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02화 (102/242)

던전 사냥꾼 102화

드보롱. 냉철한 수완가, 맹독을 품은 사기꾼, 정령왕의 제일 심복. 다른 정령도 아닌 그가 직접 나를 맞이했다. 애당초 그가 초대했으니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과연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의 독대는 나도 기대가 되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한데, 여기는 성이 아니로군.”

강제 소환을 당할 때 나타난 방과 형식은 비슷했으나 흐르는 마력의 기류가 미묘하게 다르다. 드보롱이 실실 웃었다.

“눈치채셨군요. 예, 이곳은 성이 아닙니다.”

“이유가 있을 테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분노에 손을 댄다. 사전 고지 없이 다른 장소에 소환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변명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분노를 휘두르겠다는 듯 무정하게 드보롱을 바라봤다.

그러자 드보롱이 찔끔 식은땀을 흘렸다. 최상급의 격을 갖춘 정령이라고는 하나 나 역시 만만치 않다. 죽이고자 한다면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정령왕들의 첩자들이 성 내에 침입했습니다. 억지로 균열을 여는 걸 들켰다간 어둠의 정령왕께서 집중포화를 맞습니다. 양해를…….”

어둠의 정령왕은 야망가다. 정령계를 집어삼키겠다는 의욕 하나로 마신과 계약하고 마계 옥션을 열었다. 수많은 휘하의 정령들을 희생시켜 가며 물건이나 마수를 구했다. 다른 정령왕들이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게 이상하다.

하지만 역시 시기가 빠르다. 전생에서 이런 일이 생기기까지 못해도 10년 정도가 걸렸다. 다량의 포인트를 모은 어둠의 정령왕이 스스로의 격을 한 단계 더 올리고 본격적인 발걸음을 시작한 직후부터 말이다.

‘내 움직임이 정령계에도 영향을 끼쳤던가.’

전생과 비교해서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내 움직임뿐이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두각을 드러낸 일이라면 마계 옥션밖에 없다.

조금 더 많은 포인트를 사용한 게 그만한 영향을 끼쳤을까? 작은 날갯짓이 큰 태풍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지만 그 극악한 확률을 뚫고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니…… 아이러니다.

“이상하군. 어둠의 정령왕이 그처럼 안이할 리가 없을진대?”

사실대로 말하자 드보롱이 이마를 짚었다.

“후우! 중간계에서 신화적인 존재였던 그림자 황제를 아십니까?”

익숙한 이름이다. 고개를 주억였다.

“안다.”

“그가 남긴 지저의 보물 창고는 저희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만 아니…… 솔직히 손을 대는 게 불가능합니다만 최근 그곳에서 차원 이동의 징조가 발견됐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급파를 보내 탐색을 하다가 다른 원소의 정령들에게 그만 발각되고 말았지요.”

아아, 그게 원인이었던가. 이제야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다.

정령들은 중간계에 매우 관심이 많고 셀 수 없을 정도의 숫자가 포진해 있다. 중간계에서 이변이 일어났다면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 하물며 그 또한 내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마계 옥션과 관련된 일은 아니군.”

“맞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정령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예상쯤은 했는지 빛의 정령과 불의 정령 측에서 첩자를 들이는 바람에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닙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더불어서 내 성장 정도도 파악하겠다는 의도겠지. 그렇지 않나?”

이 미약한 마력의 기류를 읽으려면 적당한 수준의 성장으로는 어림없다. 일부러 최대한 흡사하게 방을 만들어 놓은 것일 터.

의도가 뻔히 보여서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괘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어둠의 정령 자체가 원래 그러한 족속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랜달프 님과는 엄연한 동업 관계인데요!”

드보롱은 손을 내저었다. 나는 분노에서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두 번은 없다.”

“하하, 물론입니다. 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이제 슬슬 이동하지요.”

뻔뻔한 얼굴로 넘어간 드보롱이 안내를 시작했다.

통곡의 숲.

어둠의 정령들에게 안식처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장소.

성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곳곳에서 신음이나 비명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숲 자체가 가진 마력 탓이다.

드보롱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심하십시오. 정신을 침범당할 수도 있습니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장난이다. 나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곤 말했다.

“확실히, 정령왕이 있을 법한 장소와는 거리가 멀군.”

“……제 앞에서는 몰라도 정령왕께 그런 말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역풍을 맞으니 드보롱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만큼 어둠의 정령왕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는 방증이다. 팔짝 뛰거나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상호 간의 예의는 어디서나 필요한 법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드보롱이 화제를 전환했다.

“포인트는 많이 모으셨습니까? 최근 마족들의 평균 포인트가 급증했다고 들었습니다.”

“적당히 모았다. 그런데 평균 포인트는 얼마나 되지?”

직접적인 수치를 언급할 수는 없었다. 천만이 넘어가는 포인트는 나만의 무기이며 히든카드다. 아무리 동업 관계에 있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이상 숨기는 게 이상적이다.

드보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답했다.

“대충 85만쯤 되더군요. 아아, 저희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평균 포인트가 거의 백만에 근접해서 올해엔 최상급 마수 한 마리를 구해 볼까 고민을 했지 뭡니까.”

정령들은 마족들이 가진 평균 포인트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평균치가 100만에 근접하거든 최상급 마수를 잡아들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3년 차.

최상급 마수의 출현 시기도 무척이나 빠른 편이었다.

절로 궁금증이 들어서 물었다.

“점찍어 둔 마수가 있나?”

“워낙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후보는 몇 있습니다. 최근 나이 든 티탄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더군요. 고래형 마수인 굴핀도 발견했습니다. 후보로 보는 것과 잡아들이는 건 또 별개이긴 합니다만…….”

드보롱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했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최상급 마수를 잡아들이는 비법이 있다면 거래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생각은 해 보지.”

서로의 관계가 형성된 지금, 대놓고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간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신과 엮여 최상급 마수를 구했다는 말을 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제발 그 생각이 긍정적인 방향이길 바랍니다.”

드보롱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윽고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의 중심부에는 초가집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수수하군.”

“정령왕께선 사치를 싫어하시는 분이시지요.”

말도 안 된다. 마계 옥션이 열리는 성만 하더라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크기다. 직접 대면한 적이 없어서 정령왕의 성향을 알지는 못하지만 수수라는 단어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드보롱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부탁드리건대, 거절하지 마십시오.”

* * *

드보롱의 안내는 입구까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검은색의 망토를 걸친 장신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열 개의 손가락에 모두 반지를 착용했으며 몸 전체에 온갖 장신구가 넘쳐 났다.

이게 어딜 봐서 수수란 말인지.

찬란하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다.

“반갑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순간 어둠의 정령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반갑다? 푸하! 보자마자 한 방 먹었구나!”

거들먹거리는 자태. 누가 봐도 호들갑 떤다는 인상을 가져다주지만 이는 겉모습뿐이다. 나는 정령왕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심안을 열었다.

[‘심안(Ex U)’이 ‘그림자의 눈(Ex U)’에 간파 당했습니다. 공격률 60%]

[높은 마력 보정(96)! 하지만 상대의 지능이 더욱 높습니다. 공격률이 54%에 달합니다. 상대의 특정 정보가 비공개로 전환됩니다.]

이름: 아도니스

직업: 어둠의 정령왕

칭호 :

* 어둠의 정령왕(Epic, 힘마력+6)

* 전율을 일으키는 지배자(Epic, 마력+10)

* 그림자의 배후(Ex U, 힘+8)

* 멸시하는 자(Ex U, 체력+8)

능력치 :

힘 100(+14) 지능 100

민첩 100 체력 100(+8) 마력 100(+16)

잠재력(500+38/???)

특이 사항: ???

스킬: 전율(???), 그림자의 눈(Ex U), ???, ???

아도니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내 무엇을 본거지?”

“장신구가 좋아 보여서 본 것뿐이다.”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하지만 속은 겉과 달랐다.

‘대단하군.’

능력치 총합이 538이다. 이미 초월자 자체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한계 돌파’는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포인트에 집착하는 원인이 한계 돌파 때문인 듯싶었다. 강해지는 데 한계를 느끼고 강제로라도 뚫어 볼 작정으로 말이다.

물음표 표시가 된 것도 많았다. 마계에 있을 당시 대공들의 능력치도 이와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니 새삼 감탄이 나오고 자극이 되었다.

“흐음, 정말 알 수 없는 놈이구나.”

“나를 부른 용건을 듣고 싶군.”

편안히 담소나 나눌 생각은 없었다. 아도니스가 턱을 괴었다.

“그 전에 묻고 싶다. 네놈은 자신을 어찌 생각하느냐?”

“마왕.”

마왕은 아니지만 내가 아니면 누구도 마왕이 될 수 없다. 그 각오로, 그 확신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는지라 아도니스마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대단한 포부다. 그런 의미에서 랜달프 브뤼시엘, 너는 나와 닮은 점이 많다.”

“정령계라도 먹을 작정인가?”

“바로 그렇다. 내 자신이 진정한 정령왕, 더 나아가 정령신이 될 작정이지. 그러기 위해선 주변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고 말이야.”

알고 있는 사안이다. 색다를 것도 없는지라 별거 아닌 듯이 넘어갔다. 내가 무덤덤하게 앉아만 있자 아도니스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보통은 궁금해서 물어볼 텐데 랜달프 브뤼시엘, 너는 그렇지가 않구나.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변함없는 태도이질 않느냐.”

“궁금하지 않은 건 손대지 않는 성격이다.”

“시원한 성격이군. 흐음…… 좋다. 내가 너의 생각을 물은 건 별 게 아니다. 지향점이 높으면 이야기가 더욱 편해질 거라 판단해서이지. 그런고로 묻겠다. 랜달프 브뤼시엘, 나와 계약을 하지 않겠느냐?”

정령의 계약.

이게 본론이었다.

드보롱이 한 부탁, 거절하지 말라는 것은 이걸 뜻했다.

마계 옥션을 주관하는 어둠의 정령은 계약이 금기시 되어 있다. 누군가를 편애하는 순간 형평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은 꼼수에 도가 텄다. 시스템의 눈을 피해 계약을 하는 방법 정도는 연구를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말을 꺼낸 게 어둠의 정령왕이라는 점.

“이유는? 그런 리스크를 질 필요가 있나?”

“주변의 변화가 무척 빠르다. 랜달프 브뤼시엘, 너도 느끼고 있겠지. 적들은 많고 우리는 적다. 허나 계약으로 얽혀 서로가 돕는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지지.”

변화를 받아들이고 한층 도약하기 위한 포석. 언뜻 들으면 별 이상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이 계약은 오로지 내게 유리하다.

내가 정령왕을 돕는다고 그가 얻을 이득은 크지 않았다.

그런 계약을 어둠의 정령왕이 가지고 왔다…… 노림수가 있다는 거다.

더불어서 아도니스는 탐욕적인 놈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정령의 계약. 서로의 역량을 공유하는 행위. 그저 옆에서 돕는 것만으로도 마족들을 견제하기엔 충분할 터인데. 계약을 꺼내 들었다면 내게서 따로 얻을 게 있다고 판단한 건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계약을 함으로써 내게서 얻을 수 있는 것.

내가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계약으로 얽매려는 이유.

‘나를 파악했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군.’

아니라면 계약을 꺼내 들 필요가 없었다.

압도적인 포인트, 던전의 상황, 나의 성장 속도, 나만이 알고 있는 수많은 정보, 전부는 아닐 것이고…… 어디까지 파악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중 한두 개라도 알아차렸다면 나라는 존재를 아주 꽁꽁 얽매고 싶을 것이었다.

단순히 옆에서 돕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고 싶겠지.

“거절한다.”

득보다 실이 많다. 단언하며 말하자 아도니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왜냐? 마계 옥션의 물건도 선점할 기회를 주마. 던전에 필요한 알짜배기 정보도 몇 알고 있다. 그리고 네가 성장하여 나를 돕는다면 우리는 각자의 길에서 최고가 될 수 있거늘!”

역정을 낸다.

하지만 입장이 반대였다.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타악!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때렸다.

“하! 내가 멍청해 보이나? 아니면 듣기에 좋은 이야기로 구슬릴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내가 만만해 보였던가!”

아쉬운 건 아도니스지 내가 아니었다.

이미 2년간 다른 마족과 비교하여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포인트를 사용한 나였다. 어디까지나 나는 VIP의 고객이었고, 최고의 바람잡이였다. 나를 마계 옥션에서 제외시킬 수도 없거니와 핍박하지도 못한다.

아도니스가 바라는 건 정령계의 정복. 보다 많은 포인트를 모으려면 나라는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반대로 나는 정령왕 본인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드보롱에게 나에 대한 것을 전해 들었을 텐데도 이런 만행을 보인 건 그가 본래 왕의 자리에 있어서다. 입장의 차이라는 걸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었다.

아도니스의 굳은 표정이 풀렸다.

드디어 그 미묘한 차이를 깨달은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