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03화
‘어찌 나올 테냐.’
적잖이 궁금했다.
깨달은 것과 행동으로 보이는 건 전혀 다르다. 과연 아도니스는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고자 있는 그대로 사과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나선 일을 꼬투리 잡아 화를 낼까.
찰나와 같은 시간이 흐르고 아도니스가 입을 열었다.
“흠, 사과하지. 내가 너무 앞서 나갔군.”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은 아도니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거들먹거리는 기색은 많이 사라졌으나…… 놀랐다.
이처럼 쉽게 인정하다니.
보통 저만한 자리에 있는 이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마련이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랬다.
대개의 대공들, 특히 우파는 그런 성향이 강했다.
역시 어둠의 정령왕이라고 해야 할까? 우파 따위와 비교하면 미안해질 수준이다.
나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어둠의 정령왕인 아도니스가 체면을 접고 먼저 사과를 했으니 나도 강경한 태도를 유지할 순 없었다.
“정령왕. 비록 그대가 나를 도왔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우리는 초면이 아닌가? 기본적인 예의조차 상실한 것은 다른 마족들로도 족하다.”
“……그렇지. 상호 간의 예의,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무척 중요하지. 랜달프 브뤼시엘, 너는 재수 없는 다른 마족과는 달라. 그래서 내가 너를 점찍어 본 것이야.”
음음, 침음을 내뱉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아도니스는 일견 만족스러워 보였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차 깨달은 듯한 태도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 이름은 아도니스. 어둠의 정령들을 다스리는 어둠의 정령왕이다.”
내민 손을 맞잡으며 나도 답해 주었다.
“랜달프 브뤼시엘. 지난번 세계수는 고맙게 받았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설마 마족과 이런 교환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느니라.”
아도니스가 연방 호탕하게 웃음을 흘렸다.
손을 떼고 작게 미소 지었다.
“오는 말이 고우면 가는 말도 곱다는 말이 있지. 아도니스, 처음 그대가 내게 호의를 보였듯 나도 그다지 그대를 적대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렇지. 실로 바른 말이다. 너와는 상당히 죽이 잘 맞을 듯하구나. 이 정도의 자에게 대뜸 계약을 하자는 말을 꺼냈으니 이는 분명히 내 실책이다.”
순간 방 안에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잘못 꿰인 단추를 다시 제대로 끼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윽고 아도니스가 웃음기를 유지한 채 말했다.
“하지만 랜달프 브뤼시엘. 내가 건넨 계약의 이야기도 썩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령의 계약이라는 것은 왕인 나에게조차 어느 정도 강제력을 발휘하지. 또한 정령계에서 너를 무시할 수 있는 이가 사라질 것이다. 감히 내 권위에 도전하려는 정령은 없으니 말이다.”
“남의 권위에 기대는 건 내키지 않군.”
“그러리라 보았다. 그러나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뿐만 인가? 정령계로의 출입도 보다 자유로워질 터인즉. 아무도 가지는 게 불가능했던 정령계의 보물들, 특이한 정령들을 독차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정령계의 출입.
확실한 변수다.
억지로 균열을 열 필요가 없다면 내킬 때 정령계를 오갈 수 있었다. 물론 마족의 특성상 다른 정령과 계약을 하는 건 무척이나 힘들 테지만 적어도 남들이 모르는 ‘길’ 하나에 발을 들이는 셈이 된다.
하지만…….
“계약이란 서로에게 득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들어 보면 내게만 유리한 것 같군.”
“랜달프 브뤼시엘, 너의 성장은 나로서도 바라는 바다. 그리고 계약 관계를 맺어 서로가 동등해질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너는 마왕이 되고, 내가 정령계를 주름잡게 된다면 이야말로 무적의 조합이 아니냐. 어느 누구도 우리를 건들지 못하리라!”
아도니스는 거칠게 콧김을 뿜었다.
결국 본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장밋빛 미래만 야기하며 나를 쥐고 흔들려는 것.
나에 대해 얼마나 파악했는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계약은 쌍방이 서로 평등할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던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건 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고객’의 위치에서 내려와 동등한 입장에서 판별하면 더욱 많은 열쇠를 쥐고 있는 게 아도니스인 탓이다.
나는 아쉬움이 생기고, 아도니스는 애당초 아쉬울 게 없었다.
마계 옥션에서 물건을 파는 건 본래 그의 소관이다. 누가 사던 팔리기만 하면 된다. 그게 단지 내가 될 뿐이다. 정보도 몇 가지 대수롭지 않은 걸 넘겨주며 생색을 내는 게 가능하다.
반면 포인트를 사용해서 우위를 점하는 건 내가 ‘고객’이기 때문이다. 계약으로 얽히면 이 입장의 우위가 사라지니…….
당연히 허울뿐인 평등이 된다.
무시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나 그게 가능하지 계약은 엄연히 쌍방의 합의로 이뤄지기에 서로가 만족할 대가를 내놓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기엔 쉽지 않은 사안 같군.”
운을 뗐다.
장점도 있지만 현시점에선 단점이 더 크다.
적어도, 포인트 외에 내가 우위에 설 만한, 아도니스가 바라는 무언가를 손에 넣기 전까지 이 계약은 유보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은 내가 가진 열쇠가 아도니스보다 적었다.
“하면 다음 마계 옥션에서 그 대답을 듣자. 어떠냐?”
아도니스가 말했다.
반년이 조금 더 남은 시간.
과연 그 안에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부족하다.’
반년 가지고는 턱도 없다.
“아도니스, 무엇이 그대를 조급하게 만드는 거지?”
“말했지 않느냐. 주변의 변화가 너무나도 빠르다. 그에 맞춰 나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다른 정령왕들의 움직임 때문인가?”
“그래, 그리고 천계 또한……. 마족들도 무사하진 못한다. 그러니 그 전에 우리 둘이 연합하여 힘을 쌓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아도니스가 입을 닫았다.
다른 정령왕들과 천계의 움직임.
엄연히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아도니스의 입장에선 조급해질 만하다. 이제 고작 3년이 안 되었으니 준비가 너무나도 부족한 탓이다. 그들이 아도니스의 행위를 포착하고 공격한다면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뭐라도 하나 확실하게 붙잡고 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했다.
성장성이 큰 나를 옭아매 자신의 취향껏 사용할 생각이겠지. 어쩌면 나를 앞세워 방패막이로 사용할 작정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앞선 판단일 수도 있지만 변수는 최대한 파악해 두는 게 좋다. 특히 최악의 경우는 후자였다.
생각해 보면 홀로 중립이며 그런 주제에 적당히 세력이 있는 나만큼 써먹기 좋은 패가 없었다.
“아도니스, 그렇기에 더더욱 서로가 신중해질 필요가 있지 않겠나. 솔직히 나 혼자 모든 대공들을 상대하는 건 벅찬 일이다. 그대의 조력이 있다면 확실히 든든하긴 할 테지. 하지만 공고한 신뢰를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서로가 등을 맞대고 싸울 그날……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누구이던 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도니스의 눈을 주시했다.
나는 마왕이 될 셈이었고, 상식적으로 나 혼자 모든 대공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회귀라는 히든카드를 뽑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것을 아도니스는 모른다. 당연히 자신밖에 도울 이가 없다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고 판단할 것이었다.
“허…… 랜달프 브뤼시엘. 너는 진정 마족 같지가 않구나. 거기다가 오만인지, 진실인지 모를 자신감마저 보이지 않더냐. 내 등 뒤로 서려면 그저 그런 수준으로는 턱도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천만.”
“천만?”
“지금 내가 가진 포인트의 총합이다.”
“……마계 옥션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거늘. 정말이더냐?”
심지어 2차 마계 옥션에서도 수백만의 포인트를 사용했다.
아도니스의 반응을 보며 그가 나에 대해 파악한 범위가 완전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겉핥기식. 그것만 가지고도 나를 탐냈다는 뜻이다. 한계를 깨 줬으니 더욱 군침을 흘리며 신중히 대처하려 들 것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거짓이라면 다음 마계 옥션에서 즉시 들통 날 일 아닌가?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말인즉, 다음 마계 옥션에서 천만 포인트 이상을 사용하겠다는 의미냐?”
“물론 그만한 물건을 준비해 놔야겠지.”
아도니스의 이맛살이 살짝 구겨졌다.
고민에 휩싸인 얼굴.
그러나 곧 결정을 내렸다.
“좋다. 그만한 저력, 당장 내가 도울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시간을 두고 서로의 관계가 정립되거든 그때 다시 계약의 이야기를 하겠다. 서로의 등을 맞댈 수 있는 그날 말이다.”
아도니스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양해해 줘서 고맙군.”
“아니다. 실로 타당한 의견이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그보다 이런 자리에 술과 미녀를 빼놓을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친구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친구라! 푸하! 그래, 친구의 호의는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친구!
아도니스가 최초로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큰 의미는 없지만 호의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을 뜻했다.
쿵!
아도니스가 탁자를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드보롱! 준비한 술과 여자들을 들이라!”
작은 연회가 열렸다.
상 위에 갖은 술과 과일이 널리고, 수십의 미녀들이 줄지어 정렬했다.
“받아라. 한 상자의 금은보화를 내놔도 한 잔조차 주지 않을 진귀한 술이다!”
아도니스는 만신창이였다. 전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술과 여자에 취해 방탕한 기질을 그대로 엿보였다.
하지만…… 그 중간, 중간 나를 살피는 눈빛은 결코 죽어 있지 않았다. 더욱 나라는 존재를 파악하고자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받은 술을 단번에 비운 뒤 감탄을 내뱉었다.
“굉장한 술이로군.”
“푸하! 말했지 않느냐! 오늘 같이 특별한 날에만 나오는 술이니 영광으로 알라!”
“술은 즐기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런 술이라면 날마다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술만 즐기려 하느냐? 옆에서 느껴지는 나긋나긋한 손길들을 죄다 거부한 채? 아니면 데려온 녀석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냐!”
“본래 맛있는 것은 마지막에 먹어야 더욱 달콤하지.”
나는 근처의 여자 중 서큐버스 하나를 품에 안았다. 술과 여자. 아주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싫지도 않다. 준다면 받는 게 인지상정.
그리고 여기선 조금 망가져 줄 필요가 있었다.
술잔을 기울여 가슴골에 천천히 술을 부었다.
그리고 서큐버스의 귓불을 잘게 씹었다.
* * *
연회가 끝난 뒤 서큐버스가 챙겨 주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 앞, 드보롱이 우뚝 선 채 대기하던 중이었다.
“연회는 즐거우셨습니까?”
“더할 나위 없더군.”
“다행입니다. 제가 드린 부탁도 문제없이 넘어간 모양이군요.”
“애당초 그대들과 나는 서로가 돕는 관계이지 않은가. 거부할 필요는 없겠지.”
적당히 진심을 담아 말했다.
드보롱이 미소 지으며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처음 소환된 장소로 들어섰다. 아직도 남은 균열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균열 안으로 들어서자 드보롱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랜달프 브뤼시엘 님. 다음 마계 옥션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