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07화 (107/242)

던전 사냥꾼 107화

* * *

파간 그리울리.

대공 우파의 휘하 마족이며 공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

그 품성은 호전적이고 호쾌하다고 할 만하나, 그만큼 단순한 탓에 여러모로 손해를 보는 마족이었다. 당장 우파 본인이 마계 옥션의 출입을 위해 그를 버렸음에도 ‘대의를 위하여’ 같은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우직하단 말인가.

물론 마계 옥션의 출입을 거부당한 덕에 그만큼 던전의 투자를 늘릴 수 있긴 하였다. 그로 인해 업적 몇 개도 얻었고, 마수의 양이나 질적인 측면에선 크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그 부분에 있어선 선두권에 속했다.

문제는 여전히 살덩이다.

무한의 살덩이.

느린 데다가 움직이는 패턴도 단순했지만 체력이 우월했다. 수천의 마수로 때리고 파간 그리울리가 직접 나섰음에도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았다. 체력 높은 슬라임을 연상케 했으나 슬라임과는 비교도 안 될 크기와 맷집이었다.

두 달 정도를 내리 때린 결과 퇴치할 순 있었다. 24시간, 1초도 쉬지 않고 몰아붙인 결과다. 단순히 공격만 하는 게 이처럼 힘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입은 피해가 너무나도 컸다.

그나마 모았던 포인트도 모두 사용했다.

한데, 베리어마저 지키지 못하였다.

위험에 노출되자 파간 그리울리는 급해졌다. 다른 마족이 쳐들어오거든 막아낼 여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간의 공격이 시작됐다.

“이 같잖은 인간 놈들이!!”

파간 그리울리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던전의 외벽이 파괴되었습니다! 37층의 던전이 4층으로 축약됩니다. 공간이 겹쳐지며 671마리의 마수가 죽었습니다. 혼란에 빠진 마수들이 던전을 탈출하기 시작합니다.]

쿵! 쿠쿠쿵!

쉴 새 없이 던전이 흔들린다.

키익! 키에엑!

베리어가 사라지니 마력의 순환이 어그러지고 던전 코어의 권한도 약해졌다. 지능이 낮은 마수들이 던전을 빠져나가는 것조차 강제하질 못했다.

그를 바라보며 파간 그리울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작 인간 주제에……!”

약자들, 자신의 자비로움이 없었다면 진즉에 사라졌을 잡것들!

휘하의 강력한 마수를 내보내 인간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완전히 파괴시켰다. 수많은 마수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공작이었다. 평범한 인간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한 숫자의 마수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력은 죽였지만 다수의 각성자가 난입했다. 끊임없이 들이닥쳤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각성자 무리가 던전의 최상층을 향해 꾸역꾸역 전진하고 있었다.

이 역시 그저 각성자만 있었다면 괜찮다. 평범한 인간들이 무기를 들고 그들을 보조하자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졌다. 한국에서 군인들이 던전을 칠 때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베리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현대 문명의 이기는 던전 안에서 무용지물이겠지만…… 베리어가 사라진 지금, 살덩이가 과도하다 싶을 만큼 던전의 마력을 갈취해서 모든 게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약한 마수들은 각종 무기에 하릴 없이 죽어 나갔다.

강한 마수는 절대다수의 공격에 대처하지 못하고 죽거나 발을 뺐다.

파죽지세!

고작 며칠 만에 인간들은 2층에 발을 디뎠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3층, 그리고 자신이 있는 4층에까지 올라올 게 분명했다.

“다 죽여 버리겠다!”

끝내 파간 그리울리가 흉포한 이빨을 드러냈다.

* * *

“천천히 전진합니다. 군인들 보호하세요.”

세계 각지의 각성자들. 그중 선두를 달리는 건 한국의 천명회였다. 번역 마법이 걸린 장신구 따위를 착용했기에 소통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 뒤를 미국, 중국 등이 따랐다.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게 데빌 헌터 공격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던전. 뭉쳐야 산다. 그리고 뭉치려면 앞에서 지휘할 자가 필요했다. 암묵적인 동의 아래에 이런 정렬이 생긴 것이다.

물론 천명회의 지휘를 거부하고 나아간 각성자들도 많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곳곳에서 뛰쳐나간 각성자들의 비명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공격대장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사실 데빌 헌터 공격대는 그가 전부였잖아? 지금은 그저 그런 공격대에 불과해. 당연히 우리 중국이 앞서야 하는 거 아닌가?”

“맞아. 허울 뿐이 공격대가 우리를 지휘해? 웃기는 일이지!”

그리고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무시한 채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무리도 있었다. 특히 중국 쪽이 시끄러웠다. 잘하면 던전을 무너트릴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한국에 뺏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 흑사회가 준동한 것이다.

선두에 서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우는 것은 흑사회여야 했다.

“뭐……? 허울뿐인 공격대?”

유은혜가 발끈하며 나서려고 하자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인 김용우가 참다못해 나섰다.

“조용하십시오! 이미 던전 앞에서 정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거, 보기 좋지 않습니다. 이곳은 던전이고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괜한 시비를 일으키지 마세요.”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분열될 판이다. 모처럼 천명회가 기회를 얻었는데 여기서 종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천명회의 얼굴이던 데빌 헌터 공격대의 공대장이 죽은 뒤 시름이 많았던 김용우다. 그의 존재가 있었기에 길드 마스터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의 존재가 있었기에 보다 많은 일을 벌이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데빌 헌터의 공대장이 죽자마자 하이에나들처럼 주변에 꼬이는 이들이 생겨났다. 사사건건 실행하는 일에 시비를 걸었다. 외부에서의 압박도 강해졌다.

‘내가 부족해서이지.’

내심 씁쓸하게 웃었다.

김용우는 이제 강자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한 이들이 길드에 넘쳐 났다.

길드 마스터의 자리에 욕심이 생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강자 우대의 사회가 도래했다. 약자는 도태되었고…… 김용우는 겨우 버티고 있을 따름이다.

‘이번 기회를 잘 살려야 해. 그래야 천명회가, 내가 산다.’

그러나 그의 존재를 만회할 수 있다면 바로 지금뿐이다.

던전을 파괴하는 것!

그 일의 주도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면 이 일을 진행한 자신에게도 큰 힘이 생긴다. 잡음, 불미스러운 움직임, 모두 통제할 권한이 말이다.

실패하면?

상상도 하기 싫다.

어떻게든 자신을 끌어내리려 할 것이다.

자신의 세력을 조금이나마 일궈 놨고, 그나마 근래에 데빌 헌터 공격대가 7층 드워프 마을을 발견해 큰 성과를 이뤄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지만 이번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걸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흑사회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흥! 허수아비 길드 마스터가 입은 살았군.”

“……입 조심하십시오. 지금은 서로 트집 잡을 때가 아닙니다.”

“뭐야? 사실을 말한 게 트집이라고? 이거 무서워서 입도 뻥긋 못하겠군!”

하하하!

명백한 비웃음. 김용우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기서 화를 내는 건 밑바닥을 보이는 짓밖에 되지 않는다. 저들의 장단에 놀아 줄 수는 없었다.

“여기가 문화 광장인 줄 아나. 아니면 숫자가 너무 많아서 생명 감각이 사라진 건가? 하여간 이래서 떼놈들은…….”

하지만 한국의 다른 길드는 참지 않았다. 특히 미스릴 길드는 젊은 층으로 구성된 만큼 참을성이 부족했다.

일본과 미국 쪽은 조용했지만 은근히 그러한 시류에 편승했다. 중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흑사회의 대원들 모두가 웃음을 지웠다.

“말조심해라. 지금 한판 붙어 보자는 거냐?”

“어이구, 말로 안 되니 폭력으로 나서겠다, 이건가?”

걸음이 멈추고 길드와 길드가 대치했다.

“그만!”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김용우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가 도와도 부족할 판국에 나눠지려고만 하니…… 앞날이 깜깜했다.

고작 2층이건만 만약 이때 마수들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할 판국이다.

쿠르르릉!

쿵! 쿵!

그리고 안 좋은 예측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이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 켈베로스, 수십의 아이스 트롤…… 기타 수백 마리의 마수가 나타났다.

“감히 내 던전에 쳐들어오다니! 인간 잡종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라!

그 중심부에 파간 그리울리가 있었다.

* * *

전투는 격렬했다.

전황은 좋지 않았다.

각성자와 군인들이 많아서 일반 마수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었지만 시시각각 죽어 나가는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고작 수백의 마수 앞에서 수천의 각성자와 1만에 달하는 군인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비명, 비명, 그리고 또 비명.

하지만 마수들의 숫자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특히 한국 각성자들의 활약은 눈이 부셨다.

한국의 각성자들은 전체적으로 레벨이 높았고, 상급 마수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용하는 아이템의 질도 남달랐다. 유니크 등급의 무구를 착용한 각성자의 숫자도 제법 되었다. 하여 상급의 마수에게도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젠장! 저것도 던전의 주인인가?”

김용우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일반적인 마수라면 이쪽의 숫자가 많아서 상대하지 못할 건 없다.

그러나 한 명. 마수들을 진두지휘하는 존재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날카롭고 기다란 손톱, 늑대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이빨! 각성자와 군인들을 ‘학살’하며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전율이 일 정도다.

급이 다르다. 상대가 안 된다. 트윈 헤드 오우거도 힘들긴 마찬가지지만 저 수준은 아니다.

던전의 주인이라면 납득이 되는 강함이다. 하지만 여전히 상식을 벗어났다.

“크악!”

“정렬! 틈을 주면 안…… 아악!”

보이지 않았다. 잔상이 남았다. 눈 깜빡하면 어느새 지척에 닿아 있다.

“저놈을 죽여! 저놈만 죽이면 돼!”

눈치 빠른 각성자들은 저 막강한 존재가 이 던전의 ‘끝판 왕’임을 알아봤다.

하지만 알아본다고 끝일 리 만무하다.

몇몇 공격이 성공했지만 옷을 그을리는 수준에서 멈췄다. 반대로 놈의 손톱에 닿으면 종잇장처럼 모든 게 찢겨 나갔다.

‘어쩌지? 어떡하지?’

김용우도 공황 상태에 빠졌다. 반칙급의 강함이다. 저와 같은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고 각오를 하긴 했으나 막상 현실에 닥치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몇 명이 희생되어야 저 존재를 잡을 수 있을까?

천 명? 만 명?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던전 안에서 모두가 몰살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마수들을 모두 처리한대도 저 한 존재를 어찌할 수 없어서 말이다!

“악!”

“누나……!”

유은혜가 옆구리를 길게 관통당했다.

빠르게 전류를 흘려 살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찰나의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다.

에드워드가 상황을 알아차리고 검을 겨눴다.

하지만 몇 번 휘두른 게 전부다. 순식간에 심장 어림을 관통당한 에드워드가 바닥에 쓰러졌다.

“쿨럭!”

천명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두 명이 끝났다. 즉사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물론 그것도 시간문제이긴 했다.

“안 돼!”

김용우가 검을 뽑았다. 저 둘은 데빌 헌터 공격대의 주축이다. 자신을 받쳐 주는 힘이었다. 미래에는 천명회의 중심이 되리라고 장담하는 이들.

여기서 저런 반칙급의 존재 때문에 잃을 수는 없었다.

던전의 주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손톱을 펴서 쓰러진 둘의 목숨을 취하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직전.

콰르르릉!

던전 안에서, 용의 형상을 한 천둥이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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