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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96화 (96/242)

던전 사냥꾼 96화

중국 장쑤성 난징.

백작 사만의 던전이 있는 장소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등잔 밑이 제대로 어두웠다고 할 수 있겠다. 조금 더 먼 장소에서 좁혀 가는 식으로 탐색시키다가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이다.

“마스터를 뵙습니다.”

그리핀에서 내려온 크라스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주변으로 수백 기의 쉐이드가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그리핀은 강행군에 매우 화가 난 듯 죄 없는 바닥만 마구 차 댔다. 그럴 때마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이 들썩였다.

이들 모두가 강행군을 하도록 만든 게 나다. 그에 따른 칭찬 정도는 해 줘도 괜찮을 터.

“잘 찾아 주었다.”

“더욱 빨리 찾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뒷짐을 진 채 던전을 바라본다.

500미터가량 떨어져 있었지만 사만의 던전은 외견으로 보이는 크기가 제법이었다. 게다가 곳곳에 스켈레톤, 좀비 따위가 돌아다녔다. 간혹 오크나 슬라임도 섞여 있었다.

‘질 떨어지는군.’

폭주한 던전의 요정이 대부분의 마수를 바깥으로 내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보이는 마수의 수준이 아주 형편없다. 가장 높은 게 고작해야 하급 수준이니…… 값비싼 마수들 몇 마리를 사자고 전체적인 질을 떨어뜨린 경우였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라지만 역시 우파 파벌의 마족다웠다. 이미 죽은 놈이지만 그 무식함 만큼은 칭찬을 해 줘도 될 듯싶었다.

“저게 전부인가?”

혹시 몰라 물었다. 크라스라가 잠시 고민하곤 말했다.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어서 안으로의 정찰은 불가능했습니다.”

“쉐이드로도 말인가?”

쉐이드는 반쯤 영체다. 저런 질 낮은 마수들을 피해서 던전 안에 들어가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속도도 꽤 빠르고.

크라스라는 면목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림자 죄인 한 마리가 던전 입구 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함부로 손을 댔다간 전면전이 일어날 것 같아, 우선 마스터에게 의견을 여쭈려 하였습니다.”

그림자 죄인…… 쉐이드의 진화 형태라고 일컬어지는 상급 3Lv의 마수. 그림자 죄인이 있다면 쉐이드로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잘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폭주한 요정과 마수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하여 한 번에 쓸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어중간하게 건드렸다간 역으로 당한다.

크라스라가 전신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명만 내려 주신다면 당장 저 던전을 깨끗이 정화시켜 보이겠나이다.”

“아니다. 이번 일은 내가 맡으마.”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런 것들을 상대하기에는 마스터의 격이 너무나도 높습니다.”

아부처럼 들리지만 그것도 사실이었다.

고작 하급 마수 따위를 처리하는 데 내가 나서는 건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선 내가 선두에 설 필요가 있었다.

‘던전을 차지하려거든 확실하게 보여 줘야 한다.’

다름이 아니라 던전의 요정이 보고 있는 탓이다.

마족의 죽음을 느끼고 불안에 잠긴 요정이 입구를 틀어막았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감시의 눈길을 쉬이 하지 않을 것이었다.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유심히 지켜볼 것이고, 선두에 선 내가 압도적인 힘을 보이거든 더욱 큰 공포를 자각하게 되리라.

그리되면 휘하로 들이는 일은 간단해진다.

간만에 ‘분노’를 꺼내 들고 붉은색의 망토 ‘나태’를 함께 착용했다. 그로도 모자라 보조 아이템마저 발동시켰다. 조금이라도 더 확실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다.

“파라노말.”

[파라노말의 다섯 가지 축복 중 하나, ‘강력한 매력 부여’가 적용되었습니다.]

[다가서십시오. 웃어 보이십시오. 그때부터 이성은 당신의 노예입니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본판 불변의 법칙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크가 웃는다고 엘프가 넘어가겠습니까? 모든 것의 완성은 ‘얼굴’입니다. 그래도 기본 이상이라면 효과가 상당할 것입니다.]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확률이 이상하다.’

1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씩 오르거나 30분간 마력 5가 상승하는 축복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을 것일진대, 막상 두 문구를 본 적이 없었다.

확률이 이상하다. 두 번 중 한 번은 ‘무한 정력’이 선택되질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랬다간 한 곳에 피가 몰린 채 싸움에 들어갈 뻔했다.

‘앞으로는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해야겠군.’

그런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싸움에 임했다간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나로서도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작게 혀를 차며 앞으로 나간다.

내 뒤를 따라 크라스라, 그리핀, 리치와 용아병, 그리고 200마리의 샤벨 타이거가 정렬했다.

채엥!

분노를 하늘 높이 들었다.

그리고 검을 앞으로 뻗었다.

“따르라. 적을 섬멸할 것이다.”

사실 적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하다.

당장 샤벨 타이거만 하더라도 오크 따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동안 몇 차례 오크 따위를 넣어 주며 사냥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더욱 상대가 수월했다.

용아병은 용의 뼈로 만든 병사답게 몸 전체가 무기였다. 리치나 크라스라, 그리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중 가장 앞서 나가는 건 나였다.

수천의 최하급과 하급 마수를 뚫고 던전의 입구까지 닿았다.

그곳에서 그림자 죄인을 발견했다.

회귀하고 영국에서 한 차례 맞붙어 본 마수. 그때와 지금의 나는 비교 불가의 수준으로 강해졌다.

스으윽.

발에 묶인 쇠고랑. 그곳에 연결된 철구가 바람과 같이 빠르게 날아온다.

터억!

그러나 피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도리어 날아온 철구를 붙잡았다.

95에 다다르는 막강한 힘! 초월의 영역에 반쯤 들어간 이 힘 앞에 그림자 죄인 따위가 쏘아 낸 철구는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다.

“비켜라. 너희의 주인을 만나러 왔다.”

상급의 마수는 지능이 높다. 내가 한 말쯤은 알아먹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요정 또한 보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럼에도 아무런 기색이 없다는 것은 협상의 결렬을 뜻했다.

‘아직 부족한 모양이군.’

철구를 던졌다.

‘다크 소드.’

우우웅-

분노가 어둠에 물들었다.

아이템에 적용된 분노나 나태와는 달리 다크 소드는 직접 익힌 스킬이었다. 따로 시동어를 말하지 않아도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그림자 죄인은 다크 소드를 보곤 조금 당황한 모습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나를 극도로 경계했다.

‘기본이 어둠이라 그런가?’

어둠은 어둠을 알아보는 법이다. 그림자 죄인은 태생부터가 그랬으니 다크 소드의 무서움을 단번에 파악할 것이다.

허나……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나는 특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두 번 말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마찬가지로 반복하여 비키라는 말을 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바닥을 박찼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그림자 죄인이 철구를 던졌다.

촤륵!

철구가 반 토막 나며 바닥에 늘어졌다. 쉬지 않고 몰아치자 그림자 죄인이 이번에는 쇠사슬을 돌렸다.

쿵!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쇠사슬이 바닥을 때렸다. 바닥이 깊게 파였고, 그 순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나를 더욱 압박하려 들었다.

나는 검을 놀려 달려드는 쇠사슬을 끊었다.

그림자 죄인의 쇠사슬은 잘라 내도 재생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재생이 되지 않았다.

스으으…….

그림자 죄인은 매우 당황한 기색이다. 쇠사슬이 재생되지 않자 급히 더욱 물러났다.

‘과연.’

그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다크 소드에 공격당한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체적인 상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처럼 마력으로 이루어진 물질에도 유효한 것이다.

이건 생각보다 쓸모가 많겠다.

업적 상점.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에서 강하게 머리를 얻어맞았지만 다크 소드는 제대로 된 스킬이었다.

스악!

감탄도 잠시.

물러서는 그림자 죄인을 단칼에 보내 버린 이후 몸을 돌렸다.

그리핀의 불과 번개 스킬이 작렬하며 다수의 슬라임을 태우고 있었다.

리치는 좀비를 터트리며 활약을 보였다. 좀비 자체가 원래부터 죽은 자였기에 리치의 ‘시체 폭발’ 스킬을 피할 순 없었다. 당하지 않으려거든 지능이 매우 높아서 항마력을 키워야 하지만 최하급 마수 따위가 그 정도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거의 다 정리됐군.’

수천 마리의 마수를 처리하는 데 들어간 시간은 고작 20분여.

질의 차이가 워낙 심하기도 했지만 내가 데려온 마수들이 그만큼 강하기도 했다.

피해는 전무!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붉은 창을 휘두르며 크라스라가 다가왔다.

나는 묵묵히 말했다.

“제대로 따라오라. 속도를 내겠다.”

결과가 정해져 있는 싸움.

길게 끌 필요는 없었다.

순식간에 최상층까지 도달한 나는 무심히 던전 코어를 바라봤다.

내 뒤로 정렬한 마수의 구성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상급 마수와 부딪힌 샤벨 타이거 다섯 마리를 제외하면 말이다.

“씩씩이의 코어를 부술 거야?”

“씩씩이? 그게 너의 이름인가?”

던전 코어의 위, 허리에 양손을 얹은 요정이 당차게 서 있었다.

“그래, 맞아. 내 이름은 씩씩이야. 그리고 부수려면 부숴. 씩씩이는 자연으로 돌아갈 거야. 씩씩이가 씩씩이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만이 죽어서 씩씩이도 속 편해!”

요정치곤 성격이 조금 있다. 씩씩이라는 게 화가 날 때 숨이 차서 ‘씩씩’거리는 것인가 싶었다.

하여튼…… 마족이 요정을 학대하는 건 거의 비슷하다. 사만 역시 씩씩이를 모나게 대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런 반응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볍게 말했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

“그게 무슨 홍차에 꿀 같은 말이야?”

“홍차에 꿀?”

“둘은 궁합이 최악이야. 같이 먹으면 맛없어.”

참으로 명쾌한 대답이었다.

“씩씩, 나는 요정을 박해하지 않는다. 내가 요정의 축복을 받았음을 너는 알 것이다.”

“네가 요정의 축복을 받았다고? 어디…….”

킁킁!

개처럼 냄새를 맡던 씩씩이가 눈을 번쩍 떴다.

“이 냄새는 이히잖아?”

“이히를 아는가?”

“알아, 그 요망한 계집. 다른 요정들은 격이 안 맞아서 못 놀아 주겠다고 혼자 도도한 척은 다 하더니! 씩씩이가 꽃을 선물했는데 바닥에 버리고 마구 밟았어!”

씩씩이가 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을 줄이야.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겨우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로군.”

“빛을 머금고 피어난 아주 진귀한 꽃이었는데! 그거 구하려고 씩씩이가 10년 동안 고생했단 말이야.”

“……들어올 것이냐, 말 것이냐.”

더 이상 장단에 맞춰 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정말 마왕이 될 수 있어?”

“나 아닌 자가 마왕의 자리에 앉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 봤자 어차피 요정왕은 이히 그 계집애가 될 텐데.”

“나는 모든 요정에게 비슷한 기회를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성과를 많이 낸 요정을 요정왕의 격으로 끌어올려 줄 셈이다. 설령 선택되지 못하더라도 격 자체는 올랐으니 언젠가는 요정왕이 될 수 있지 않겠나?”

“그건 그래.”

씩씩이가 고민에 잠겼다.

슬쩍 눈을 돌려 나를 훑더니 이어 뒤에 선 마수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압도적인 무위, 상급의 마수들. 백작 사만과 비교하여 저울질을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계약을 버리고 새로 중복 계약을 해야 한다. 그 페널티로 인해 ‘소멸’할 수도 있는 일. 고민은 당연했다.

대략 10분이 지난 다음 씩씩이가 입을 열었다.

“좋아, 나도 이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기엔 억울해. 사만은 씩씩이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겠지? 그럼 너를 던전 마스터로 부를게!”

드디어 성사되었다.

나는 분노를 집어넣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염려 마라.”

* * *

[던전을 점령했습니다. 잔여 포인트 1을 얻었습니다.]

[업적 점수 1,000점이 추가됩니다.]

계약이 완료되자 떠오른 메시지창.

동시에 일본의 던전을 차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빛이 사방을 잠식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세 던전이 이어지고 이동 마법진이 새겨지며 복속을 끝마쳤다.

‘이제 놈을 만나러 가야겠군.’

미간을 좁혔다.

잔혹한 사령관!

사만의 던전을 얻었으니 이제 말 안 듣는 똥개를 혼내 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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