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99화 (99/242)

던전 사냥꾼 99화

오쿨루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래도 그 저변에는 ‘흥미’가 섞여 있었다.

“내 숲의 중심부까지 걸어서 들어온 놈은 네놈이 처음이었다.”

아…… 그런 의미였던가.

가장 거대한 숲 올모트.

오쿨루스는 그곳의 주인이다.

도전장을 던지고 직접 찾기까지 무려 1년이나 걸렸다. 지금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짓이다. 아무런 의미 없이 1년의 시간을 허공에 던져 버린 셈이었으니까.

재수가 없다는 건 여전했다. 오히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인상이 찌푸려졌다.

“목을 따이는 경험도 처음일 텐데 그것도 재밌어할지 모르겠군.”

그러면서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주변에는 세 공작이 도달해 있었고, 언제든지 내 틈을 파고들 준비를 해 놨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다크 소드로 오쿨루스의 목줄을 딸 기세를 유지했으니 무작정 덤벼들지 않았을 따름이다.

“확실히 성장은 한 듯 보인다만…… 때로는 숙일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최상급의 마수를 둘이나 얻고 강해진 그 비법이 궁금하긴 하나, 오늘만이 날은 아닐 테지.”

오쿨루스는 여유로웠다. 우선 세 명의 공작이 주변을 감싼 상황이다. 자신의 실력에도 믿음이 있다. 하물며 전장의 상황 역시 우세했다. 조바심을 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언제든지 나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오쿨루스가 막시움을 바라봤다.

“나는 내 휘하 마족의 던전을 친 저 버릇없는 언데드를 혼내 줄 심산이다. 잔혹한 사령관을 놔두고 떠나라.”

“그렇게는 못하겠군.”

크게 부딪힘 없이 떠난다는 건 내가 바라는 바다. 하지만 잔혹한 사령관은 각성의 단초를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떠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유, 자신감, 다 좋지만 나를 상대할 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대공들이 긴장하고 놀라도록 만드는 게 내가 세운 1차적인 목표였다. 여기서 등을 돌린다면 처음부터 내가 약자임을 시인하는 셈이다. 하여 가볍게 읊조렸다.

“분노.”

[높은 마력 보정(98)으로 힘과 민첩, 체력이 9씩 상승합니다.]

[지능이 20 하락했지만 순수 지능이 76 이상입니다. ‘아스트랄 코드’로 인해 고유 특성이 강화되어 상태 이상 ‘분노’에 걸리지 않습니다.]

힘 106, 민첩 101, 체력 96.

파라노말의 효과가 더해져 능력치 100을 넘긴 게 무려 두 가지나 되었다.

물론 파라노말의 지속 시간은 10분 남짓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온몸의 혈관이 축소되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상태 이상에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능이 대폭 낮아진 탓에 분노 스킬의 기본적인 폐해를 막아내진 못했다.

‘나태와 함께 사용하진 못하지만…….’

분노와 나태를 동시에 사용했다간 또다시 기억이 끊겨 버릴 것이다. 어쩌면 아군마저 공격할지 모르는 리스크를 굳이 질 필요가 없었다.

분노면 충분하다.

이성은 그대로이지만 쉽게 흥분하는 상태.

절로 이가 악물린다.

검이 바르르 떨렸다. 어둠이 더욱 짙어지며 주변의 공간을 좀먹었다.

눈을 들어, 오쿨루스를 직시했다.

위험을 감지한 오쿨루스가 눈썹을 꺾었다. 그 즉시 몸에서 푸른빛의 가지가 수없이 돋아났다. 뿌리가 땅에 박히며 움직이지 않는 굳건한 나무가 되었다.

본능적인 움직임. 그만큼 내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이겠지.

에픽 등급의 ‘자연화’ 스킬이었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절대적인 방어력과 공격력을 자랑하는 오쿨루스만의 특수한 기술!

수아악!

수천, 수만 개의 가지가 길게 돋아나 나를 노려 왔다. 땅속에선 줄기가 뻗어 움직일 공간을 제한시켰다.

단순히 힘만 강하다면 파헤칠 수 없는 공격.

하지만…… 검을 들어 주변을 살피자 적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틈이 보였다. 민첩은 초감각과 연계된다. 100을 넘어서자 평소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이성을 차갑게 고정시킨다. 눈은 오쿨루스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오쿨루스,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마계에서 날뛰던 미숙아는 이제 없다는 것을.

내가 자신을 위협할 진정한 ‘대적자’라는 사실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틈을 노려,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

그는 전장을 유린하는 한편 먼저 달려 나간 자신의 주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황제 폐하임을 증명하는 심장의 마력이 먼 장소에서도 여지없이 느껴지고 있었다.

왜 마족의 몸에 들어갔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압도적인 모습으로 마족들과 대치하는 모습에 막시움은 크나큰 감동을 느꼈다. 전율이 일었다.

모든 걸 깨부수는 패황. 달려드는 무수한 적의 목을 꿰뚫어 버린 그 잔상이 남아 있는 듯싶었다. 위기에 빠질수록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던 진정한 전신이 다시금 강림한 것이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위하여!”

막시움은 황금의 검을 휘둘렀다.

색이 바랐던 그 검이 지금은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그분께서 홀로 적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진대 어찌하여 그의 기사인 자신이 어물쩍거리고 있을 진가!

달그락! 달그락!

해골 병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그분께서 계신 곳. 막는 적이 있다면 목을 베고 전진했다. 다리가 잘리면 팔로 바닥을 짚고 움직였다. 팔마저 없다면 턱으로, 그마저도 안 된다면 몸을 접어 진군했다.

기세의 전환. 전황은 팽팽했다.

동시에 그리핀을 비롯한 마수들의 활약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수라면 끔찍이 싫어하는 막시움이지만 그분의 휘하에 있다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도리어 황제 폐하의 마수들에게 피해가 없게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흐하하! 보아라! 마족들도 꿈쩍하지 못하는 황제 폐하의 압도적인 힘을!”

검을 휘두르며 막시움은 연방 웃음을 띠었다.

네 명의 마족은 막시움이 보기에도 강력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그중 한 명은 전혀 격이 다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 봐야 마족이다. 감히 그분의 상대는 될 수 없다. 비록 힘을 전부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승리에 막시움은 한 점 의심이 없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은 분명히 있었지만 특정 마족 앞에 선 그분의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음을 느꼈다. 공기가 떨릴 정도로 그 변화는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시작된 사투.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위하여!!”

쿵! 쿵! 쿵!

모든 해골 병사가 방패와 검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응원이다. 포효다. 그분과 그분의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결코 패배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승리하는 것만이 자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막시움은 마족과 황제 폐하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하하……!”

어찌 즐겁지 않으랴.

억지로 수호자의 굴레를 덧씌웠다 하지만 황제 폐하가 마족을 상대하던 그대로의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나무처럼 틀어박힌 마족, 오쿨루스는 가지가 잘려 나갈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가지의 숫자가 많다 하여 안심할 수가 없었다. 다크 소드에 잘려 나간 가지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수천, 수만 번의 검을 휘두르면 결국 밑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머지 세 공작…… 둘의 싸움에 끼어들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틈을 찾지 못했다.

만약 막시움 본인이라면 어떨까.

저 싸움에 끼어들 수 있을 것인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싸움은 격렬했고 격이 달랐다.

절로 몸이 떨리며 호승심이 솟았지만 억지로 주먹을 쥐며 달랜다.

자신에게 주어진 전장은 이곳이다. 그분께서 싸움을 종결하시면 더는 신경 쓸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자신의 임무다.

촤학!

바로 그때 그분의 검이 마족의 몸통을 거세게 긁었다. 치명타는 아니었지만 타격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분의 표정에 여유가 서렸다.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지만 입가의 미소는 한결같았다. 오로지 강자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미소가 그려졌다.

그것을 본 막시움은 깨달았다.

……이겼노라고!

“우리의 신께서 귀환하셨다!”

이미 멈춰 버린 심장이, 뜨겁게 뛰는 것만 같았다.

* * *

10분이 지났다.

파라노말의 축복이 풀렸다.

동시에 나는 오쿨루스의 옆구리에 기나긴 자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다음은 목이다.”

씨익!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오쿨루스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너는…… 정말 랜달프 브뤼시엘인가?”

“그럼 뭐로 보이는가?”

“너는, 누구냐?”

쉽게 인정을 하지 못하는 태도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마계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이처럼 보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회귀까지 한 내가 어찌 같을 수 있겠나.

적당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을 처참히 깨 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재미’를 운운하지 못했다. 여유와 자신감도 사라졌다.

“오쿨루스 님!”

공작들이 다가왔다. 하지만 오쿨루스가 손을 내밀어 저지시키며 입을 열었다.

“자연화한 나는 알 수 있다. 모든 생명의 본질에 가까워진 나는 알 수 있어. 네놈은 랜달프 브뤼시엘이 아니다.”

“웃기는군. 더 할 게 없으니 현실 도피인가?”

“너는…….”

오쿨루스가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듯하지만 정작 오쿨루스 본인도 확실하지 않아서인지 그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대략 10초 정도를 그러더니 오쿨루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싸우는 건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너에게 걸린 스킬 하나가 풀렸고, 지금의 상태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떻겠느냐?”

정확하다. 당장의 상태 이상에서는 벗어났다지만 분노를 오래 지속할 순 없었다. 점점 이성이 멀어져 가고 있었으니 싸움이 길어지면 득보다 실이 많다.

“뭐? 하하!”

하지만 나는 크게 웃어 젖히고 말았다.

네 대공 중 하나인 오쿨루스가 휴전 요청을 해 온 것이다.

“확실히 너는 비정상적인 성장을 이뤘다. 지금 여기서 운이 좋으면 나를 죽이는 것도 가능할 테지. 그러나 너 역시 죽음을 피해 갈 순 없다.”

그것 역시 맞다. 오쿨루스의 말처럼 이루어질 가능성이 압도적이었다. 전장의 전황은 치열했지만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걸 모를 내가 아니다. 세 공작, 나머지 마수들이 합동하면 빠져나가는 게 쉽지 않을 터.

“과연 그럴까?”

하지만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

“끝까지 가 보자는 것이냐?”

오쿨루스가 어리석다며 작게 혀를 찰 때.

“팔 하나를 내놔라. 그러면 생각해 보마.”

나는 제안했다.

이대로 가만히 보내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오쿨루스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나았다.

지금 시점에서 오쿨루스가 사라지면 힘의 균형이 완전하게 배제되어 버린다. 네 대공이 존재하기에 모든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오쿨루스가 죽어서 나머지 마족들이 누군가에게 붙으면 저울이 급격히 기운다. 외에도 변수가 속속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니 제거하고자 한다면 그 파벌에 속한 나머지 마족들을 모두 죽이고 하는 게 맞다. 내가 우파를 상대로 벌이는 공작이 그러했다.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팔 하나라…… 생각보다 싸군.”

오쿨루스라고 다크 소드에 베이거든 회복이 안 된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점잖게 받아들였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오쿨루스 님!”

공작들이 분개했다.

그러나 오쿨루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 나는 오늘 아주 커다란 정보를 손에 넣었다. 고작 팔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아주 가치 있는 것을.”

그 순간 공작들이 조용해졌다.

고작 말 몇 마디에 불만을 잠재워 버린 것이다.

‘허세인가?’

오쿨루스는 알 수 없는 기행을 여러 번 보였다. 그래서 저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허세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공작들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데는 필시 이유가 있으리라.

“자르거라.”

오쿨루스가 자연화를 풀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쨌거나 오쿨루스가 한 발자국 물러나 직접 팔 하나를 내민 것이다. 그가 대공이라는 걸 떠올리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분노를 제대로 쥐었다.

그리고…….

스윽!

툭!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오쿨루스와 그 휘하 마족, 마수들이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검 끝에 오쿨루스의 오른팔을 꽂은 채 귀환했다.

돌아와 주변을 살피니 상황은 가관이었다.

2만에 달하던 병력이 고작 1시간 사이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얼마나 격하게 싸워 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황제 폐하!”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으려는 걸 내가 막았다.

막시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심장을 각성시킬 방법. 그게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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