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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91화 (91/242)

던전 사냥꾼 91화

수없이 떠오르는 메시지창.

시선을 내려 나신의 하쉬말을…… 아니, 타쉬말을 바라본다.

침대 위, 타쉬말이 쓰러져 있었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 위에 송골송골 땀이 솟았다. 거사의 흔적들이 사방에 즐비했으나 내 시선을 잡아끈 건 그녀의 등 뒤로 나기 시작한 검은 날개다.

혹독하게 몰아붙인 탓에 타쉬말은 기절했다. 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충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본체가 잠들었음에도 한 번 돋은 검은 날개는 조금씩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신성력 대신 음의 마력이 빈 공간을 차지했다.

천사가 타락하는 과정은 처음 본다. 누구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절로 드는 궁금증.

조용히 심안을 열었다.

이름: 타쉬말

직업: 타락 천사

칭호 :

* 어둠에 물든 빛의 천사(Epic, 지능마력+6)

능력치 :

힘 68 지능 87(+6)

민첩 78 체력 69 마력 84(+6)

잠재력(386+12/471)

특이 사항: 세상에 빛을 전파하는 사품의 천사였으나 지금은 타락했습니다. 날개를 잃은 여파로 낮아진 능력치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스킬: 어둠의 전파(Epic), 수없이 쇄도하는 어둠의 창(Epic), 어둠의 우레(Epic)

과연…… 스킬이나 호칭의 이름이 바뀌었다. 등급은 그대로여서 다행이다. 능력치는 다소 낮아졌지만 특이 사항을 보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듯싶었다.

지금 이 정도만 하더라도 그리핀이나 기간테스에 버금간다. 에픽 등급의 스킬이 세 개이니 활용도는 훨씬 넓을 것이었다. 예전의 무위를 되찾는다면 그보다 더욱 높은 레벨로 등극하게 되리라. 어련히 뒤가 든든해지는 스펙이다.

‘괜찮군.’

고개를 주억였다.

550만 포인트, 거기다가 타락한 천사마저 얻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라 할 만하다. 천사들을 사냥해서 벌어들인 포인트를 합치면 이번 이벤트에서만 600만 포인트 이상을 벌어들였다.

덕분에 당장 보유한 포인트가 벌써 1천만을 돌파했다. 아직 올해가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다음 마계 옥션이 매우 기대가 되는 바였다.

‘한데…… 업적 상점?’

타쉬말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에 눈을 돌린다.

2급 이스터 에그, 업적 상점이라는 단어가 유독 시선에 박힌다.

‘업적 점수라는 게 있었던가.’

어쩐지 업적을 달성할 때마다 반복되는 미사여구를 붙이는 게 신경이 쓰이긴 하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1만 점이라는, 높은지 낮은지 모를 점수를 쌓아야만 했다. 적어도 전생에서는 겪지 못한 일이다.

나는 막 회귀한 뒤 3급의 이스터 에그를 달성해 ‘나락 군주의 심장’을 얻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2급이다. 무엇이 주어질지 그것을 상상하니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상점이라 칭한 만큼 구매할 수 있는 목록이 다수 존재할 터.

굳이 ‘온갖 귀한 것들’이라 적어 놓은 걸 보면 예사롭지 않다.

만물상점은 수많은 물건을 팔지만 효율이 좋지 않은 게 많았다.

예컨대 스킬북의 경우 들어가는 포인트에 비해 등급이 낮거나 옵션이 나쁘다. 별 좋지도 않은 유니크 등급의 스킬북 하나가 백, 이백만 포인트를 훌쩍 넘기니 아주 여유가 있지 않는 이상 구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마계 옥션까지 포인트를 모으는 이유다.

업적 상점은 어떠할까.

쓸 만한 물건이 존재한대도 저런 식으로 효율이 극악이라면 그 나름대로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구매하지 못하는 아이템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보다 더 쓸모가 없는 법이었다.

‘일어나려면 시간이 걸리겠군.’

슬쩍 타쉬말이 쓰러진 침대 위를 흘겨봤다. 일어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의자에 걸어 놓은 옷을 챙겨 입고 던전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 * *

이히가 던전 코어의 옆에 늘어져 있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죽을상을 지었다.

“에휴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천사님이었어. 입에 단내 나게 이히가 묻어 주기만 하고 말이야.”

천사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줄 줄 알았지만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도리어 생명을 다했는지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픽 죽어 버렸다.

상심이 컸다.

“으으…… 꿀벌들을 괴롭히지 않으니까 금단 증상이 오는 것만 같아. 이히의 낙이 사라졌어. 이대로 있다가는 금단 증상으로 쓰러지고 말 거야.”

던전 코어 옆에 기대고 누워 뺨을 비비적거렸다.

챙겨 주는 척했지만 사실 이히의 입장에서 꿀벌은 아끼는 장난감이었을 따름이다. 잘 돌봐 주겠다고, 괴롭히지 않겠다고 한 맹세도 금세 사그라졌다. 이히의 밑바닥이 드러난 것이다.

10일을 넘게 못 봤더니 중독자마냥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히히…… 꾸, 꿀벌을 그릴 테야. 그려서 이히가 막 괴롭혀 줄 테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히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평소 보석 같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살인마의 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몸을 낮춘 이히가 쓱싹쓱싹 바닥에 꿀벌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장 꿀을 따 오거라. 이, 이히히…….”

그러나 그림이다. 그것도 아주 못 그린!

움직일 리 없었다.

“어서 안 움직이고 뭐 해? 이히의 말이 들리지 않니! 왜 그려 줬는데 움직이질 못하니, 왜…… 이힝…….”

“잘 놀고 있군.”

사사삭!

빠르게 꿀벌 그림을 지운 이히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셨어요, 마스터?”

태세 변환이 달인의 경지다.

나는 피식하곤 말했다.

“제법 재미있었다. 더 하지 않고?”

“아, 아니에요, 마스터. 이히는 마스터의 벌을 충실히 실행 중이에요. 꿀벌이 뭔지 이히는 몰라요. 그게 뭐예요?”

이히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천진난만하게 손가락을 빨며 묻는데, 어림도 없다.

“근원의 나무 근처에 무덤을 하나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거는요, 이히가 근원의 나무님한테 소원을 빌었더니 천사님을 보내 주셨어요. 그런데 그 천사님이 불량품이어서 이히가 묻어 줬어요.”

소원? 보내 줬다? 난데없는 말에 의아해하다가 대충 납득했다. 이히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려 들면 끝이 없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는 편이 서로에게 이롭다.

“아주 잘했다.”

“네?”

“덕분에 일 하나가 쉽게 풀렸다.”

천사를 근원의 나무에 묻어 준 것. 하쉬말의 마음이 풀리는 계기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내게 직접 ‘고맙다.’는 말을 전했을 정도다.

게다가…… 천사의 시체가 근원의 나무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히가 죽은 천사를 근원의 나무 근처에 묻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몰랐을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조용히만 있길 바라며 권한을 박탈하고 유배시켜 놓은 것인데…… 의도치는 않았다고 하지만 이 역시 ‘공’으로 인정할 만하였다.

“이히히, 마스터가 좋다면 이히도 좋아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이히가 해맑게 웃었다.

날개가 쉴 새 없이 퍼덕이고 양쪽 뺨을 손으로 비비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의 권한을 복구해 주마. 더불어서 정원의 건도 눈감아 주겠다.”

이히가 순식간에 모든 동작을 멈췄다.

“요즘 이히의 귀가 나빠졌나 봐요.”

“아니, 제대로 들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히의 눈이 큼지막이 커졌다.

“그, 그럼, 마스터. 이제 이히가 꿀벌들을 괴롭힐 수 있는 건가요?”

“너의 취향을 건들 생각은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킹 비들을 끌고 산책도 할 수 있구요?”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이히가 직접 디자인한 건축물을 지어도 될까요?”

“그건 안 되겠군.”

“……이히히!”

이히는 바닥에 누워 손과 발을 마구 뻗어 댔다. 작게 먼지가 피어날 수준으로 바닥을 때리고 볼을 꼬집고,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두 뺨을 붉게 상기시켰다.

‘벌은 충분했을 테지.’

무관심. 권한마저 모두 박탈하며 취미 생활도 못하게 만들었다. 요정으로선 쥐약의 처방이다. 특히 이히의 성격상 용케 여태껏 버텼다고 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기를 바란다. 같은 실수가 몇 번이고 반복된다면 제아무리 이히라도 엄하게 다스릴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히이기에 더욱 강한 벌을 주게 될 터였다.

일벌백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이히가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3시간이나 마구 뒹굴 줄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 * *

3시간 뒤.

본직으로 이히를 되돌려 놓고 나는 던전 코어를 발동시켜 업적 상점을 열었다.

[업적 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업적 점수- 11,451]

[업적 점수를 활용해 상점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의 이름 앞에 +표시가 된 것은 오로지 하나만 구매 가능합니다.]

만물상점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창이 떠올랐다. 이름만 바뀌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내용물은 완전히 달랐다.

눈에 힘을 주며 기다리자 이어 목록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장비 목록]

[사나운 활(U)- 1,000]

[그림자 표창(U)- 1,000]

[신속의 신발(Ex U)- 2,000]

[+죽음 로브(Ex U, Set)- 2,000]

[굴지의 갑옷(Ex U)- 2,000]

[+아타샤의 검(Epic)- 3,000]

[+콘테고놈의 투구(Epic, Set)- 3,000]

…….

[마수 목록]

[파이록- 300]

[슈페리어 고블린- 1,000]

[순혈의 나가- 2,000]

[호문쿨루스- 4,500]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 6,000]

[+오크 대제 ‘람’- 10,000]

[+진족 뱀파이어 ‘스비라’- 15,000]

[+리치킹 ‘가스펠’- 20,000]

[+진마룡 ‘아오진’- 50,000]

…….

[스킬 목록]

[+대지진(U)- 1,500]

[+신성 분진(U)- 2,000]

[+신검합일(Ex U, Passive)- 2,000]

[+다크 소드(Ex U)- 2,500]

[+숲의 방패(Ex U)- 3,000]

[+다크 메테오(Epic)- 10,000]

[+천령기(Epic)- 15,000]

…….

[업적 관련 추가 아이템]

[천사의 알- 500]

나열된 목록은 한눈에 보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많았다.

일반 아이템 목록도 있었지만 당장은 그것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 떠오른 것들만으로도 나를 놀래키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가장 먼저 장비 목록. 기본이 유니크이며 에픽 등급까지 골고루 있었다. 게다가 ‘죽음 로브’는 크리슬리가 착용한 ‘죽음 지팡이’와 한 세트가 되는 아이템이었다.

설인의 왕 콘테고놈. 전설적인 존재 중 하나인 그의 투구도 버젓이 올라가 있었다.

아타샤의 검은 3급 이스터 에그가 열렸을 당시 잠깐 보았던 이름인데…… 여기에 나온 걸 보면 연계가 되는 모양이었다.

‘허…….’

하지만 진정으로 놀란 건 마수 목록이다.

만물상점에선 결코 살 수 없는 마수들. 파이록부터가 기르기 무척이나 어려운 마수이지 않나. 마계 옥션에서도 거의 보인 적 없던 것들도 여럿 보인다. 하지만 가장 밑 부분을 차지하는, ‘이름을 가진’ 마수들에 나는 한참 동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크 대제 람, 진족 뱀파이어 스비라, 리치킹 가스펠…….

진마룡 아오진!

‘전설, 신화적인 존재들.’

오래전, 그 위용을 떨친 이들이었다.

그 시대에 대적할 자가 없다 하던 절대자들.

이미 죽었을 터인 그들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군.’

그렇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이다.

진짜로 되살리는 것일지, 아니면 껍데기만 살려 내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히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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