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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89화 (89/242)

던전 사냥꾼 89화

하쉬말의 얼굴이 어그러진다.

현재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마력의 본질적인 향을 맡을 수 있는 그녀이니 내가 누구인지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

하지만 쉽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하곤 어깨를 으쓱했다.

“날개가 없으면 천사들의 ‘통신’도 안 되지 않나?”

천사의 날개는 단순한 신성력의 보고가 아니다. 천사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중요한 대화 수단이었다. 일종의 텔레파시인데…… 날개를 잃은 하쉬말은 당연히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다.

“정체가 무엇이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하쉬말이 작고 묵직하게 말했다.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하기야 고작 이런 일로 당황할 정도면 주천사의 이름이 운다.

고운 음색. 천사들의 음성은 ‘사이렌’에 비견될 수준으로 아름답다. 노랫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하는 마수. 하지만 값어치는 사이렌과 비교가 안 된다. 특히 하쉬말의 목소리는 귀에 착착 감기는 것이, 듣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집중토록 만든다.

마계에선 몇몇 높은 계급의 마족들이 천사의 날개를 자르고 새장에 가두어 기른다던 소문이 있었다. 자아를 없앤 뒤 하루 종일 노래만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수명이 극도로 짧아져 1년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든가.

별 고상한 취미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쉬말의 목소리를 들으니 납득이 되었다.

“무엇일 것 같은가?”

“이곳의 마력은 무척이나 불쾌하다. 던전의 안인 듯싶은데…… 너는 마족인가?”

강한 적대심.

각성자들과 함께하고 있을 때는 반신반의 했었지만 여기가 던전임을 확신하고 나를 마족으로 규정한 모양이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군.”

허심탄회하게 말하자 하쉬말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모두를 속이고, 내 날개를 자르고…… 그런 ‘연극’을 벌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조금 놀랐다.

각성자들의 틈바구니에 섞인 것, 천족을 돕는 척 마족을 공격한 것, M1과 M2를 움직여 동시에 관통당한 것 등등을 순식간에 깨우친 듯싶었다.

‘처음 작전은 안 쓰길 잘했어.’

여러 고민을 했다. 하쉬말이 내가 마족임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면 함께 던전 안에 갇힌 인간 각성자를 연기해서 환심을 살 작정이었으나, 지금의 하쉬말을 보자니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 같았다. 떠올린 즉시 폐기한 게 답이었다. 애당초 내 성격으로는 불가능한 성질이었고.

“하쉬말이여, 간단하다. 나는 이 행성에서 정상적으로 등장한 마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다지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는지라 가볍게 답해 주었다.

하쉬말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정상적인 마족이 아니다?”

“궁금한가? 하지만 나 혼자 답을 하기엔 형평성이 맞지 않다. 서로 질문을 하나씩 번갈아 가면서 주고받는 건 어떤가?”

“마족과는 타협하지 않는다.”

혀를 찼다. 하긴, 천사들은 벽창호다. 마족과 관련되면 아주 학을 뗀다. 그것은 대부분의 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야 태어나서부터 전장을 굴렀으니 그 정도가 약할 뿐이다. 하지만 천적으로서의 적대감이 약간은 있었다.

‘설득학을 읽은 게 소용이 없겠군.’

물끄러미 한 손에 쥔 책을 내려다본다. 상대를 설득시키는 방법이 적힌 책으로, 제법 유용한 내용이 많았다. 그런 방면에 약한 내겐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하쉬말이 설득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걸 부정하는데 설득이고 자시고 필요가 없었다.

“하쉬말, 애당초 그대들이 향한 곳은 이곳이 아닐 것이다. 아니 그런가?”

“…….”

하쉬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차원 게이트를 통해 마계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나타난 장소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이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불순한 마력의 결정체, 던전의 존재를 감지하고 공격했다. 그리고 지금 하쉬말은 그 불순함 속에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마족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전생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추측이다. 하지만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이 지구가 ‘마왕을 만들기 위한 각축장’임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끝장을 내려고 대규모 침공을 가했을 것이었다. 네 명의 대공을 동시에 끝장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한데 그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정찰하듯 간을 봤다. 이번에는 어쩐지 그 시기가 앞당겨졌지만 하쉬말은 일종의 정찰조였다. 제대로 된 내용은 전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하쉬말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그렇다. 그대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오로지 나라는 존재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걸 재단하려 하고 있다. 심지어 그마저도 제대로 모르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궤변을.”

“궤변이 아니라 사실이다. 차원 게이트를 통해 처음 나타났을 때 그대는 보았을 것이다. 주변으로 펼쳐진 높은 구조물과 드워프조차 흉내 낼 수 없는 견고한 물건들을! 이곳은 중간계도, 마계도, 천계도 아니다. 전혀 다른 장소…… 전혀 다른 차원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보았을 것이다. 이 전혀 다른 차원에 모인 수많은 마족과 마수들을 말이다.”

“타 차원에 간섭하는 건 금기시된 일. 천계를 피해 필시 나쁜 작당이라도 꾸미고 있는 것일 테지.”

“나쁜 작당이라…… 우선 하쉬말. 그대에게 한 가지, 진실을 알려 주마. 이 행성의 마족들은 인간의 멸망을 원한다. 아리엘, 우파, 판데모니엄, 오쿨루스. 마계의 모든 대공과 그들의 파벌이 모여서 합작을 하고 있지. 그리고 나만이 유일하게 인간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인간들이 마족을 상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어차피 하쉬말이 천계로 돌아갈 확률은 0에 수렴했다. 내가 쉽게 이야기를 해 준들 그것이 천계에 전해질 일은 결단코 없었다.

“그래서 정상적인 마족이 아니라고 한 것이냐? 다른 마족들과 다르다고? 그야말로 웃기는 말이다. 마족은 마족이다.”

“대체 마족의 정의가 무엇이지?”

“불쾌한 음의 마력. 그 존재 자체가 어둠인 자들. 그런 이들을 마족이라 부른다.”

“하하! 확실히 마족은 어둠에 길들여져 있기는 하지. 하지만 하쉬말이여, 그 한 가지 특색만 보고 존재를 정의한다면 지금의 너는 천족이 아니다. 나는 적어도 날개 없는 천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없는 게 아니라 잃은 것이다. 네놈이 그리 만들지 않았더냐.”

“그것을 다른 이들도 똑같이 생각할까? 날개가 없어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의 그대는 조금 강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영락없는 인간이로군.”

“아까부터 진실을 호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를 능멸하려는 셈이냐? 마족의 고상한 취미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죽여라!”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미간을 짚었다.

역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다.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

“말했을 것이다. 마족과는 타협하지 않는다고……!”

“후! 조금만 보는 관점을 옮겨도 이것이 천계에 아주 큰 득이 되는 일임을 깨달았을 것일진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어서 말했다.

“마계의 모든 대공이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 존재를 증명하려는 이다. 이 뜻을 모르지는 않을 터. 마냥 나를 멀리하고 적대하는 게 진정으로 그대와 천계에 득이 되는 일일까?”

“마족을 따른다 하여 득이 될 건 무어란 말이냐?”

“모든 대공과 그들의 측근들이 이 차원에 모여 있다. 이곳의 마족들만 쓸어도 그대는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이다.”

하쉬말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대공들이 모두 모였다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진실이라면 그녀의 사명은 당연히 이 행성을 마족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대공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가 무엇이냐? 무슨 이유로 그들이 타 차원의 인간을 학살하려 하는가?”

“오랜 시간 공석이 된 마왕의 자리. 슬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자리를 옮긴 것이다. 조건은 아주 간단하다. 더 많은 인간과 그들의 영토를 파괴하면 되는 일이지.”

“마왕의 자리를 그런 장난 같은 일로…….”

처음부터 마신이 제안한 것이지만 ‘신’의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도리어 의심하고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누군가에겐 장난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겐 필사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마계는 마왕의 자리를 두고 너무나도 오랫동안 전쟁을 해 왔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결말을 낼 필요가 있었지.”

가만히 하쉬말의 양쪽 눈을 들여다보았다.

황금색의 눈. 잔잔한 호수에 조금이지만 파장이 일고 있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쉬말이여. 나는 홀로 걷는 자. 어느 대공의 파벌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들어갈 생각 자체도 없다. 왜냐하면…….”

눈빛을 더욱 강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죽이는 건 마족이다. 이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마족을 사냥할 사냥꾼이 바로 나다. 그리하여 오롯이 마왕의 자리에 오르리라.”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것은 그대에게 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모든 마족을 죽인 뒤 마왕이 되려는 날 막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를 말이다. 조금 더 넓게 보고 판단하라. 내 말의 진실성과 주변의 상황을 여겨볼 시간 정도는 주마. 잘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후 나는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 * *

하쉬말이 던전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제약을 풀었다.

어차피 그녀는 날개를 모두 잃은 상태. 상급 마수급의 힘을 발휘하긴 하겠으나 크게 위협이 될 수준은 아니었다.

정히 막 나가겠다면 하쉬말을 없애고 500만 포인트를 획득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타락하여 전력에 보탬이 됨과 동시에 그로 인해 얻을 업적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느 마족도 하지 못한 일.’

무엇보다 천족을 타락시켜 휘하에 두는 건 아무도 이룩하지 못한 일이다. 전생에서조차도 마찬가지다. 신화에나 등장하는 경우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천족을 타락시키려는 시도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성공한다면 아직 찾지 못한 길이 여럿 발견될 터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나만의 길이 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하쉬말 스스로가 납득할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테지.’

천계에서의 침공이 앞당겨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일어날 천계의 침공에 그녀를 이용할 수도 있다. 대비하거나 천계의 전력을 자세히 듣거나 하는 게 가능해지겠지. 주천사인 그녀만큼 천계의 일에 정통한 이는, 적어도 이곳에는 없었다.

여러모로 하쉬말을 타락시키면 기대되는 점이 많았다.

나는 턱을 쓸었다.

‘차원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천사들은 마족을 모두 죽이기 전까지 천계로 돌아갈 수 없다.’

전생에서 밝혀진 사실.

이곳으로 넘어온 천사들은 던전을 점거하고 ‘신성 지대’를 만들어서 마족에게 저항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천계로 다시 넘어간 천사가 없었다. 정보 조달, 지원 따위가 전무했으니 거의 기정사실과 같았다.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 고집을 꺾고 발악이라도 해 볼 테냐.’

거절하는 순간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걸 하쉬말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죽으면 그야말로 개죽음이 따로 없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고집을 꺾고 나를 따르는 것 외에 방법은 전무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내 던전을 모두 둘러본 하쉬말은 ‘근원의 나무’에 호기심을 보였다. 물론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던전 바깥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확인하고, 내 말이 진실인지 직접 보겠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직 던전 바깥에서 이곳을 주시하는 마족이 많았다. 그들을 속이고 지나가려면 어지간한 수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일본의 던전을 통해서 나가면 되겠군.’

그렇다. 일본의 던전으로 통하는 공간 이동진이 있었다. 약간의 변장과 은신할 수 있는 마법 아이템을 추가로 넘긴 뒤 크라스라를 대동시켰다.

때아닌 세계 일주가 시작됐다.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어서 일주일 내로 돌아오길 명했다.

그리고 하쉬말은 정확히 일주일 뒤 모습을 드러냈다.

하쉬말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으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작은 파장이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다른 던전을 확인하고 강력한 마족들의 존재를 직접 목격한 것이리라. 더불어서 그들로 인해 절찬리 망가지고 있는 세계의 모습도 보았겠지.

아직은 늦지 않았다.

방치하면 직무 유기다. 아예 안 보았다면 모를까,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집이 강했으나 그 본업은 천사였다. 어둠에 잠기는 세상에 빛을 가져다줘야 할 사명을 등에 업고 있었다.

한참이나 나와 대치하던 하쉬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결코 마족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모든 마족을 멸할 것이고, 그 안에는 그쪽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라.”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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