 공격은 매서웠다.

여섯 개. 총 세 쌍의 날개가 단번에 잘려 나갔다.

“아아악!”

그 충격에 하쉬말이 나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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