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01화 (101/242)

던전 사냥꾼 101화

그 외에는 아무런 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

하지만 내용이 심상치 않다. 어둠의 정령왕. 능히 대공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격의 존재이며 마계 옥션의 책임자인 그. 전생에서조차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건만 나를 보고 싶다?

‘가벼이 넘겨선 안 될 사안이다.’

대량의 포인트와 세계수의 씨앗을 넘겨준 의도는 뻔했다. 정령왕은 내가 대공들을 견제하길 바란다. 아니면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하길 원하고 있다.

무언가 다른 도움을 줄 셈인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잡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웃으며 넘길 일은 아니다. 긴장하고 대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어둠의 정령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려 정령계의 일통을 꿈꾸는 야심가였으니 말이다. 정령계가 나타나고 단 한 번도 성사된 적이 없는 업적을 그는 꿈꾸고 있었다.

마음을 놓고 대하다간 잡아먹힌다.

거리를 두고 언제나 계산을 해야 했다.

종이를 뒤집자 정령계로 향하는 방법과 시간이 적혀 있었다.

「10일 후. 시공간의 균열을 만들겠습니다.」

이 대목에선 제법 놀랐다.

나는 당연히 마계 옥션에서 자리를 마련한다는 건 줄 알았다.

억지로 공간에 균열을 만들어 정령계로 나를 이동시키는 건 그쪽에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본래는 불가지만 시스템의 눈을 피해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걸렸다간 페널티를 받을 게 자명한 짓. 준비도 준비거니와 수많은 정령이 그 과정에서 소멸한다고 알고 있었다.

‘급한 모양이군.’

표정을 굳힌다.

서둘러서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대충 종이를 구겨 품에 넣었다.

10일이면 어지간한 주변 정리를 끝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고개를 돌려 여전히 씩씩대고 있는 씩씩이를 바라봤다.

“씩씩, ‘녀석’은 어디 있지?”

씩씩이가 입술을 주욱 내밀며 답했다.

“바로 밑층에 있어요.”

“알겠다.”

발을 움직여 밑에 층으로 향했다.

‘녀석’은 중국의 제단을 찾고 얻은 마수다. 문제가 있긴 했지만…… 돌아온 김에 한 번 더 찾아볼 작정이었다.

층의 입구를 틀어막은 거대한 살덩이.

갈색의, 보기만 해도 혐오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괴생명체!

달팽이 마냥 아주 조금씩 움직이며 주변의 모든 집어삼키고 크기를 불려 나가는 중이었다.

“마스터, 이히가 봐도 이건 정말 못생긴 것 같애요.”

어깨 위에 앉은 이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심미안이 정상적이지 않은 이히조차 거부감을 느낄 정도다. 뿐만 아니라 역한 냄새까지 나서 괴롭기 짝이 없었다.

촤아악!

순간 살덩이의 틈을 비집고 촉수 비슷한 게 튀어나왔다. 나는 분노를 꺼내 촉수를 잘라 냈다.

“여전히 주인을 못 알아보는군.”

“감히 마스터를 공격하다니! 아주 나쁜 마수여요. 이히가 혼쭐을 내 줄까요?”

팔을 걷어붙이며 쏘아 대는 이히의 모습이 퍽 웃겼다.

“되었다. 영적인 존재조차 잡아먹는 마수라고 들었다.”

“흐흠! 어허험! 이히가 자비를 베풀어서 한 번만 봐주지요.”

슬쩍 몸을 털곤 한 발자국 물러나는 이히였다.

‘이런 걸 무슨 생각으로 기른 건지 모르겠군.’

무려 신이 기르던 마수다. 모든 걸 거부하고 모든 걸 집어삼키는 이 거대한 살덩이를, 도대체 왜 기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것을 나에게 넘김으로써 더욱 취향을 의심케 했다.

심안을 열어 녀석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름: 무한의 살덩이

능력치 :

힘 90 지능 0

민첩 43 체력 130 마력 35

잠재력(298/320)

특이 사항: 아누비스가 죽은 자를 인도하던 도중 실수로 ‘혼돈의 강’에 그들을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무려 20만의 혼과 살이 합쳐지며 탄생한 혼돈의 괴물로서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재앙적인 살덩이입니다. 그 성향은 7대 죄악 중 하나인 ‘식탐’을 닮았습니다.

스킬: 성장(Epic)

불균형의 극치를 달리는 능력치. 체력만큼은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선 마수. 하지만 정작 아무런 쓸모가 없는 골칫덩어리였다.

주인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먹어 대기 바쁜 이 살덩이를 어디다가 사용한단 말인가!

이대로 던전에 놔뒀다간 문제를 일으킬 게 분명하였다.

“골치군.”

미간을 눌렀다. 그러자 이히가 손뼉을 치곤 말했다.

“마스터, 마스터. 이거 버려요. 이히가 잠깐 생각을 해 봤는데요. 던전의 마력까지 훔쳐 먹는 엄청 배은망덕한 놈이에요. 가만히 놔두면 제단이나 던전 코어까지 먹어 버릴지도 몰라요! 이히는 상상만으로도 막 무섭고 그래요.”

“맞다. 가만히 놔두면 언젠가 그리될 것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버려야 하나?’

따지고 보면 버리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지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걸로 무언가 수를 마련해 볼 텐데 그게 안 된다. 그렇다고 던전에 두자니 항상 골머리만 아파질 게 틀림없었다.

설마 신이 마련한 선물이 이런 것일 줄은.

“그런데 어떻게 버리지요?”

이히가 입술에 손을 대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한의 살덩이는 가까이만 다가가면 죄다 먹어 버리려는 습성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내었다.

“이동 스크롤을 사용해야겠다.”

한 마리쯤은 스크롤을 이용해서 옮기는 게 가능했다. 포인트가 상당히 들겠지만 이런 마수는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처리하는 게 현명하다.

“이히히! 그 수가 있었지! 그런데 어디다가 버리지요?”

요정은 본래 궁금한 걸 참지 못한다. 이히는 그런 특색이 더욱 강했고, 나는 이왕지사 생각한 김에 장소까지 결정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적당히 우파 파벌의 던전 근처에 떨어트려 놓아야겠군.’

물론 떨어트린다고 무한의 살덩이가 던전으로 들어가리란 보장은 없었다. 식탐의 성향을 빼닮아서 그런지 주인의 명령까지 먹어 버리는 무지막지한 놈이었으니…… 입성하려는 각성자들을 막아서 포인트의 손해를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공작인 파간 그리울리의 던전 근처에 살덩이를 투입시키고 관심을 접었다.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무한의 살덩이를 이동시키느라 수십만 포인트를 사용했지만 공작의 던전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보유한 포인트가 천만을 넘어섰으니 그 정도는 새 발의 피다. 티도 나지 않았다.

골칫거리 하나를 처리하고 한국의 던전으로 이동했다.

25층. 신성 지대에 발을 들이자 동시에 기분이 묘해졌다. 마족과는 상극인 신성력의 영향이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걸어 나가 타쉬말을 찾았다.

‘알을 전부 깼구나.’

신성 지대의 중심부. 수없이 많은 검은색의 털이 둥지처럼 뭉쳐져 있었고, 그 위에 작은 날개를 단 아기 천사들이 빨빨대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타쉬말은 그런 아기 천사들을 돌보는 중이었는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내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바빠 보이는군.”

“아……! 왔느냐? 맞다. 나는 지금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한데 말과는 반대로 표정은 제법 부드러웠다. 여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인자함’을 그 얼굴에 담아내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치곤 잘 해내고 있지 않은가.”

“나도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본래 천사의 양육은 대천사가 도맡아 하는 것이었다. 부디 아무런 탈이 없기를 바랄 뿐…… 앗, 이 녀석! 내려오지 못할까!”

아기 천사 하나가 작은 날개를 펼치더니 허공을 날았다. 그것을 본 타쉬말이 기겁하며 아기 천사를 붙잡았다.

“따로 필요한 건 없나?”

“후우! 근원의 나무에서 잎사귀를 몇 개 가져와 줄 수 있느냐?”

타쉬말이 강제로 내려와 울먹이는 아기 천사를 달래며 말했다.

“잎사귀를 무엇에 쓸 셈이지?”

“근원의 잎사귀로 날개를 닦아 주면 날개가 더욱 크게 자란다. 나도 두어 번밖에 받아 본 적은 없지만 효과는 뛰어나다.”

주천사였던 타쉬말이 두어 번밖에 받아 본 적이 없다면 그만큼 잎사귀가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확실히 줄기나 가지는 많지만 잎사귀는 몇 개 없었다. 하지만 나는 천사들의 성장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슬리를 통해 보내마.”

“고맙다.”

고개를 주억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타쉬말은 조금씩 ‘벽’을 깨 가는 중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천사들을 양육해, 마족들을 쓸어버리는 게 자신의 마지막 사명이라는 듯 행동했다. 그 끝에는 내가 있었지만 그 전까지 돌발 행동을 보이진 않을 터.

그러니 좀처럼 하지 않던 고맙다는 말도 쉽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후 필요한 게 있다면 크리슬리에게 말하라.”

“알겠…… 아! 이 말썽꾸러기들! 아직 날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날개가 약해서 부러질 수도 있단 말이다!”

타쉬말은 바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돌렸다.

아기 천사의 성장에는 이상이 없었다.

타천사 타쉬말의 영향을 받아 문제가 생길 줄 알았건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마족의 던전에 천사라…….

과연 이게 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확인할 것들을 확인하고, 중국의 던전에 기초적인 마수를 뿌려 둔 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처리하지 않은 일이 하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로 데빌 헌터 공격대였다.

모든 이가 나를 죽은 걸로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공격대 자체가 와해될 가능성도 다분했다.

하여 던전을 빠져나왔다. 아직 한국의 던전 앞에는 감시하는 눈길이 조금 남아 있어서 우회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생존을 알릴 필요는 있었다.

‘이건…….’

도시로 들어서자, 잠시 멈칫하고 만다. 곳곳에 ‘랜달프 님을 추모하며’, ‘그의 헌신을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등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내 사진이나 개인 정보는 최대한 은밀하게 다뤘기에 나돌아 다니지 않았지만 현수막에 적힌 글귀는 모두 나를 뜻하고 있었다.

“영웅이 죽고 벌써 100일이 지났습니다. 그로 인해 도대체 몇 명이 구원을 받았는지요? 기억합시다. 영원토록 곱씹읍시다. 그의 희생을, 그의 영광을!”

특히 강남에선 기나긴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행렬의 가운데는 어쩐지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

유은혜, 이지혜, 김용우와 에드워드 윈저.

특히 유은혜의 경우 상복을 입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게 아직도 아픔을 이기지 못한 모양새다. 밥을 많이 못 먹었는지 얼굴도 홀쭉했다.

“…….”

예상보다 일이 커졌다.

여기서 나섰다간 일이 더욱 크게 번질 것 같았다.

나서는 순간 쉽게 빠져나올 수 없으리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정령계에 다녀와서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

설마 이 정도로 나의 영향력이 컸을 줄이야. 그야 최강의 각성자고 최강의 공격대를 운영하였으니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이긴 했지만 이건 상상을 벗어났다.

죽은 이를 이토록 길게 추모할 만큼 감성적인 게 인간이라는 걸 잠시 망각한 것이다. 전생에선 거의 볼 수 없었던 장면이기도 하고.

섣불리 나서선 안 될 듯싶었다.

이 문제를 어찌 처리할지에 관해선 천천히 생각을 해 봐야겠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다시 던전으로 돌아갔다. 드보롱과 약속한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지이잉-!

던전의 최상층.

코어의 옆에 균열이 일어났다.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고 지속 시간도 그리 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결단을 내린 뒤. 망설임은 없었다.

균열에 발을 들였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나타났다.

그러나 빛이 아예 없진 않았다.

저 멀리, 유일하게 빛나는 곳이 출구이자 입구다.

여유롭게 걸어 나가 빛에 다다르자 넓은 방의 전경이 펼쳐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앞에 선 이를 바라봤다.

“환영합니다, 랜달프 브뤼시엘 님. 오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여전히 광대 분장을 한 드보롱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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