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94화
오로지 한 번만 구매할 수 있으며 업적 점수가 6,000점이나 들어가는 고가의 마수 군단. 일전 나락 군주의 심장을 얻을 당시 열렸던 보물 창고에 그 이름이 있었다.
‘군단이라…….’
오크 대제 람, 진족 뱀파이어 스비라 등과 다르게 유일하게 ‘군단’이라 칭해졌다. 수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는 뜻. 하지만 잔혹한 사령관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예상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심이 가는 건, 바로 군단이기 때문이다. 만물상점에선 한 번에 다수가 포함된 마수를 파는 전례가 없었다. 마계 옥션은 팔더라도 부족의 단위였고, 이 역시 군단까지 가지는 못했다.
내가 지닌 마수의 숫자도 적지는 않지만 군단이라 칭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최하급의 마수를 합치면 그쯤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격 낮은 녀석들을 지휘한들 효율적이지 않다. 일사불란한 군대의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강한 마수 한 마리보단 여러 곳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군단이 지금의 상황에선 낫다.’
솔직히…… 제대로 다수의 마수를 다루는 게 가능한 이가 지금 던전에는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고. 여태까진 양과 질로 밀어붙였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이번 이벤트로 크리슬리에게 ‘끼’가 있음을 발견하긴 했는데 개화하려면 한참 멀었다.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경험을 시키는 편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능수능란한 지휘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백작 사만의 던전을 나만 노리고 있지는 않을 터. 이미 열두 마족이 그 장면을 보았다. 지금쯤이면 우파의 파벌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들을 혼란시키며 지금 던전 앞에 대기 중인 마족과 마수들에게 타격을 주려거든 나 혼자로는 역부족이었다.
‘던전 마스터가 사라지면 요정은 폭주하게끔 되어 있다.’
던전 마스터와 던전 코어의 요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요의 경우 아돌을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계약을 한 덕분에 무사했지만 연결이 오랜 시간 끊기면 요정들은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전생에선 모든 마수를 내보내 국지적 혼란을 야기한 요정도 있었다. 보통은 입구를 틀어막으며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지만…… 그 행보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구매하겠다.”
묵직하게 말했다. 업적 점수 6,000점. 온갖 보상으로 절약을 했음에도 600만 포인트가량을 사용해서 쌓은 수치다.
무작정 모은다고 능사는 아니다. 던전을 늘려야 포인트도, 점수도 더욱 많이 쌓을 수 있었다.
곧 허공에 메시지창 다수가 떠올랐다.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을 구매하였습니다. 업적 점수 6,000점이 차감됩니다.]
[마도 시대, 그림자 황제는 아주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아주 깊은 지저에 묻었으며 그곳을 지킬 이들로 잔혹한 사령관과 그 군단은 선택했습니다.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한 지저의 보물 창고. 육신이 노쇠하고 뼈가 문드러졌지만 그들은 오로지 충성심 하나로 버텼습니다. 죽어서도 그림자 황제에게서 내려진 명령을 지키고자 이미 죽은 시체에 혼을 깃들였습니다.]
[일당백의 용사들로 이루어진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은 그 숫자만 5만에 다다르는 대규모 군대입니다. 대수림의 마수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차지할 정도로 강력했다 전해집니다.]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이 차원 게이트를 타고 이동 중입니다.]
[무작위 지역에 생성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마족과 각성자에게 이벤트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주의하십시오. 잔혹한 사령관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도둑’으로 간주합니다. 그것은 설령 구매자이더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90일간 모든 도적을 죽이고 본래 있었던 장소로 돌아갈 것입니다.]
[군단이 인간, 혹은 마수나 마족을 죽임으로써 얻는 포인트는 구매자에게 양도됩니다. ‘멸망 기여도’ 또한 상승합니다.]
탁.
이마를 짚었다.
“미치겠군.”
이건 예상 못했다.
* * *
그 순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각성자와 마족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무작위 장소에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입니다.]
[막으십시오!]
고작 세 줄.
느닷없이 떠오른 메시지창에 각성자들은 혼란했다.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세상은 천사가 나타나고 마수들이 판을 치며 혼란의 극에 이른 상태였다. 천사들이 거의 몰살당해 암담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나머지 마수를 어떻게 처리할까 전전긍긍하는 이때 다른 이벤트의 출현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고민이 두 개로 늘었다.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고민은 의외로 빠르게 해결되었다.
―이곳은 중국 동북 지구 중부에 있는 지린성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수만에 달하는 해골 병사들이 진격 중입니다. 남쪽으로 빠르게 횡단 중이며…… 피, 피해! 아악!
치이이익!
10초 남짓의 짧은 뉴스.
중국어를 사용해 자막으로 대체되었지만 시청자들은 자막보다 영상의 상황에 집중했다.
날아온 거대한 불덩이를 맞고 헬리콥터가 추락한 것이다.
바로 장면이 전환되며 아나운서가 나타났다.
―이상이 중국의 연합 뉴스에서 보내진 영상입니다. 중국은 이에 따른 대책을 강구 중이며 빠르면 이틀 내에 군사 작전에 돌입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주변국의 반응은 회의적입니다. 천사와 마수의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지금 그럴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아나운서가 굳은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다수의 마수가 던전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중입니다. 천명회, 미스릴 길드 등의 재빠른 대처로 민간 피해는 크지 않지만 시민 여러분께서는 주변의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대피하지 않은 서울 주변의 시민분들께서는 안내에 따라 지정된 대피소로 빠르게 이동하여 주십시오. 그럼…… 대한민국 모든 분들의 건승을 빕니다.
* * *
“황제 폐하를 위하여!”
잔혹한 사령관.
빛바랜 황금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장신의 남자가 뼈만 남은 말을 탄 채 크게 외쳤다. 그를 따라 5만의 해골 병사가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쿵! 쿵! 쿵!
방패로 가슴을 내리친다. 일정한 리듬을 따라 반복되는 소리가 주변을 강하게 압박한다. 무려 수만의 숫자가 같은 행동을 반복하니 두렵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죽음의 파장!
그들이 발을 댄 곳, 모든 게 황폐화될지니.
풀과 꽃이 죽고 땅이 메마른다. 모든 게 죽어 버린 땅 위에서 그들은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과 대치한 이들이 긴장하며 대기한다. 각성자를 포함한 다수의 군인들이 성 주변에서 농성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숫자가 적다. 게다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지이잉-!
뒤에 선 수백의 ‘해골 법사’가 얇은 지팡이를 들고 휘두르자 거대한 베리어가 사방을 덮었다. 죽음 지대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외부에서의 공격을 상당 수준 차단하는 강력한 베리어가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군단의 공격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해골 궁수’는 그 이름처럼 활을 든 채 원거리 사격을 가했고, 베리어 바깥의 인간들을 농락했다. 강렬한 마력이 담겨서 특수 합금조차도 가볍게 뚫어 버렸다.
베리어 안의 인간들은 졸지에 궁지에 몰린 쥐 신세가 되었다.
인간들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긴장감, 공포감……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그 소리에 잔혹한 사령관이 황금으로 치장된 검을 번쩍 들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우르르!
사령관이 말을 타며 가장 앞으로 나섰다. 그 뒤를 수만의 해골 병사가 뒤따르니 마치 우레가 치는 듯했다.
* * *
나는 가만히 미간을 짚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이야.’
예상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상점에서 구입한 게 이벤트 형식으로 드러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비슷한 설명이라도 있었다면 예상이나 했겠지만 이 빌어먹을 시스템은 그만큼 친절하지 않다.
당연히 내게 귀속되겠거니 했다. 그런데 90일 한정으로 지구를 쓸어버리는 이상한 계약이었다.
오크 대제나 아오진도 그러면 잠시 소환되고 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을 구매한 뒤 그 자리에 새로운 목록이 나타난 것이다.
[+약탈자 함마드의 군단- 8,500]
한 방 제대로 먹었다. 아마 약탈자 함마드의 군단을 고용하면 그 즉시 다른 군단이 목록에 나타날 터였다.
왜 혼자서 군단인가. 간단하다. 바로 지구 침략을 위해서다. 빠르게 지구 멸망 기여도를 높이고 다른 마족을 견제할 수단. 알았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구매했겠지만…….
‘그래도 중국에 나타나서 다행이군.’
유일한 안식거리는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이 중국에 소환되었다는 점이었다. 중국에서 제대로 한바탕 휘저어 준다면 마족들도 방심하지 못할 테다. 함부로 병력을 빼내는 짓을 하지는 않겠지.
그것만으로도 백작 사만의 던전을 차지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된다.
아직까지 내 던전 앞에서 얼쩡거리는 마족이나 마수들도 철수할 게 분명했다.
문제는…….
[지구 멸망 기여도가 가파르게 상승 중입니다.]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2,831PT를 획득했습니다.]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981PT를 획득했습니다.]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4,376PT를 획득했습니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알림들.
안 보고자 한다면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지워지지만 한 가지 문구 탓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구 멸망 기여도.’
잔혹한 사령관은 나타나자마자 난동을 피웠다.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멸망시켰다. 그게 그냥 인간이든 각성자든 간에. 그의 입장에선 모두가 ‘도둑’일 따름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기여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몇이나 죽건 크게 상관은 없다. 외국의 각성자도 내가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다. 나 역시 수많은 인간들을 죽여 왔지 않은가. 그러나 ‘지구 멸망’은 나로선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회귀할 당시, 신들은 나를 돌려보내 주는 대가로 지구의 모든 마족이 죽기를 바랐다. 인류의 멸망만큼은 막아 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도 받았다. 그따위 약속, 가볍게 무시해도 좋겠으나…… 그들이 남겨 놓은 선물이 걸린다.
던전을 얻을 때마다 생기는 최상급의 마수들. 커다란 힘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본래 신들의 곁에 있던 존재들이다. 섬기거나 어여쁨을 받았던, 격이 다른 생물인 것이다. 이미 귀속된 기간테스나 그리핀은 몰라도 이후 추가로 들여올 마수는 신의 의견을 거역한 나를 굳이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최상급의 마수를 버릴 수는 없다.’
생각해 보면 이 선물은 일종의 뇌물이다.
지구 멸망을 피해 달라는.
당연히 멸망 기여도가 높으면 그 의미가 없어진다.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게 확실해진 이에게 뇌물을 바칠 이유는 없다. 그 정도 제약은 걸어 놨을 게 확실했다.
‘일단 사만의 던전을 접수하고 고민해 봐야겠군. 저 군단을 어찌 활용할지.’
간만에 머리가 아파 오는 일이다.
내심 시스템을 욕하며 크라스라와 연결된 수정구를 꺼냈다.
일을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