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05화
백치호는 쉽게 굽히지 않았다. 비록 이빨 한 번, 손톱 한 차례 스치지 못했지만 자신의 패배는 있을 수 없었다. 왕은 본래 그러한 법이니까. 그러나 상대는 강했다.
살이 발라지는 고통. 탈진하여 쓰러지자 다크 엘프 여인이 치료해 주었다.
몸을 충분히 움직일 수준이 되면 다시 싸웠다.
하지만 몇 번을 싸워도 마찬가지였다.
쓰러지면 치료해 주고, 치료를 받으면 던전의 주인은 검을 휘둘렀다.
그 과정을 열 차례 즈음 반복하자 백치호가 꼬리를 내렸다.
크르…….
잔인한 놈!
백치호는 울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설움이었다. 왕으로 태어나 무리를 이끈 자신이 이처럼 허무하게 깨질 줄은 상상도 하질 못한 것이다. 하물며 상대는 너무나도 잔인했다.
“크리슬리, 백치호를 치료해 주어라.”
만신창이로 바닥을 뒹구는 백치호를 가리키며 던전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다크 엘프 여인, 크리슬리가 조심히 의견을 개진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포션에 기대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목숨에 지장이…….”
“저 눈빛을 봐라. 저놈은 아직 매가 부족하다.”
크릉!
충분하다!
백치호가 구슬프게 읊조렸다. 최대한 적의를 없애고 꼬리를 낮게 내렸다.
“보아라. 뛰어들 자세를 잡았다. 아직 더 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냥 포기한 게 아닐 지요?”
이대로는 진짜로 죽겠다는 생각에 백치호는 자존심을 버렸다.
아예 배를 뒤집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내 방심을 유도할 작정인가? 어림도 없는 짓을 하는군.”
트집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약자는 백치호였다. 약자의 의견 따위가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결국 그로부터 다섯 번 더 사경을 헤맨 뒤에야 처절한 전투가 끝을 맺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에 불과했지만 백치호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하늘 위의 하늘, 진정한 왕이 있다는 것을!
자신은 왕이 아니었다.
왕이고 싶은 한 마리 짐승일 따름이었다.
검집에 검을 집어넣던 진짜 왕이 슬쩍 다시 검을 빼 드는 시늉을 했다.
끼이잉!
이제는 저 자세만 봐도 경기가 일어난다.
그를 본 던전의 주인이 말했다.
“사냥개로는 쓸 만하겠군.”
* * *
나는 백치호와 샤벨 타이거를 이용해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이상 증식을 일으키는 종을 최대한 적은 숫자로 유지시키는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선 보다 많은 사냥꾼, 그리고 사냥꾼을 통솔할 지휘자가 필요했다.
샤벨 타이거 역시 이상 증식 종의 하나였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떨어져 나가리라 보았다.
어찌 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는 작업. 그러나 던전의 유지, 생태계의 선순환을 위해선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부족하다.’
하지만 일의 진행 속도가 번식률을 따라가지 못했다.
중간에 업적 하나가 떠오르긴 했지만…….
[우수한 업적! 던전 마스터 스스로 아무런 의미 없이! 휘하의 마수 2,000마리를 학살했습니다.]
[200,000pt가 지급됩니다.]
[업적 점수 800점이 추가됩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자잘한 업적이 아니었다.
당장 던전이 유지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최고의 사냥꾼이라 일컬어지는 샤벨 타이거로도 부족하니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할 듯싶었다.
‘던전 코어의 여력이 남아 있을 때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야겠군.’
안에서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바깥으로 내보낼 수밖에.
결단을 하자 행동은 빨랐다.
이후 나는 7천에 다다르는 마수를 방생시켰다.
던전을 빠져나온 마수들이 마구잡이로 진격했다.
지휘하는 자도, 미리 내려온 명령도 없다. 거리낌 없이 주변의 모든 것을 포식할 수 있다는 의미. 더불어서 던전 밖을 감시하던 타 마족의 마수들도 자연스럽게 처리가 되었다.
마수들의 급도 가지각색이었다. 최하급에서부터 중급에 이르는 다수의 마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인간들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유은혜, 그리고 에드워드 윈저가 선봉에 섰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누나, 등 뒤는 나한테 맡겨요.”
둘의 콤비는 나날이 좋아졌다. 특히 유은혜의 경우 전투에 있어서 극성으로 변모했다. 마수만 보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에드워드도 마수에겐 좋지 않은 감정이 가득하니 중급의 마수조차 쉽사리 둘을 상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다른 길드의 각성자들도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인류의 적, 공통으로 분노할 상대!
쉴 새 없이 몰아붙인 탓에 적응하고 나아간 것이다.
그 옆에서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 김용우가 검을 크게 들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패배는 없습니다!”
‘그날’이 기점이었다.
영웅이 죽은 그날.
자신들을 대신해서 막아 줄 사람이 없어진 그때.
본격적으로 위협이 피부에 와닿자 그들은 변했다.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각성자는 이제 더 이상 바라만 보거나 도망만 다니는 존재가 아니었다.
* * *
다수의 마수를 방생했지만 나는 그게 임시방편일 뿐임을 알았다.
조금의 여유는 얻을 수 있을지언정 영원한 평안은 얻지 못한다.
같은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 나갈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말이다.
번식률은 꾸준히 늘어나기만 했다. 결코 줄어들질 않았다.
시간은 흘렀다. 내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이히는 아예 깨어나질 않았고, 던전 코어의 빛은 나날이 약해졌다.
‘근원의 나무.’
원인이 뭔지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지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허나…….
나는 분노를 뽑았다.
15층으로 향해 근원의 나무와 대치했다.
“던전 마스터시여,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분명히 해결할 다른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내 기세를 읽은 줄리엄이 무릎을 꿇은 채 간곡히 빌었다.
이 나무가 그들의 염원임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미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나 버렸다.
“줄리엄, 원인을 제거하면 뒤탈이 없다. 조금 더 빨리 결정해야 했는데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수욱!
파삭!
검을 휘둘렀다. 근원의 나무의 모퉁이가 잘려 나갔다. 그것을 본 줄리엄이 몸을 크게 떨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아……! 아니 됩니다! 제발, 제발 근원의 나무만은!”
“던전이 무너지면 이곳도, 이 나무도 없는 것과 같다. 막지 마라. 한 번 더 그러한 행동을 보인다면 둘을 함께 베어 버리겠다.”
구우우우우우-!
바로 그때였다. 근원의 나무가 비명과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가지를 넓게 펼쳐 자신을 방어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행위일 따름이다.
파사삭!
수백의 가지가 덧없이 잘려 나갔다. 다크 소드마저 발현한 상태. 잘려 나간 가지는 다시 자라지 못한다.
구우우우우!
“닥쳐라. 참을 만큼 참았다. 제아무리 특수한 존재래도 내게 방해된다면 필요치 않다.”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표정.
내가 검을 들자 줄리엄과 주변의 다크 엘프 모두가 아예 눈과 귀를 막았다. 더는 들을 수 없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근원의 나무는 그들의 꿈이다. 희망이다. 이 던전에서의 유일한 안식처다. 그것이 지금 무차별하게 잘려 나가고 있었다. 한데도 막지 못한다. 그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아예 숨통을 끊어 놓을 기세로 검을 정중앙에 박아 넣을 찰나.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찾아왔습니다.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이를요.”
던전을 나갔던 크리슬리가 급히 돌아왔다.
작은 인간 여자아이를 대동한 채로.
인간 여자아이.
이제 9살 정도나 되었을까?
던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
주변의 다크 엘프가 두려울 법도 하건만 의연하다.
한데 여자아이는 근원의 나무를 바라보더니 대뜸 눈물을 흘렸다.
“아아…….”
근원의 나무 근처로 다가간 여자아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근원의 나무를 작게 안으며 보듬기 시작하였다.
나는 여자아이가 각성자임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흐릿한 눈동자. 이지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역시 알아보았다.
“자폐아인가?”
“예, 하지만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건 확실합니다.”
크리슬리는 자신이 이번 일을 해결해 보이겠다며 던전을 나갔었다. 그게 2주일 전이다.
그렇다면 저게 해답이라는 뜻.
나는 심안을 열었다.
이름: 이사랑
직업: 용사(자연인)
칭호 :
* 자연을 위로하는 자(Ex U, 마력+8)
능력치 :
힘 21 지능 3
민첩 15 체력 18 마력 55(+8)
잠재력(114+8/425)
특이 사항: 지능이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자연과 더욱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스킬: 위로(Ex U), 자연 동화(R), 자연 소통(U)
익숙한 이름, 익숙한 스킬, 아주 높은 잠재력.
‘자애의 여왕.’
유은혜가 전생에서 ‘번개의 여왕’으로 이름이 드높았다면 눈앞의 이사랑 또한 다른 의미로 매우 유명했다. 후반기, 지구가 멸망으로 몰아넣어지고 식량이 매우 부족해지자 인간은 인간을 먹었다. 각성자들도 서로가 쉬이 믿지 못할 그 시기에 나타난 게 이사랑이다.
그녀는 강력한 자연 동화 스킬로 죽어 버린 땅을 살아나게 만들었다. 식물들이 뿌리를 박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식량 문제가 해결되자 각성자들은 뭉쳤고, 결국 마족들과 제대로 한판 벌일 수 있는 여력을 쌓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사랑에게 붙은 이름이 ‘자애의 여왕’이다.
거리낌 없이, 평등하게 사랑을 전파해 인간들 모두가 우러러봤다.
한국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느닷없이 나타나고 사라진 인물이라 솔직히 별 기대는 없었는데,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맞닥트리게 된 것이다.
‘자연과의 소통이라…….’
확실히 이사랑의 움직임은 범상치 않았다.
던전에서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로지 근원의 나무만 신경을 쓴다.
게다가 이사랑이 보듬자 근원의 나무도 비명 소리를 없앴다.
“하지만 자폐아라면 대화가 어려울 텐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자연과 대화가 가능하대도 그뿐이라는 게 걸린다.
크리슬리도 그 부분에 있어선 난색을 표했다.
“해결의 열쇠임은 틀림없는 듯싶습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아! 아!”
크리슬리가 말을 하던 도중이었다.
이사랑이 한 손으로 나무를 보듬고 자신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무언가 답답한 듯이.
“……일주일을 주겠다. 저 아이의 행동을 분석하고 나무가 폭주를 멈출 방법을 강구하라.”
“감사합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실망하시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슬리가 고개를 숙였고 그 옆에서 줄리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륵!
검을 집어넣었다.
이후 몸을 돌려 최상층으로 올랐다.
* * *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이히를 한 손에 쥔 채 근원의 나무 앞에 서 있었다.
내 왼편에 선 크리슬리가 점잖게 말했다.
“근원의 나무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게 없어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그게 이히다?”
“정확히는 근원의 정령입니다. 타쉬말이 증언해 주었습니다.”
타쉬말도 함께하고 있었다.
“맞다. 나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 근원의 나무와 근원의 정령은 서로가 한 쌍을 이룬다. 아직 어려서 없다고 여겼는데, 아예 처음부터 빠져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이히와 근원의 나무를 한 차례 번갈아 보았다.
“이히는 요정이다. 비슷하지만 정령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이지. 과연 대체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정령은 정령계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요정은 자연 속에서 오랜 시간 숙성하여 자아를 갖는다.
당연한 물음을 말하자 크리슬리가 답해 주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요정님은 매우 특별하십니다. 무려 던전 코어와 엮여 있지요. 그 방대한 마력으로 이어져 있는 겁니다. 근원의 나무를 제어할 힘은 충분할 겁니다.”
“좋다. 방법은?”
“인간 여자아이의 스킬 중 ‘동화’가 있습니다. 중간에서 여자아이가 매개체 역할을 해 준다면…….”
“아! 아!”
이사랑이 쪼르르 다가와 까치발을 세워 이히를 올려다봤다.
마치 자신에게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잘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살아 나가고 싶다면.”
위협하며 이히를 건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히는 영체지만 던전 코어의 권한을 내가 새로이 받았다. 그 권한으로 허락된 자에게 영체를 만질 기회를 주는 게 가능하다.
이사랑은 이히를 받아 들고 쪼르르 근원의 나무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서 눈을 감더니 곧 ‘자연 동화’ 스킬과 ‘자연 소통’ 스킬을 본능적으로 사용했다.
고오오-
근원의 나무가 작게 울었다. 공명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