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97화
제단을 찾고 마수들을 얻어 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걸린다. 잔혹한 사령관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발이 닿으면 피의 태풍이 몰아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던전을 공략하는 부대와 인간들을 쓸어버리는 부대를 나누었는지 지금도 계속 멸망 기여도가 오르고 있었다.
막무가내.
딱 그 단어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덕분에…… 중국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마족들도 이 이변을 눈치챘다.
‘골치 아프군.’
시간을 더 뒀다간 천사의 공략을 끝낸 나머지 마족들이 모여든다.
대공이나 공작급의 전력이라면 나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잔혹한 사령관과 그의 부대가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잔혹한 사령관을 회유하여 그 공격에 대비하던가, 어느 정도 뭉개 버려서 경각심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학살을 멈추고 마족을 견제하려 들 터.
어차피 90일이면 증발해 버릴 용병이다. 마족과 단판 승부를 해 주는 편이 내게도 이득이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마족의 전력을 깎아만 준다면 업적 점수 6,000점의 값어치는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값어치는 사만의 던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이 날뛰어 준 덕분에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던전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리핀 위에서 시선을 내려,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수백의 인간이 각자 무기를 들고 진로를 막고 있었다.
잠시 후면 지상의 마수들과 맞닥뜨리게 될 상황.
“그리핀, 막는 이들을 쓸어버려라.”
키이이!
그 즉시 그리핀의 입에서 ‘불과 번개’가 쏟아져 내렸다. 숫자만 많은 약자를 쓸어버리는 데 있어선 따라올 게 없는 그리핀만의 고유 스킬!
콰르르릉!
불과 번개가 지상에 작렬하자 모든 것을 태우고 녹여 버렸다. 조잡한 무기로 무장한 인간들쯤은 그 열기만으로도 심각한 부상을 입기 마련이다.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은 겁에 질리며 부랴부랴 도망갔다.
이 ‘멸망 기여도’는 수십만의 인간을 죽여야 조금씩 오른다. 고작 수백은 신경도 안 갔다. 그보다는 하루빨리 잔혹한 사령관을 막는 게 기여도를 더 이상 올리지 않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도망가는 인간을 샤벨 타이거가 낚아챘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신경을 접었다.
* * *
“황제 폐하를 위하여!”
잔혹한 사령관은 그 이름처럼 자비가 없었다. 5만의 군세로 벌써 수십만의 인간을 도륙했지만 갈증은 멈추지 않았다. 5천 단위로 군단을 나눠서 모든 생명체를 말려 버리고 있었다.
황금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하나의 생명이 스러졌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본대는 마족의 던전을 치는 중이었다. 벌써 20여 층까지 올라오며 수천의 저급한 마수를 베었다.
여태까지는 순조롭기 그지없었다.
그의 군단은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
죽어서 더욱 강해진 자신의 군단 앞에 마수 따위는 무용지물이었다.
‘음습한 마력이 올라갈수록 더욱 강해지는구나!’
잔혹한 사령관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보물 창고를 털려는 생명체들도 용서할 수 없지만 마족은 한층 더하다. 틈만 나면 중간계를 침범해 황제 폐하를 위협하던 무리. 놈들만 없었어도 대륙은 일통되었고, 제국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신의 저주로 인해 황제 폐하께서는 마족을 막아야 하는 운명을 지니셨지.’
그리고 마족보다 더욱 싫은 게 ‘신’이라 칭하는 녀석들이다. 초월자에 들어선 황제 폐하의 무력은 너무나도 강했고, 균형을 어그러트렸다. 그 균형을 잡고자 신들은 황제 폐하에게 저주를 걸었다. 중간계를 침범하는 마족을 막도록…… 강제로 수호자의 운명을 덧씌운 것이다.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황제 폐하께선 일생의 도박을 걸었다. 갖은 오명을 써 가면서도 꿋꿋이 걸어 나갔다. 잔혹한 사령관과 그의 군단이 필사적으로 창고를 지키는 이유다.
황제 폐하가 죽으라면 웃으며 죽을 수 있는 게 자신과 자신의 군단이었다.
수호자의 운명을 가여워하며 그 뜻을 이어받는 자들!
“이 빌어먹을 새끼들! 감히 포인트를 전부 쏟아붓게 만들어? 결코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라!”
그 순간, 맞은편에서 대규모의 마수가 나타났다.
딱 봐도 여태껏 쓸어버린 마수와는 질이 다르다.
그리고 마수의 중심부에 마족이 있었다.
‘쉽지 않겠군.’
잔혹한 사령관이 작게 침음을 흘렸다.
군단을 10조각 낸 탓에 이곳에 있는 병력은 5천 안팎이었다. 그마저도 던전을 오르며 4천으로 줄었다.
마족은 매우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온갖 인상을 쓰며 ‘포인트’라는 단어를 남발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잔혹한 사령관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마족은 곧 거대한 도끼를 꺼내 들었다.
“잔혹한 사령관인지 뭔지 잘 걸렸다! 네놈을 묵사발…….”
“후퇴하라!”
그러나 아무리 잔혹해도 그는 사령관이었다.
힘들 게 뻔한 싸움을,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해 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뭐? 후퇴? 이런 젠장 할 놈이! 그렇게 놔둘 줄 아느냐!”
열이 잔뜩 오른 마족이 마수들을 이끌고 추격을 개시했다.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이 연출됐다.
하지만 잔혹한 사령관의 노련한 지시,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해골 병사들로 인해 피해는 적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병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해골 기사’를 입구 쪽에 배치해 둔 터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잔혹한 사령관은 빠르게 던전의 바깥에서 나뉘었던 병사들과 합류했다.
그 뒤를 마족과 마수가 뒤따랐다. 다른 던전을 침범 중이던 병사들과는 합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숫자가 단번에 1만 3천까지 늘었다.
하지만 그 숫자를 마족에게 보여 주진 않았다. 파발을 보내 주변에서 대기토록 명령만 내렸다. 그리고 마족과 마수가 좁은 지형 안으로 들어온 즉시 덮쳤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쿵! 쿵!
질서정연하게,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는 커다란 발소리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되다 만 언데드 새끼가! 건방 떨지 마라!”
마족은 후작 델라트였다. 던전이 공격받고 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자 곧장 돌아온 것이다.
대공 오쿨루스에게 소식을 전하며 동시에 방어를 시작했지만 잔혹한 사령관과 그 군단은 의외로 강력했다. 이미 천사를 공략하며 상당수의 마수를 잃어서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막지 못할 수준이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가진 포인트 모두를 사용했다. 마계 옥션에서 사용하려고 아끼고 아꼈건만 분노로 타오르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한데…… 이성이 반쯤 날아간 탓에 함정에 빠졌다.
꽈드득!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상당히 잘 짜진 방진이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목숨 줄을 조여 오고 있었다.
“다 죽여 버려!”
델라트가 분노의 외침을 쏟아 냈다.
싸움은 가열됐다. 구석에 몰렸지만 델라트도 만만치 않았다. 그간 쌓아 오고 천사 사냥을 통해 벌어들인, 거의 150만에 달하는 포인트를 쏟아부었다. 그만한 전력이 해골 병사 따위에게 맥없이 밀린다면 말이 안 된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러나 델라트는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마수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어이없이 목숨을 내줄 판국이다.
하지만 시간만 끈다면 승산이 있다.
자신이 모시는 대공 오쿨루스는 결코 휘하 마족의 죽음을 방관할 분이 아니시다. 직접 도움을 요청한 만큼, 오쿨루스가 움직이면 공작들도 뜻을 함께할 터. 고작 되다 만 언데드 따위가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즉시 공수를 바꿨다. 똘똘 뭉쳐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샤아아아아-!
바닥을 뚫고 초록색의 거대한 줄기가 여럿 솟아올랐다.
둘레가 5미터를 넘어가고, 길이는 족히 수십 미터에 다다르는 가공할 존재감을 뿜어 댔다.
쾅! 쾅!
솟아오른 줄기가 해골 병사들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스킬.
델라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의 주인, 오쿨루스 님이시어!”
오쿨루스를 비롯한 세 명의 공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세가 또다시 역전되었다.
* * *
잔혹한 사령관의 발자취를 따라 도착했을 때 주변은 온통 시체 천지였다.
하물며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다.
수만에 이르는 마수와 잔혹한 사령관의 군단이 맞붙고 있었다.
‘한발 늦었던가?’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다섯의 마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잔혹한 사령관은 빠르게 명령을 내리며 버텨 내고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밀리는 형세였다.
그저 그런 마족 다섯과 마수들이라면 잔혹한 사령관이 밀릴 리 없지만 상대 마족들을 본 나는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오쿨루스, 그리고 공작들.’
그렇다면 밀릴 만하다.
오히려 여태껏 버티고 있던 게 용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던전을 들쑤신 덕분에 끝판왕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빼는 게 낫겠군.’
지금 당장은 대공 우파를 잘라 내는 데 주력하고 싶다. 오쿨루스와 척을 지는 건 그다지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오쿨루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로 유명했다.
아리엘, 우파, 판데모니엄은 가진 특색이 확실해서 공략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오쿨루스는 다르다.
전생에서 가장 먼저 세계수를 띄우며 많은 이득을 취했지만 이상하게 마왕의 자리에 그다지 욕심이 없어 보이는 행세를 보이기도 했고, 최후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 기행을 수없이 행했다.
하지만 멍청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득은 누구보다 빠르게 챙겼다. 다수의 업적, 특수한 이벤트의 상당수를 오쿨루스가 독차지했다.
쉽게 잴 수 없는 자.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대공이었다.
게다가 내가 끌고 온 마수들도 적었다. 함께 잔혹한 사령관을 칠 게 아니라면 빠지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한창 싸우는 와중이라 나를 눈치챈 이는 거의 없었다. 발을 빼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막 마수들을 물리고 빠지려 할 바로 그때.
“아아……!”
잔혹한 사령관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건만 나를 정확히 주시했다.
채엥!
짧은 침묵.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들고 있던 검마저 떨어트렸다.
“이 황홀한 마력! 이 압도적인 존재감!”
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제 폐하!!”
말을 몰아,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당황했다.
‘황제 폐하?’
저게 무슨 소린가.
잔혹한 사령관을 따라 수많은 병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무질서하다. 지금까지 보인 질서정연한 모습은 없었다.
주변의 마수들은 아랑곳 않았다.
넘어지고, 방패를 던지고…… 아비규환이다. 아군이 쓰러지면 그 몸뚱이를 밟고 갔다.
천하의 오쿨루스조차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잔혹한 사령관은 달렸다. 병사들? 신경도 안 쓰는 기색이다.
덕분에 가장 먼저 내게 닿았다.
척!
그리고 말에서 내려와 투구를 벗었다. 이어서 무릎을 꿇었다.
“신, 막시움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
흉터투성이의 얼굴. 남자답다고 여길 법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이런 일은 예상에 없었다.
난데없이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을 줄이야.
잔혹한 사령관은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시체라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눈물을 흘릴 수만 있었다면 펑펑 흘렸을 기세다.
“드디어…… 드디어 굴레를 벗으셨군요. 흐하하! 이제 신들을 조롱하며 대륙을 일통할 일만 남았습니다. 흐하하하!!”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군.”
“아아! 아직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십니까? 확실히, 심장의 마력이 전부 개방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각성의 단초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신 막시움이 용사들과 함께 황제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뒤따라온 병사들이 정렬했다.
뼈다귀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몸을 달그락달그락 떨어 댔다.
흥분, 고조, 감동…….
‘심장?’
그 와중, 심장이라는 단어는 확실하게 들었다.
‘나락 군주의 심장.’
이스터 에그로 우연하게 손에 넣은 나락 군주의 심장.
이것이 잔혹한 사령관과 연관이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