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98화
‘그보다…….’
머리가 아파짐을 느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중첩되어 꼬였다. 도저히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오쿨루스와 공작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한다. 영락없이 잔혹한 사령관과 얽혀 버렸다. 누가 보더라도 내 쪽이 잔혹한 사령관과 그 군단의 ‘주인’ 같은 모양새이지 않은가!
유일한 증명의 길은 여기서 잔혹한 사령관의 목을 쳐 내는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황제라 칭하며 따르는 모습이니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각성의 단초.’
그 말이 걸린다. 나락 군주의 심장에 대한 이야기를 이놈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락 군주의 심장은 여태껏 내게 부족했던 지능을 아낌없이 올려 주던 보배로운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럼에도 아직 전부 각성하지 못해, 그 끝이 어디일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각성시킬 수만 있다면 내 고질적인 문제는 거의 해결되는 셈이다. 문제는 여전히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가느냐인데…….
일단 심안을 열었다.
이름: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
직업: 엠페러 나이트
칭호:
* 더 없는 충정(U, 힘+6)
* 굳건함(U, 체력+6)
* 언데드 사령관(Ex U, 민첩지능+4)
능력치 :
힘 85(+6) 지능 82(+4)
민첩 81(+4) 체력 88(+6) 마력 74
잠재력(410+20/410)
특이 사항: 수만 년간 지저의 보물 창고를 지켜 온 충직한 기사입니다.
스킬: 찬란한 황금의 검(Epic), 잔혹한 리더십(Epic)
[상대 비교]
랜달프 브뤼시엘
힘 95 지 77 민 90 체 85 마 96 잠재력(392+51/500)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
힘 91 지 86 민 85 체 94 마 74 잠재력(410+20/410)
상당하다. 잠재력을 모두 채우고 보정 능력치로 능력치 총합 430을 만들었다. 칭호가 무려 세 개나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에픽 등급의 스킬도 두 개였다.
‘성장 가능성은 없지만 거의 완성된 형태.’
이 정도면 충분히 최상급 마수다.
그리핀이나 기간테스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었다.
하물며 주변의 해골 병사들도 쓸 만했다. 일반 병사는 중급 마수, 기사는 상급에도 들어갈 위용을 선보였다.
탐이 난다. 그러나 역시 오쿨루스를 적으로 돌리는 건 시기상조다.
가면을 쓰고는 있다지만……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대공의 눈썰미라면 나를 알아봐도 이상하지 않다.
그때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황제 폐하, 신 막시움과 함께 저 더러운 마족과 마수를 쓸어버리시지요. 오랜만에 함께 전장에 나가 호흡하는 영광을 제게 주시옵소서.”
눈이 빛난다.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은 여전히 저 멀리 있는 오쿨루스를 바라봤다.
그와 공작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찌한다.’
전체적인 약세.
막시움과 그의 군단은 이만여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와 내가 가진 마수들이 합세한다 하더라도 숫자는 비슷하다.
질적인 측면에선 살짝 밀린다. 그나마 내가 대공과 공작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면 아주 조금 승률이 오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힘을 발휘하여 직접 부딪치면 내 정체가 탄로 날 수밖에 없다.
고민이 됐지만 의외로 그 고민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랜달프 브뤼시엘.”
오쿨루스의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역시 가면 하나로 대공을 속이기는 역부족이었던가?
그나마 한국의 던전 앞에 모인 마족들은 백작 아니면 후작들밖에 없어서 속여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을 잃기 전의 타쉬말은 나를 알아봤고, 마찬가지로 대공 오쿨루스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씁쓸하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딪치기도 전에 탄로 났으니 돌아갈 길조차 없었다.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분노를 꺼냈다.
‘우선 힘을 드러낸다. 끝까지 갈 경우 서로가 입을 피해가 막심하리라는 걸 보여 줄 수밖에.’
서로가 가진 힘의 우위는 약간 밀릴 뿐, 완전히 기울어 있지는 않았다. 총력전이 된다면 오쿨루스나 나나 입을 피해가 막심하다. 그러니 오쿨루스가 생각을 바꾸도록 밀고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막시움, 나를 따르라.”
“신 막시움, 여태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변함없는 충정으로 황제 폐하를 모시겠나이다.”
무릎을 꿇고 몸을 부르르 떨어 댄다.
다른 해골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무슨 간질이라도 걸린 모양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
장단을 맞춰 줬다. 어차피 막시움의 인식에 나는 ‘기억이 완전하지 못한’ 듯싶었으니 마음껏 활개 쳐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먼저 이 상황을 타파한 후 그 각성의 단초라는 걸 들어 봐야겠다.
앞으로 나선다.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다. 해골 병사들이 재빠르게 물러난 덕이다.
“다크 소드.”
우우웅-!
분노가 검게 물들었다.
“파라노말.”
[파라노말의 다섯 가지 축복 중 하나, ‘1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2’가 적용되었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쓸 만한 축복이 걸렸다.
승기가 내게도 조금은 있다는 뜻일까?
어쨌든 좋은 소식이다.
그리핀이 하늘을 날았고, 용아병과 리치, 샤벨 타이거가 바짝 뒤따랐다.
막시움은?
어느덧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황제 폐하, 말은 필요 없으십니까? 제 말을 바치겠습니다.”
“필요 없다.”
내 진가는 내가 직접 두 발로 뛰어날 때 발휘된다.
말을 못 타는 건 아니지만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전방을 주시했다.
오쿨루스와 휘하 마족들이 진격을 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한 번은 필히 부딪혀야 함이다.
쯧,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줄은.
검게 물든 분노를 높이 추켜세우고 말했다.
“나를 따르라. 지금부터 적을 섬멸할 것이다.”
쿵!
크게 한 발 내디뎠다.
그것을 신호로 모든 병력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 상급 4Lv의 마수로서 그 힘만은 대적할 자가 없다고 알려진 오우거의 변종이다. 세 마리의 트윈 헤드 오우거가 해골 병종을 마구잡이로 쓸어버리고 있었다.
펑! 퍼펑!
게놈 플라이…….
자폭 파리를 수도 없이 생산해 내는 상급 5Lv의 마수. 1미터 정도 크기에 불과하지만 수천, 수만 마리의 자폭 파리를 안에 기생시키고 있었다.
적어도 만물상점에는 팔지 않는 녀석이다. 두 번의 마계 옥션에서도 나온 바가 없었다. 특수한 이벤트로 누군가가 얻었다는 뜻.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마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콰아앙!
오쿨루스의 스킬 ‘자연의 징벌’이 지상에 내리꽂혔다. 거대한 초록색의 줄기가 수없이 솟아나며 나를 노렸다. 그 옆에서 세 명의 공작이 내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역시 네 명은 쉽지 않군.’
전생이었다면 공작 한 명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강하다. 강해졌다. 이들 넷을 상대로도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 역시 유효타를 먹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적어도 하나씩 상대하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노옴!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는구나!”
파삭!
급히 몸을 틀자 그 옆으로 길게 바닥이 파인다.
공작 가르퀴. 오쿨루스의 세 심복 중 하나이며 눈에서 쏘아 내는 ‘광살포’로 유명한 마족이다. 하지만 내 민첩은 파라노말의 축복이 더해져 92에 다다랐다. 초감각이 항시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 크게 외치며 하는 공격 따위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접시에 코를 박아야 한다.
그러나 내 목표는 가르퀴 따위가 아니었다.
오쿨루스.
오로지 놈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방해는 끈질겼지만 거의 닿았다. 나는 심안을 열어 오쿨루스를 바라봤다.
이름: 오쿨루스
직업: 마계 대공(던전 마스터)
칭호 :
* 자연을 다루는 자(Epic, 지능+4 마력+7)
* 가장 거대한 숲 올모트(Epic, 모든 능력치+3)
능력치 :
힘 73(+3) 지능 85(+7)
민첩 83(+3) 체력 73(+3) 마력 87(+11)
잠재력(401+26/500)
특이 사항: 숲의 고동을 들을 수 있는 자. 자연을 다루는 유일한 마족입니다.
스킬: 자연의 징벌(Epic), 자연화(Epic), 현안(U)
[상대 비교]
랜달프 브뤼시엘
힘 97 지 79 민 92 체 87 마 98 잠재력(392+61/500)
(파라노말로 인한 모든 능력치+2 상태)
오쿨루스
힘 76 지 92 민 86 체 76 마 98 잠재력(401+26/500)
괜히 대공이 아니란 말인가?
능력치 회복의 추세가 가파르다.
공작들도 대략 400에 근접하는 능력치 총합을 보유하고 있었다.
순수 능력치가 거의 한계에 부딪혀 칭호나 아이템의 도움으로 올리고 있는 나와는 전혀 다르다. 내가 여기서 정체해 있다면 앞으로 1, 2년 안에 따라잡힐 것이다.
이를 꽉 물었다. 정체해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고, 지금 또한 그들보다 앞서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내가 그들의 ‘대적자’임을 선포할 것이었다.
촤하학!
자연의 징벌. 거대한 초록색의 줄기를 잘라 냈다. 서로의 마력이 비슷하니 공격도 잘 먹혀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오쿨루스와의 거리는 이제 200미터가 안 된다. 한 번 도약하면 닿을 수 있었고,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여기까지 닿는 데만 40분을 넘게 소비했다.
바로 그 순간, 오쿨루스의 끈적끈적한 눈이 내 전신에 닿았다.
[현안(U)이 발동했습니다. 랜달프 브뤼시엘의 약점을 찾습니다.]
[심안(Ex U)으로 간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방어율 70%]
[지능 보정! 하지만 상대의 마력이 너무 높아 그 효과가 미미합니다. 방어율 81%]
[현안(U)의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눈살을 찌푸린다. 대공 아리엘도 언령이라는 심상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오쿨루스의 현안도 비슷한 것인 듯싶었다. 다만 상대를 지배하기보다 약점을 찾는다는 점이 다르다.
‘심안이 없었다면 간파당할 뻔했군.’
내 약점이 무엇인지 나조차 모르겠지만 현안이라면 찾아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심안의 존재가 두고두고 도움이 되는 경우였다.
오쿨루스의 얼굴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상당히 놀란 표정.
그에 개의치 않고 단번에 도약하며 분노를 휘둘렀다.
사악!
무언가를 베었다. 하지만 오쿨루스는 아니다.
오쿨루스의 몸에서 솟아난 수없이 많은 줄기. 그것이 분노를 막아선 것이다.
이후 오쿨루스가 약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랜달프 브뤼시엘.”
나는 분노를 겨눈 채 입을 열었다.
“용케 나를 알아챘더군.”
“네놈, 제법 재밌는 짓을 했어.”
잔혹한 사령관과 그 군단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재밌었다면 다행이다.”
“후후. 재미있구나, 재밌어. 처음부터 나는 네놈을 눈여겨 두고 있었다. 마계에서 내게 도전장을 내민 그날부터. 맹랑한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참으로 재밌게 성장했구나.”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마계에 있었을 당시, 네 명의 대공에게 도전장을 보낸 적이 있었다.
아리엘에겐 대차게 깨졌으며 우파는 아예 상대도 해 주지 않았다. 판데모니엄? 나를 철저하게 고문하고 즐겼다. 오쿨루스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그 눈빛으로, 손가락질 한 번으로 내 팔을 절단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들 모두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아리엘, 판데모니엄은 아예 나를 처음 만난 취급을 하였다. 우파는 마계에서 부딪힌 적도 없으니 나를 모르는 게 당연했다.
한데…….
기억하고 있다?
입이 닫힌다.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진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전생에서조차 아는 척하지 않던 놈이, 지금에 와서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말을 내뱉는다.
실로 오묘하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런 이상한 감정이었다.
기쁨, 희열? 그런 건 아닌 듯싶다.
그렇다고 분노나 짜증도 아니니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까.
“재수 없군.”
그렇다. 정말이지 재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