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04화
던전의 18층.
산간 지대이며 샤벨 타이거가 주를 이루는 장소.
600마리 이상의 샤벨 타이거가 있었지만 모두 한데 뭉쳐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엄연한 서열이 있으며 무리의 구성도 달랐다.
대략 50마리가 한 무리를 형성했고, 영역을 갈라 서로 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최강이라 평가받는 샤벨 타이거의 우두머리.
무려 100마리를 이끄는 샤벨 타이거가 짝짓기에 성공했다.
씨를 여럿 뿌렸지만 이상하게 출산이 되지 않았는데, 꼬리가 매력적인 암컷과 짝짓기를 하고 드디어 새끼를 밴 것이다.
3개월의 임신 끝에 태어난 새끼는 한 마리. 무척이나 건강했다.
문제는…… 새끼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
평범한 샤벨 타이거는 갈색의 멋진 갈기를 가져야 정상이건만 이 녀석은 하얗다. 전신이 하얘서 유별나게 눈에 띄었다.
샤벨 타이거는 민첩함과 그림자 속에서 적을 낚아채는 은신성으로 높게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하얘서는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우두머리는 결심했다.
어렵게 낳은 고작 한 마리의 새끼였고, 자신을 이어 이 무리를 이끌어 나가야 할 존재였다. 다른 수컷에게 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모질게, 엄격하게, 간혹 이 던전의 주인이 넣어 주는 오크 무리를 사냥토록 하며 기술을 늘렸다. 새끼는 잘 따라 줬다.
그리고 몇 개월이 더 지나자 우두머리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았다.
이놈은 일반적인 샤벨 타이거와 궤를 달리한다.
진정한 샤벨 타이거의 왕이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왕은 너무나도 특출 났다.
던전의 주인에게마저 반기를 들 정도였으니.
하얀 샤벨 타이거. 통칭 흰색.
태어난 지 고작 수개월 만에 웬만한 성체만 한 크기로 자라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벌써 수십 마리의 샤벨 타이거가 따르도록 만들어 자신만의 무리를 구축했다. 그중에는 이제 막 태어난 신출내기들이 많았다.
흰색이 태어나며 번식률이 크게 늘었다. 그 시기에 나타난 숫자만 무려 300에 달했다.
당연히 성장하며 서열 싸움이 본격화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치열한 전장에서 가장 특출 난 성적을 보인 것이 흰색이었다.
하지만…… 흰색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인 양 자연스럽기만 하였다. 도리어 불만은 따로 있었다.
먼저, 지능이 높았다. 다른 놈들은 죄다 머저리라고 느껴질 정도로 수준의 차이가 났다. 훨씬 민첩했고 힘도 강했다. 지금도 성체 다섯 마리는 달려들어야 겨우 맞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차이는 커질 터였다.
이 층을 지배하는 건 일도 아니다. 오히려 하얀색의 샤벨 타이거는 이 층이 너무나도 비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비좁다.
층을 벗어나 활개 치고 싶다.
그러나 어른들은 말린다. 그래선 안 된다며. 던전의 주인을 거역할 순 없다며. 그 앞에 서게 되거든 거의 본능적으로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
자신은 왕이다. 자유의 상징이다. 누군가가 억압할 순 없었다.
크롸아앙!
흰색이 울부짖었다.
자신의 무리에 속한 이들이 모였다.
그렇다면 우선 이곳을 접수한다. 진정한 샤벨 타이거의 왕이 되어 층을 이탈하겠다.
그 뒤 다른 곳을 지배해 더욱 세력을 넓혀 던전의 주인마저 넘어서겠다.
하얀색의 샤벨 타이거가 이곳의 진정한 왕이 되겠노라 선포했다.
무리의 숫자가 점점 늘었다.
흰색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모든 무리를 굴종시켰다.
그렇게 절반에 달하는 숫자를 손에 넣었을 무렵.
부딪혔다.
자신과 똑같이 유별난 존재.
까만 놈!
까만 샤벨 타이거라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특이체와 말이다.
놈은 완전 반대편에서 세력을 늘렸으며 어느덧 비슷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또한 녀석은 강하다.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왕은 둘이 있을 수 없다.
서로 부딪치는 건 필연.
우두머리끼리 싸우기를 청하며 날카로운 이빨을 박았다.
서로의 몸에 피가 낭자할 때까지 싸웠으며 그 결과, 흰색이 승리했다.
까만 샤벨 타이거는 패배를 선언했다. 흰색은 단번에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리는 없었다.
하얀색의 샤벨 타이거는 이 층이 아니라 이 던전 자체의 왕이 되겠노라고 다짐하며 대거의 무리와 함께 층을 올랐다.
한 층을 오르자 다크 베어가 나타났다.
숫자 자체가 많지 않았기에 이들을 물리치고 영역을 넓히는 건 간단했다. 그러나 20층은 바다였다. 흰색은 고민하다가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래층에서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을 구해 보자고 판단한 것이다.
내려가는 족족 적들을 약탈하고 굴복시키며 15층에 도달했다.
이곳은 특이하게 다크 엘프가 있는 장소였다.
흰색은 만족스러웠다. 이들이라면 바다를 건널 방법을 알려 줄 것이다.
하지만 흰색은 타협을 몰랐다. 자신의 무리에 속하지 않은 짐승은 모두 적이다. 억지로 그 방법을 내뱉게 만드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이윽고 다크 엘프의 무리와 부딪치게 되었다.
“하필이면 요정님이 쓰러지시고 던전 마스터께서 매우 바쁘신 지금…….”
가장 선두에 선 다크 엘프.
암컷이다. 다른 다크 엘프와는 전혀 다른 채취를 흩뿌리는, 동시에 처음으로 느껴 보는 압박감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크르르!
항복해라.
“어떻게 18층을 빠져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이상 증식의 영향인 모양이군요. 어쩔 수 없지요. 예로부터 버릇없는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라고 배웠습니다.”
“여왕님,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장로님. 저 백치호와 흑치호는 일반적인 샤벨 타이거와는 전혀 다른 강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직 성체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여기선…… 미안하지만 제가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차륵. 차르륵.
크리슬리가 지팡이를 쥐자 용아병들이 걸어 나왔다.
“이럴 때 나의 던전 마스터께선 어찌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지요?”
크르아앙!
감히 내 앞에서 긴장을 풀어?
흰색은 사납게 울부짖었지만 줄리엄은 여유로운 얼굴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주제를 알라. 라고 말이지요.”
* * *
최상층.
던전 코어 앞에서 나는 팔짱을 낀 채 이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히는 축 늘어져 있었다. 시체처럼 힘없이 쓰러져선 가냘픈 숨을 이어 나갔다. 영체인 요정은 굳이 숨을 쉴 필요가 없고 그 ‘형태’를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저 숨이 멈추거든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히가 이히일 수 있도록 만드는 자아. 그것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으으으…….”
이히는 몸을 잘게 떨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이히의 이마를 덮었다.
그제야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이상 증식. 던전의 생태계가 망가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던전 코어와 이히에게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정령계에 다녀오고 며칠이 지난 시점이었다.
번식률이 갑자기 팽창하여 마력의 흐름에 지장이 생겼다.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기며 넘어간 게 실수다.
이히가 고통을 호소할 때 빠르게 대처를 해야만 했다.
나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마스터, 이히가 조금 아픈 거 같아요.
-…….
-막 어지럽고요, 몸이 으슬으슬 떨려요. 감긴가? 아! 아니면 이게 바로 사랑?
-…….
-히잉, 진짜 아픈데. 이히는 이제 날아다니기도 귀찮아요. 마스터 어깨 위에 누울래요.
징조는 분명히 있었다.
농담으로 여기지 말고 조사를 했다면 조금은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탓에 작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이상 번식. 이전과 비교하여 무려 500% 이상이 늘었다. 던전 코어는 던전 내 마수들의 마력에도 간섭을 하는데, 한도를 초과해 버린 것이다.
천천히 늘어났다면 그 숫자가 몇이던 상관이 없다. 한 번 마력 조정을 해 놓으면 이후부터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조정이라는 것도 마수들이 던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전부였으니까.
‘원인은 짐작이 간다. 근원의 나무겠지.’
맞다. 번식률에 크게 관여할 수 있는 존재는 근원의 나무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와 같은 폭주를 일으킨 것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축복을 풀어도 이상 증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풍요의 여신상의 축복이 계속되고 있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여 축복을 멈춘 채 나아지길 기다렸건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건 없었다. 도리어 번식률이 계속해서 증가했다.
“마스터…….”
이히가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으득! 작게 이를 갈았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이히는 내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독불장군이던 전생에서조차 나를 위해 헌신한 이를 어찌 내버릴 수 있겠는가.
이히가 내 앞을 막아서지 않는 이상 내가 이히를 버릴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크리슬리인가.”
몸을 돌리자 크리슬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무슨 일이지?”
“층을 이탈한 백치호와 흑치호가 15층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아아, 그 녀석들인가. 한데 층을 이탈해 15층을 습격했다?”
백치호와 흑치호의 탄생에 대해선 나도 아는 바였다. 모두 성장하거든 상급 5Lv, 4Lv이 되는 우수한 특이체인 것이다. 특히 백치호는 만물상점에서도 구할 수 없는 특수한 마수였다.
그런데 층을 이탈해 15층을 습격했다? 던전 코어가 제대로 작동하는 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내가 허락한 존재 외에 층을 벗어나는 건 금기시되어 있을 것이었다.
의아해하며 묻자 크리슬리가 답했다.
“아무래도 이 역시 이상 증식에 따른 영향인 것 같습니다. 제압해 놓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이빨을 감추지 않더군요.”
“내가 가 봐야겠군.”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아주 급한 일은 아닙니다.”
크리슬리는 이히가 걱정된다는 듯 슬쩍 시선을 던전 코어 쪽으로 돌렸다.
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보러 가겠다.”
던전 내에서 코어의 영향을 벗어난 마수.
솔직히 궁금하긴 하였다. 심지어 층을 벗어나 다른 층을 습격할 생각까지 하다니. 필시 예삿일은 아니었고 평범한 놈도 아니었다.
15층. 근원의 나무 옆에 백치호와 흑치호가 묶여 있었다. 나머지 샤벨 타이거는 18층으로 다시 추방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사건의 주범인 이 두 놈은, 확실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크르르르!
크라아앙!
“흰둥이와 깜둥이로군.”
나는 가만히 시선을 내려 두 놈을 바라봤다.
백치호와 흑치호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 내재된 공포를 보았다.
던전 코어의 영향에서 벗어났대도, 나로부터 완전해질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내게 큰 반감이 있는 듯한데…….”
나의 던전에 자리 잡은 마수가 내게 반기를 든다. 어이가 없었지만 재밌기도 했다.
그때 백치호가 억지로 얼굴을 들어 나를 물려고 했다.
크롸앙!
“이제 알겠군. 그래, 한 산에 왕이 둘 있을 순 없지.”
피식 웃고 말았다.
녀석의 태도를 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18층을 지배한 걸로도 모자라 던전 자체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허나 어림도 없다.
이 던전의 주인은 나였다. 당연히 백치호의 주인도 내가 된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저 배은망덕한 놈을 제가 죽여도 될는지요?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크리슬리가 살짝 뿔이 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크리슬리를 막았다.
“왕이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왕인 내가 직접 알려 줘야 깨달을 것 같군.”
이어 분노를 꺼내 들며 말했다.
“주제를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