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90화 (90/242)

던전 사냥꾼 90화

하쉬말은 고민했다. 온갖 혼란 속에서 고뇌하고 숙고하며 결정을 유보했다. 저 이상한 마족은 자신과 함께 다른 마족을 멸하자 말한다. 개중에는 마계를 주름잡던 네 명의 대공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내심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녀는 주천사. 마계의 정보에도 나름 빠삭한 편이었다. 최선으로 말살해야 할 가공할 존재가 대공이란 자들이었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성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해, 그녀도 자세한 신상은 파악하지 못했다.

‘우선…… 이곳을 파악하자. 타 차원에 이런 던전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천계에 없었다. 최대한 자세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하쉬말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저 이상한 마족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장소지만, 마족 따위에게 볼모로 붙잡힌 신세지만 그보다는 주변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는 게 먼저였다.

이상한 마족.

랜달프 브뤼시엘이라 하였던가.

그는 자신에게 자유를 주었다. 적어도 던전 내부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도록 제한을 풀었다. 멍청한 것인지, 오만한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움직일 수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다.

하쉬말은 적극적으로 던전의 내부를 탐사했다.

‘이 던전은 마치 하나의 생태계를 보는 것 같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던전을 훑었다.

저급하기 그지없는 마수들이 판을 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하나의 생태가 조성되어 있었다. 놀라울 따름이다.

마수의 수준을 파악해 절묘하게 천적 관계를 형성했다. 숫자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생명의 순환이 무척이나 빠르다. 아예 부락을 형성한 마수들도 있었다. 호수 근처에 자리를 잡은 뒤 아주 조금이나마 ‘문명’을 형성한 오크 부락을 발견했을 땐 시선을 옮기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오크 샤먼을 주축으로 자신들만의 신을 섬기며 발전된 도구를 이용한다. 던전의 특성상 여러 종족이 사용하는 물건들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것들을 모아 온 뒤 자신에게 맞도록 개량하는 작업을 거친다.

어른들은 사냥을 했고, 아이들은 그들의 기술을 배운다. 어미는 부락에 남아 새끼를 돌보았으며 제사장은 중요한 일의 결정을 내린다.

오크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지성이 있는 종족이라면 그 수준에 차이는 있으나 어김없이 위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놀라운 장면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은 던전, 어둠의 중추가 아닌가.’

물론 일반적인 장소에서 지성을 가진 존재가 문명을 이룩하는 건 놀라운 장면이 아니다.

하지만 보통의 던전이라 함은, 강력한 어둠의 힘이 똘똘 뭉친 장소에 만들어진다. 각종 흑마법 등을 설치해서 그곳에 들어온 마수는 자아를 상실하거나 본능에 충실해지기 마련이다. 무언가 건설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던전은 전혀 다르다.

불쾌한 마력은 비슷하지만 그게 마수에게 큰 영향을 끼치진 아니한다.

오히려 마수들의 발전을 기원하는 양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적절한 환경, 풍부한 먹이, 균형 있게 짜 맞춰진 마수 간의 먹이 사슬…… 모나거나 모자람 없이 조화가 갖춰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을 던전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또 하나의 생태계라 봐야 하지 않을까.

하쉬말은 혼란스러웠다.

‘공동체를 이룬 드워프, 서로의 영역을 지키는 중급의 사나운 마수들. 지금까지 내가 본 게 거짓이 아니라면 이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대해질 것이다.’

이만한 크기의 던전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던전 안의 모든 생명체가 이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보통의 던전은 부족한 게 많다. 애당초 생명체가 살아갈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게 태반이다. 그저 짐승처럼 싸우고 먹으며 힘겹게 생을 영위해 나갈 따름이었다.

이곳은 아니다.

성장할 원동력이 존재했다.

모든 제반이 갖춰져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무시하지 못할 전력이 완성될 것이었다.

‘랜달프라는 마족이 이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관여한 것일까? 이만한 조화를 꾀하려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했을 터…… 하물며 그 존재가 마족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짜여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보고 또 봐도 이 던전이 형성된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진 않은 것 같았다.

꾸준한 관리가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흔적 또한 곳곳에 남아 있었다.

엄청난 관심, 온갖 노력이 필요한 일.

허나 마족이라는 종족은 세심하지 못하기로 유명하다.

과연, 정상적인 마족이 아니라던 그 말이 조금씩 와닿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범접하지 못할 기운이 느껴진다. 하나는 던전의 코어일 것이고, 하나는…….’

하쉬말은 움직였다. 주변의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은 뒤 던전을 올랐다. 마침내 15층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근원의 나무……!”

이렇게 놀란 게 언제쯤인지.

천계에도 근원의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나무’라고 불리는 그것은 천왕이 직접 관리하며 아무나 다가갈 수 없다. 그보다 작고 기운도 약하지만 눈앞에 존재하는 이것은 분명히 근원의 나무가 맞았다.

나무의 근처에는 무덤이 하나 놓여 있었다. 대충 흙을 파서 덮은 모양새에 나무 푯말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푯말에 적힌 ‘천사님’이란 글자가 인상적이었다.

불현듯 누군가가 막아섰다.

“멈추세요. 나의 던전 마스터께서 허락하셨다고는 하나, 근원의 나무는 제 책임 관할에 있습니다. 이 이상 근원의 나무에 접근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크 엘프의 여인, 크리슬리였다.

하쉬말은 손을 미약하게 떨며 물었다.

“누가…… 누가 저곳에 천사를 묻었느냐?”

“던전 코어의 요정님께서 묻으셨지요.”

“아아! 그 요정이란 자를 볼 수 있겠느냐?”

“지금 이 자리에는 안 계십니다. 용건이 있다면 전해 드리겠습니다만.”

크리슬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쉬말은 묘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근원의 나무 아래에 묻히는 건 모든 천사가 소망하는 일이다. 비록 적대적인 관계에서 공격을 감행했다고는 하지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랬던가?

몰랐던 사실 하나를 깨달은 크리슬리가 가만히 납득했다.

무덤을 방치한 건 근원의 나무가 그 양분을 유독 잘 빨아들여서다. 천사의 시체가 근원의 나무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 고민할 찰나 하쉬말이 나타나 해답을 내려 준 것이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천사들도 이곳에 묻어 드리죠.”

“그, 그래도 되겠느냐?”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크리슬리가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 지었다.

던전 마스터께서 하쉬말을 휘하에 들이고 싶어 한다는 걸 크리슬리는 알고 있었다. 양분으로 사용하고 점수도 딸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었다.

“고맙다.”

한시름 던 듯 하쉬말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천하의 하쉬말이라도 자신의 부하들이 죽은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고마움은 나의 던전 마스터에게 전하십시오.”

“그것은…… 생각해 보겠다.”

마족은 마족이란 인식이 깨지진 않았다. 그나마 생각을 해 보겠다고 발언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후 한참 동안 근원의 나무를 쳐다보았다.

‘근원의 정령이 안 보이는구나.’

아직 덜 자라서일까?

근원의 나무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이는 천왕뿐이다. 가볍게 넘어간 하쉬말이 던전 탐사를 재개했다.

빈 층이 많았지만 최상급 마수인 그리핀, 기간테스를 보곤 한 번 더 놀랐다. 아쉽게도 던전 코어 근처에 들어갈 순 없었지만 던전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대강 파악이 끝났다.

‘던전이 이곳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쉬말은 던전을 빠져나가길 소망했다. 더욱 넓은 시야에서 모든 걸 바라보고 싶었다. 언질은 했으나 크게 기대는 안 했건만 의외로 랜달프라는 마족은 자신이 던전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걸 시원하게 허락했다.

크라스라가 붙기는 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간 지구를 돌았다. 은신 상태에서 파이록을 타고 이동하니 그 속도가 제법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남았다.

하여 다른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만용을 부렸다. 신성력을 잃은 상태라서 걸리지는 않았지만 다른 던전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랜달프의 던전처럼 제대로 생태계가 조성된 곳은 없었다. 종에 따른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고, 열악한 환경 탓에 제대로 된 번식도 불가능했다. 그저 강한 마수가 살아남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먼발치에서 인간들을 공격하는 마수나 마족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주 강력한 존재도 많았다. 대공으로 추정되는 마족도 한 명 발견했다.

‘이대로 놔두면 이 행성은 멸망한다.’

입이 바짝 말랐다. 마족 랜달프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각축장이었다. 어떻게든 멸망시키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나 혼자서는 안 된다. 나는 날개를 잃었다. 천계에서 긴 시간 동안 요양하지 않으면 신성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이대로 멸망을 두고 봐야만 하는가?

천계와의 통신도 되지 않았고, 언젠가 다시 열릴 차원 게이트를 기다리자니 기약이 없다. 어쩌면…… 차원 게이트가 나타나도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누군가가 개입하여 차원 게이트의 코드를 변경시키지 않았던가.

―어둠에 물들지 말지어다. 어둠을 정화하고 빛을 잉태하는 것이 너의 역할이다.

문득 하쉬말은 자신이 알을 깨고 나올 때 들려온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천계의 왕. 그 따사로운 목소리, 그 내용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지만 어둠을 정화하고 이 차원에 ‘빛’을 가져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었다. 힘을 회복하려면 ‘겉’을 오염시키는 방법뿐이 없었다.

최소한 천계의 지원이 도달할 때까지 이 세계의 멸망을 미룰 수만 있다면 그 의도는 성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 걷는 자. 모든 마족을 잡을 사냥꾼…….’

일주일이 지난 뒤 하쉬말은 결정했다.

그를 이용하자고.

* * *

천사를 타락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스스로가 천사임을 부정하며 어둠에 물들면 된다.

예컨대 천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규정을 어기는 것이었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생각보다 이르군.’

나는 눈앞에 굳은 표정으로 선 하쉬말을 바라봤다.

천천히 물들여 갈 계획이었으나 하쉬말 본인이 원하여 내 앞에 당도했다.

그만큼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심각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더불어서 내가 다른 마족과 ‘다름’을 인정한 것이었다. 적어도 마족을 견제하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카드임은 분명했다.

“앞으로 나의 이름은 타쉬말이 될 것이다.”

“천족으로서 부여받은 이름을 버리겠다는 건가?”

“그렇다.”

이미 마음을 정했는지 하쉬말은 담담하였다.

고작 앞 글자 하나가 바뀌었을 따름이지만 태도와는 달리 상당한 고뇌가 있었을 터다.

어쨌거나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다. 스스로가 천족임을 부정했으니 이제 규율만 어기면 된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쉽게 어길 수 있는 규율. 그리고 가장 파급력이 강한 죄.’

마족과 몸을 섞는 것. 강제가 아니라면 처벌은 무겁다.

나로서는 바라는 바다. 그것은 곧 온전히 하쉬말이 내게 ‘귀속’됨을 뜻했으니까.

던전의 시스템 아래에서 나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쉬말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테지만 그리되면 나를 해할 수 없다. 내가 명하거든 억지로라도 따라야 하는 강제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쉬말이여, 그대는 지금 최고이자 최악의 패를 뽑았다.’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벗어라.”

* * *

[불가능한 업적! 최초로 천사를 타락시켰습니다.]

[2,500,000PT가 지급됩니다.]

[불가능한 업적! 주천사 ‘하쉬말’이 마족 ‘랜달프 브뤼시엘’에게 귀속되었습니다.]

[3,000,000PT가 지급됩니다.]

[업적 점수가 1만 점을 돌파했습니다. 2급 이스터 에그가 개방되었습니다!]

[‘업적 상점’이 개설됩니다. 이제부터 만물상점에서 팔지 않는 온갖 귀한 것들을 업적 점수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업적들을 달성하면 관련 분야에 따라 구매 가능한 물건이나 종족이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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