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93화
* * *
그사이…….
그리핀을 탄 크라스라가 다수의 쉐이드와 함께 천공을 나는 중이었다.
‘마스터께서 내리신 명령이다. 반드시 완수할 것이다.’
크라스라는 본디 크리슬리의 가디언으로 자랐다. 부족의 희망인 크리슬리를 보좌하고자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오빠 행색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중요도는 자신의 목숨 이상이었다.
하지만 크리슬리는 병을 지고 있었다. 나날이 약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온갖 귀한 약재를 날이면 날마다 구해 왔지만 차도가 전혀 없었다. 크리슬리의 완치를 위해서는 영혼이라도 바칠 수 있다고 결심한 그때 어둠의 정령들이 찾아왔다.
엘릭서를 구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계약했다. 부족 전체가 경매로 넘어갔고…… 거기서 랜달프 브뤼시엘이라 불리는 특이한 마족을 만났다.
‘마스터는 보통의 마족과 다르다.’
처음에는 긴장했다. 마족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종족이었다. 섣불리 엘릭서를 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크리슬리의 정체를 알게 되거든 그 끝이 좋지는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철저하게 크리슬리의 정체를 함구한 후 자신의 능력을 보인 뒤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엘릭서를 얻으려 했다.
한데, 그는 단번에 알아봤다. 자신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후 벌을 내리며 ‘죽음’을 논할 땐, 끝장이란 절망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다크 엘프로서의 본능을 죽이고 개처럼 행동하라……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과연 마족이 약속을 지킬지에 대해선 회의감이 있었지만 크리슬리가 죽는 것보단 나았다.
그저 살려만 줘도 다행이라 생각할 그때.
약속을 완벽하게 이행하자 그는 진짜로 엘릭서를 내렸다. 그로도 모자라 크리슬리와 의식을 행하였다. 다크 엘프와 마족이 의식을 치르다니. 사상 초유의 사태에 족장 줄리엄마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정도다.
물론 크리슬리가 거부했다면 어떻게든 막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그녀는 의식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크리슬리의 병은 나았으며 다크 엘프의 위치는 던전에서 최상위에 오르게 되었다. 던전의 주인에게 신임을 얻게 되었으니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드워프도 다크 엘프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공을 치하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새로 태어난 쌍둥이에게 ‘로이’, ‘로제’라는 이름을 붙여 주며 친근함을 과시했다.
자신들을 그저 그런 ‘노예’로 보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목숨을 다해 따르리라 내심 맹세했는데…… 이제는 근원의 나무까지 추가가 되었다.
‘비록 서로의 종족이 다르다고는 하나, 나 크라스라가 진정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분.’
기본적으로 크라스라는 기사의 기질이 있었다. 크리슬리를 여태껏 무사히 지켜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더불어서 그를 지키는 게 던전을, 더 나아가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만약 다른 마족에게 침공을 당해 그가 죽고 던전이 넘어가거든 가장 먼저 숙청당할 존재가 바로 다크 엘프였다.
“모두 흩어져라. 사만의 던전은 중국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최대한 빨리,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리핀 위에서 크라스라가 손을 내뻗자 다수의 쉐이드가 공중에서 퍼져 나갔다.
* * *
‘잘 찾고 있을지 모르겠군.’
내정 모드에 들어가 던전의 지형을 변형시키는 와중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크라스라와 그리핀, 다수의 쉐이드를 일본 던전으로 이동시킨 뒤 중국의 정찰을 명했다. 백작 사만의 던전 위치가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중국의 어딘가임은 확실할진대…….’
공작이나 대공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백작 나부랭이, 그중에서도 별 비중이 없었던 사만의 던전이 어디에 있을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국 어딘가에 붙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밟아 보면 사만은 항상 중국 방향에서 나타났었다.
이벤트가 발동하며 사만이 나타난 시간 등을 유추하면 아주 먼 곳에 있지는 않을 터. 사만의 죽음을 알게 된 마족들이 그의 던전을 찾기 전에 한발 먼저 크라스라가 발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형 변화. 26층은 종합 지대로 하지.’
20층은 바다 지형, 21층은 천둥 지대, 22층은 태풍 지대, 23층은 눈보라 지대, 24층은 죽음 지대, 25층은 신성 지대로 설정하고 지형을 변화시켰다.
마지막으로 26층에 천둥과 태풍, 눈보라를 합치자 메시지창 하나가 떠올랐다.
[엄청난 업적! 최초로 던전의 10개 층 이상에 지형 변화를 꾀했습니다.]
[800,000PT가 주어집니다.]
[업적 점수 1,545점이 추가됩니다.]
여기까지 들어간 포인트가 200만가량이었다.
‘죽음 지대, 신성 지대도 따로 지정을 할 수 있었군.’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형의 숫자도 꽤 많다.
그중 언데드가 활동하기 좋은 죽음 지대와 천사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신성 지대를 추가할 수 있다는 점이 의외였다. 단순히 지형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는 마력의 질 자체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성력’은 단순히 마력으로 치환하지 못하는 힘이다. 그것을 소량이나마 25층에 도포했다. 아니, 어쩌면 마력과 신성력 등의 힘은 그 본질이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네 개의 제단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일 테고.
어쨌거나…… 이제 그곳에서 천사들이 커 가며 부족한 신성력을 자연스럽게 채워 넣을 것이었다.
‘1,545점이라.’
나쁘지 않은 결과다.
본래 업적은 중요했다. 대량의 포인트를 얻거나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으므로. 하지만 업적 상점이 추가되며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왕지사 지형을 추가한 김에 번식종도 추가해야겠지.’
단순히 지형만 덩그러니 놔두면 아깝다. 특정 지형에서만 힘을 발휘하거나 번식할 수 있는 종을 미리미리 채워 넣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번식종은 빠른 시기에 늘릴수록 이득이 크다. 포인트에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추가하는 편이 낫다.
‘천계의 침공이 언제 재개될지 모르니…….’
차원 게이트가 열리면 상점의 이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도, 만약 마수의 숫자가 부족했다면 허무하게 던전을 잃을 뻔했다. 생각기에 따라서 아찔한 순간이었다.
‘20층 바다 지형에는 사이렌만 한 게 없다. 크라켄을 추가하고는 싶으나 번식 가능한 숫자가 되려면 모든 포인트를 쏟아부어야 해.’
사이렌은 중급 3Lv의 마수다. 마리당 5,800PT이었고 30마리면 최소한의 번식 가능한 숫자가 충족된다.
반면 크라켄은 상급 4Lv의 마수로서 400,000PT를 호가한다. 극소수 섞어 넣는 것이라면 몰라도 번식을 가능하게 하려면 최소한 12,000,000PT가 필요했다.
‘21층 천둥 지대에는 천둥 박쥐가 좋겠군.’
천둥 박쥐는 사이렌보다 레벨이 한 단계 높은 중급 4Lv의 마수다. 번개를 먹고 사는 특이한 박쥐인데, 간혹 뿜어 대는 ‘라이트닝 브레스’가 위력적이었다.
22층은 바람 지대. 윈드 라이드만 한 게 없다. 역시 중급 4Lv의 마수이나, 크기가 작다. 어른의 머리통만 하다. 하지만 태풍 속에서는 무적이라 칭할 정도로 친화력이 훌륭했다.
23층, 눈보라 지대에는 설인이 제격이다. 눈 속에선 샤벨 타이거 저리 가라 할 만한 속도를 내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마지막 24층…… 죽음 지대에는 ‘죽음의 어미’를 추가시켰다. 2미터에 달하는 크기와 풍만한 몸집. 온몸에서 강력한 독을 뿜어 댄다. 또한 죽음의 어미는 개미 여왕이다. 50센티 남짓의 독을 품은 애벌레를 끊임없이 생성해 낸다.
25층은 굳이 추가할 필요가 없다. 그곳은 타쉬말을 비롯한 천사들이 기거할 장소였다.
26층의 종합 지대는 내버려 두었다. 마땅히 추가할 마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하 층에 마수를 추가하자 업적창이 떠올랐다.
[믿기지 않는 업적! 최초로 변형된 지대에 ‘10가지 종’의 마수를 ‘적절히 번식 가능한 숫자’만큼 풀어놓았습니다.]
[1,000,000PT가 지급됩니다.]
[업적 점수 1,833점이 추가됩니다.]
지형 추가와 다수의 번식종을 들이며 의외로 많은 포인트를 사용한 듯 보이지만 업적 보상으로 인해 실제 사용한 포인트는 200만이 살짝 넘었다.
아직도 천만가량의 포인트가 남아 있었다.
‘한국의 던전은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눈을 돌렸다.
슬슬 일본의 던전을 찾아갈 차례였다.
* * *
[상당한 업적! 최초로 고블린 특이체 출현이 100마리를 넘어섰습니다.]
[200,000PT가 지급됩니다.]
[업적 점수 400점이 추가됩니다.]
일본의 던전을 방문한 순간 나타난 업적이다.
‘다른 던전의 업적은 내가 직접 방문해야 나타나는 모양이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일본의 던전에서도 뭐 하나가 뜰 만한데 감감무소식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게 드디어 뜬 것이다.
고블린은 특이체 출현 빈도가 상당히 높은 종족이었다.
그래서인지 보상이나 점수는 짰다. 아예 없는 것보단 나았지만…….
“마스터, 오셨다구요!”
구요가 날개를 펄럭이며 나를 반겼다.
“진행은 잘되어 가나?”
내가 없을 때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넘기고 포인트도 사용할 수 있게끔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포인트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구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 힘들다구요…….”
“대부분의 층을 미로로 만드는 건 어떤가?”
“그것도 괜찮지만 포인트가 상당히 많이 든다구요.”
구요는 스스로 1층을 미로화시켰다. 보물을 숨기거나 함정을 파는 게 보다 쉬워졌다.
아예 미로 컨셉을 밀고 나가면 그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일본의 각성자들은 그런 것에 특별한 재미를 느끼는 것 같으니.
최근 일본의 던전에서 들어오는 포인트 수입이 늘어난 걸 보면 미로를 확장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미로는 추가 지형에 없다. 직접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관련된 업적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이런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개의치 마라. 이곳 던전은 몇 층까지 뚫렸지?”
“3층이라구요.”
“상당히 낮군.”
층마다 한국과 비슷하게 나열을 해 놨는데, 진행 속도는 확연히 다르다. 그만큼 한국의 각성자들이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5층까지 미로로 만들겠다. 그 구상은 너에게 맡기마.”
“구요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구요?”
“그래.”
“와아……!”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꿀벌을 괴롭히는 게 취미인 이히와 달리, 구요는 제법 생산적인 취미를 가진 듯싶었다. 꿀물이 맛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다른 지형이나 마수를 추가시켜 봐야겠군.’
업적을 달성하기 위한 던전의 발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업적 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업적 점수- 6,440]
[업적 점수를 활용해 상점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의 이름 앞에 +표시가 된 것은 오로지 하나만 구매 가능합니다.]
미친 듯이 포인트를 쏟아부은 결과.
고작 2주 만에 6,000가량의 업적 점수를 모았다.
포인트는 반 토막이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부익부 빈익빈. 실로 들어맞는 말이다.’
하여간에 포인트를 많이 사용할수록 업적을 달성하기 쉽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일본의 던전에도 따로 업적이 적용되었다. ‘최초’ 타이틀이 안 걸려서 획득하는 포인트나 점수가 적긴 했지만 이는 대단한 정보다.
던전을 늘릴수록 그만한 업적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와 비례하는 어마어마한 포인트가 들어가긴 하겠지만 이런 식이면 정말 업적 점수 50,000을 모으는 게 꿈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업적 점수를 모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목록을 쭉 훑다가 한 가지 품목을 선택했다.
동시에 떠오르는 창 하나.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을 구매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