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88화 (88/242)

던전 사냥꾼 88화

꿀럭!

피가 쏟아진다.

의도를 감추고자 실행한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고, 공대장님!”

유은혜와 이지혜를 비롯한 대원들의 눈에 안타까움이 번졌다. 나는 다가오려는 그들을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전장을 이탈하라. 천사들이 몰살당하면…… 마수들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 전열을 다듬고 공격에 대비하라.”

남은 마수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3천 안팎.

M1과 M2가 폭주한 상태이고, 내 던전의 마수들로 충분히 위협을 가할 수는 있을 테지만 모든 마족이 물러난다는 보장이 없다.

나머지 천사의 사냥이 끝나거든 일이 어찌 진행될지는 뻔하다. 굶주린 몇몇 마족이 명하여 인근을 쑥대밭으로 만들 터. 그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한국은 만신창이였다. 외국의 마수들이 유입되며 전의를 상실했다.

크라스라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다수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다. 막기는 하겠지만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털썩!

하쉬말과 함께 바닥에 엎어진다.

수많은 마족과 마수가 쓰러진 하쉬말을 노리고 달려들자 M1과 M2가 막았다. 그리고 던전에서 리치가 다가오더니 나와 하쉬말을 어깨에 들었다.

“공대장님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유은혜가 눈에 불을 켜며 뇌전이 서린 검을 겨눈 채 달려왔다. 그러나 리치는 상급 중에서도 레벨이 무척 높은 마수.

아무리 유은혜가 각성자치고는 강하다고 하나, 지금으로선 격이 달랐다.

퍼억!

리치가 든 지팡이에 가볍게 복부를 얻어맞은 유은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급히 에드워드가 부축하며 동시에 유은혜를 붙잡았다.

“에드워드! 놔! 이대로 공대장님을 보낼 순 없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유은혜가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이지혜를 비롯한 대원들이 그녀를 억압한 뒤 고개를 저으며 강제로 끌었다.

탈출을 하려거든,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저 은빛의 갑주가 날뛰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전장에서 몰살당하리란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애석하기 그지없으나…… 냉정히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천사의 대장으로 보이는 여인의 날개가 찢겼다. 천사들의 패배가 확정되었다. 이제 남은 건 1초라도 빨리 대비하는 것뿐이다.

유은혜가 악바리를 써 댔지만 혼자서 여럿을 당하진 못한다. 결국 각성자들은 빠르게 자리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리치가 던전 방향으로 이동했다.

“썩을 리치야! 하쉬말을 내놔라!”

“얌체 같은 놈! 우리가 사냥한 걸 마지막에 낚아채 가겠다는 거냐!”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마족들이 아니다.

상급의 골렘 다수가 더 지원하였다.

그 사이에서, 리치가 말했다.

“나머지…… 천사들은…… 알아서 나눠라. 우리의 던전 마스터께서는 오로지 하쉬말 하나만 원한다.”

언뜻 들으면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 찢어진 음성이 마족들의 귓가를 후벼 팠다.

시체가 즐비한 이곳에서 리치는 더욱 강력해진다.

콰콰콰쾅!

지팡이를 들어 ‘시체 폭발’ 스킬을 마구 흩뿌렸다. 대지가 요동쳤다.

“천사들을 모두 사냥하거든…… 꺼져라! 우리의 던전 마스터께서는…… 너희가 던전 앞에서 날뛰는 걸 반기지 않는다.”

델라트가 이를 부드득 갈며 나섰다.

“이곳의 던전 마스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수하는 것이다! 대공 판데모니엄께서는 결코 이번 일을 좌시하시지 않으리라!”

“그흐흐…… 전면전을 벌이겠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하지만……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

밝혀지지 않은 신비는 때때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한국의 던전 마스터가 누구인지 알아보고자 온갖 공작이 시작될 건 불 보듯 뻔하지만 그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마족들은 쉬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파벌과 파벌이 전면전을 벌이면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은 당연지사. 남은 두 대공만 득을 보는 일이었다. 고작 3년 차.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않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대공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노옴……!”

후작 델라트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역천사 한 명을 사냥하는 데 성공하여 백만 포인트 이상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눈앞에서 대어를 놓치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최대한 빠르게 하쉬말을 죽이려 했건만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하쉬말의 체력과 신성력을 방전시킬 수는 있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마지막 타격’을 하지 못했다. 계산의 착오다.

리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수의 상급 골렘이 그 주변을 호위했고, 이내 던전 안으로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 * *

던전 안으로 들어온 뒤 즉시 포션을 상처에 부었다. 기포가 일어나며 빠르게 상처가 아물었다. 피가 부족해 잠시 현기증이 났지만 나락 군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며 나머지 분을 채웠다.

‘번거롭군.’

쯧. 작게 혀를 찼다.

의심의 눈을 피해 던전에 들어오려거든 이 수가 최선이었다. 한동안 던전은 마족들의 주요 감시 장소가 될 것이었다.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방법이 당장 이 외에는 없었다.

“성공적인 귀환을 축하드리옵니다.”

크리슬리가 두 걸음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흡족히 미소 지었다.

“크리슬리, 너의 공이 컸다.”

내가 외부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크리슬리는 내부에서 천사를 막았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1,500여 마리의 마수 중 6, 700 정도만 남아도 성공이라 여겼는데 무려 천 이상을 남긴 것이다. 그게 영향을 끼쳐서 마족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충돌이 벌어져도 몇 번은 벌어졌을 것이다.

“하오나……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천족 한 명을 놓쳤나이다. 15층, 근원의 나무 앞에서 죽은 것을 확인했지만 이는 저의 불찰입니다.”

크리슬리는 솔직했다.

이 솔직함이 그녀의 장점이다. 적어도 내게 한해서 크리슬리는 모든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하려 한다. 의식을 함께 치르며 크리슬리가 나를 영혼의 동반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치사를 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먼저 말하니 나로서는 기꺼울 따름이었다.

당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한 명을 놓쳤다지만 최상층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다면 크게 의미가 없다. 그보다…… 너에게 상을 내리고 싶다만, 바라는 바가 있나?”

크리슬리의 표정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다크 엘프의 숫자를 늘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을 말했으면 싶지만 크리슬리의 성격상 어려울 것이다.

‘다크 엘프의 숫자라.’

나는 턱을 쓸었다.

확실히 여러 전장에서 소모되며 숫자가 크게 줄었다. 지금 남은 다크 엘프의 숫자는 30가량. 근원의 나무를 돌보고 따로 일을 시키려면 숫자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

“건장한 다크 엘프 150을 내려 주마.”

“그, 그렇게나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크리슬리가 당황했다. 손사래를 쳤다. 150의 엘프를 추가하는 데 들어가는 포인트가 상당하다는 걸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크리슬리의 공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음이었다.

“그간 나를 따른 보상이라 생각하라. 따로 공을 세운 이가 있거든 추천해도 좋다. 충분히 보상하겠다.”

전생이었다면 결코 내뱉었을 리 없는 발언.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고, 적어도 내 휘하의 누군가가 공을 세웠다면 상을 내릴 아량은 되었다.

“그럼…….”

잠시 고민한 크리슬리가 몇몇 마수를 추천했다.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했는지 ‘무슨 공을 세웠다.’는 점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들어 보고 상을 내릴 만하다 싶으면 상을 내렸다.

덕분에 논공행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구를 철저히 방비하고 마족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라. 외부의 마수들이 특이한 행동을 보이거든 내게 보고하도록.”

이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올렸다.

하쉬말을 어깨에 진 리치가 그 뒤를 따랐다.

* * *

“아이야, 빛은 어디에나 존재한단다. 그리고 너는 그 빛을 인도하는 자다. 결코 어둠에 물들지 말지어다. 어둠을 정화하고 빛을 잉태하는 것이 너의 역할이다.”

천사는 알에서 태어난다. 하쉬말이 알을 깨고 나왔을 때 천계의 왕은 그렇게 말했다.

중급의 위계. 그중 가장 높은 자리, 주천사라는 막중한 책임을 태어날 때부터 등에 지었다.

쉬지 않고 교육을 받고 기술을 연마했다. 신성력은 고유의 것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건 오로지 본인의 몫이었다.

간혹 다른 천사들이 전해 주는 중간계의 이야기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자신도 언젠가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쉬말에게 주어진 임무는 고난이도. 일반 천사가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 대부분이 마계와 관련되어 있었다. 꿈, 희망, 그런 달콤한 감정 따위를 느끼는 건 불가능한 장소…….

몇 차례 차원 게이트를 통해서 마계의 원정을 떠났다. 그리고 돌아올 때마다 중요한 무언가가 마모되어 감을 느꼈다.

마족은 철천지원수이며 마계는 반드시 토벌해야 할 곳이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울 즈음.

하쉬말은 주천사로서 훌륭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다중 차원의 인과율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파괴의 발산지는 마계다. 천사들을 이끌고 조사를 진행하라.”

천왕의 명에 따라 하쉬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천사 부대를 이끌고 차원 게이트를 넘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도중 코드가 변경되어 전혀 알 수 없는 장소에 떨어졌다.

마계가 아니다. 중간계인 것 같지도 않다.

‘아예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이 거대한 마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당황한 것도 잠시.

막대하고 불순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가 존재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그제야 알 것도 같았다.

‘마족들이 수작을 부리고 있구나.’

던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벽의 베리어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주천사의 신성력과 수백의 천사들이 합공을 했음에도 쉽지 않다니. 이 장소의 정체가 더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던전의 파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다수의 마족과 마수가 모습을 드러낸 탓이다.

역시 여기서 마족들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

알게 된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쉽지 않음을 직감했지만 하쉬말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죽이고 또 죽였다.

이틀을 내리 싸우며 수천의 마수를 몰살시켰다.

그리고 신성력이 고갈된 후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 날개를 잃었다.

“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악몽인가?

등 뒤를 만진다.

‘없다.’

날개가…… 없다.

꿈이 아니라는 뜻.

지독한 현실이다.

신성력의 원천인 날개를 잃었으니 이것을 회복하려면 수년, 어쩌면 수십 년이 소모될지도 모른다.

한데 검에 찔린 자상은 깔끔하게 나아 있었다.

앞뒤를 끼워 맞춰 봤지만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날개를 잃은 뒤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건 분명했다. 마수들과 마족이 판을 치는 중간 지점이었으니 살아 나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육신은 죽고 혼은 환생의 굴레에 들어가야 정상이었다.

이곳은?

땀을 닦은 뒤 주변을 둘러본다.

푹신한 침대, 시원한 바람, 이상한 땅굴 같은 장소.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한 남자…….

마침 책을 덮은 남자가 차갑게 웃었다.

“구면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다시 봐서 반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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