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09화
천명회.
강남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명실상부 최고의 길드.
누구도 이견을 가지는 이가 없었다.
김용우의 눈이 짠해졌다. 공격대를 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 발을 디딜 때만 하더라도 온갖 걱정이 다 들었건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가, 그분이 돌아왔다.
이 한마디면 족하다.
“공대장님……!”
와락!
비행기에서 내려온 즉시 유은혜가 나를 끌어안았다.
지난 며칠간 조용하더니 한국 땅을 밟자 돌변한 것이다.
가만히 등을 쓸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궁금해하는 표정이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수많은 기자를 외면한 채 돌아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여태껏 침묵으로 일관했기에 말을 해 주었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길드 마스터, 돌아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조차 미리 손을 써서 기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조용히 돌아가 김용우와 함께 각본을 하나 짜볼 작정이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용우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본래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위엄 있는 척을 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다.
나도 개의치 않았다.
어깨를 으쓱하자 가만히 유은혜 뒤에 서 있던 에드워드 윈저가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한 번 더 누나를 울리면 내가 용서 안 할 거예요.”
“그동안 정이 많이 든 모양이군.”
“누나는 내 은인이에요. 내 목숨도 내줄 수 있어요.”
실질적으로 구해 준 건 나인데, 유은혜가 성심성의껏 간호를 한 탓일까?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반갑지 않나?”
“없는 것보단 나아요. 은혜 누나가 그래도 웃기 시작했으니까…….”
유은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에드워드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에드워드의 모든 시작과 끝이 유은혜인 듯싶었다.
‘평생 못 벗어나겠군.’
요컨대, 유은혜를 꽉 잡으면 에드워드는 나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 집착은 더욱 강해질 것이었다.
미래의 용사 10강 중 1인. 막상 데려오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건만 의외의 복병이었다. 성장 속도도 과연 나쁘지 않았고, 이대로 3년 정도가 더 흐르면 레벨 높은 상급의 마수와도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각오 단단히 하십시오. 이번 일로 세계가 북적북적해질 겁니다. 던전을 파괴한 건 최초의 일이니까요.”
김용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지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한 달은 쉴 겨를이 없겠군요.”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입니다. 일부러 기자도 다 물렸으니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세요.”
다른 대원들이 기지개를 쫙 펴고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 집이다! 침대다!”
“엄마가 끓여 주는 찌개 먹고 싶다.”
이어 전용 버스가 도착해 사람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유은혜는 껌 딱지마냥 달라붙어 있었고, 그 행동은 버스 안으로까지 이어졌다. 에드워드의 질투 서린 눈빛을 더욱 강해졌으며…… 겸사겸사 나도 제지하진 않았다.
하지만 강남에 들어선 다음에는 강제로 떼어 낼 수밖에 없었다.
“……아, 좀 안고 있으면 어때서!”
눈물을 닦은 유은혜가 항의했다.
“내일 보지.”
“흥, 글쎄요. 내일 또 없어지는 거 아니에요?”
워낙 자주 자리를 비워서 그런지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버스는 멈췄고, 김용우가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주변 대원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유은혜는 아랑곳 않았다.
“한동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확실하죠?”
“믿어라.”
“흐흥, 못 믿겠는데요. 손가락 걸로 약속해 주세요.”
“내일 보자.”
내밀어진 손가락을 무시하며 걸어 나갔다. 나를 본 김용우가 씁쓸히 웃었고, 내 뒤에서 유은혜가 크게 외쳤다.
“진짜 내일 와서 없으면 알아서 해요! 또 말없이 사라지기만 해 봐! 계급장 떼고 확 불살라 버릴 테니까!”
다음 날부터 길드 하우스의 주변에 인간의 벽이 생겨났다.
수많은 기자, 용사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시민들, 그리고 내 ‘부활’이 알려지며 모여든 다수의 각성자까지.
하지만 나는 얼굴을 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내 신상에 관해서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대외적인 일을 해결할 땐 항상 반쪽의 해골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고, 김용우도 보안에 상당히 신경을 쓴 덕분이다.
그렇다고 무시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던전에서 살아 돌아온 걸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이런 종류의 강렬한 궁금증은 누르면 누를수록 튀어나오는 법이었다.
나는 비공개로 공신력 있는 한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 내용이 담긴 테이프가 방송국에서 공개되며 한국은 다시금 큰 파란에 휩싸였다.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천명회 길드 소속 데빌 헌터 공격대의 공격대장 랜달프다.”
―랜달프 공대장님, 반갑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수개월 전 천사들이 출현하고 세계 각지의 마수들이 한국에 집결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랜달프 님께선 마수들을 막다가 큰 상처를 입고 던전에 끌려갔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입니까?
“맞다. 한 천사와 함께 던전 안으로 끌려갔다.”
―신기한 일이군요. 혹시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던전의 주인을 만났다.”
―예……?
“던전의 주인을 만났다.”
―혹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을 때 나타났던 귀가 긴 여인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 던전의 주인은 무척 호기심이 많았으며 나를 치료해 주었다.”
―직접 치료를 해 주었다고요?
“사실이다. 그녀는 강한 자가 최상층에 올라서 자신의 심심함을 달래 주길 바랐고, 그 적임자를 나로 보고 있었다. 아니었다면 그대로 방치해서 죽게 했을 테지.”
―기억이 납니다. 던전의 주인이 했던 말은 전국에 퍼져 나갔었죠. 그때에도 랜달프 공격대장님이 없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함께 들어간 천사는……?
“던전의 주인은 결코 선하지 않다. 천사를 악랄한 방법으로 타락하게 만들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장면에 나도 몸을 잘게 떨 정도였지.”
―천사의 타락이라니…… 허어. 믿기지가 않는군요. 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던전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던전의 주인이 허락을 했는지요?
“그렇다. 하지만 그것도 15층까지였다. 올라갈수록 강한 마수가 있었고, 지형이 변했다. 간혹 발견한 보물들을 가져올 순 없었지만 아래층과는 비교과 안 되게 강력한 아이템이 많았다. 최상층은 31층이라 하더군. 던전의 주인은 인간들의 일에 매우 관심이 있는 듯하였다.”
―잠깐만요. 들어 보면 던전의 주인이 충분히 마수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모두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놔두는 편이 각성자들의 성장에 더욱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아마도…… 머지않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점점 더 암담해지는군요. 대체 그녀는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요?
“강자, 그리고 다른 던전을 처리할 수 있는 자. 던전의 주인은 각성자들이 그 수준까지 성장하길 바란다. 그 이상은 모르겠다. 하지만 던전의 주인은 매우 엄격하다. 내게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경고를 했지. 이번과 같은 우연은 다신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 성장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지금도 일반 시민이 보기에 각성자들은 슈퍼맨과 다르지 않는데요.
“던전을 오르라. 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길은 그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던전 코어를 통해 강력한 무구를 만들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번 기회에 그것을 확인해 볼 생각이다.”
―아아, 사우디아라비아의 던전이 무너졌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천명회와 랜달프 공격대장님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런데 던전 코어는 금시초문이군요.
“던전을 유지시키는 마력 저장로인 것 같다. 그곳 던전의 주인을 죽인 뒤 다음 날 반파된 던전 코어를 회수했지만 그 기일이 짧아 아직 밝혀진 게 없다.”
―잠깐! 정말 사우디아라비아 쪽 던전의 주인을 죽인 겁니까?
“맞다. 물론 나 혼자서는 아니다.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한 명 때문에 천 가까운 각성자들이 죽어 나갔다.”
―예,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중국의 흑사회는 한 명도 살아가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중간에 이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각자 뜻이 달랐으니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능했다면 혹시 이곳 한국의 던전도…….
“그건 불가능하다. 한국 던전의 주인은 격이 다르다. 감히 검을 겨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던전마다 특색이 다르듯이 그곳의 주인들도 그런 듯싶다.”
―그래도 기념비적인 일입니다. 72개의 던전 중 하나를 줄였고, 우리 인류는 거기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모든 각성자가 빠르게 성장한다면 그들을 몰아내고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그들은 시련이다. 시련은 인간을 성장하게 만들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터뷰의 내용은 이게 전부였다.
5분 남짓. 하지만 그 파급력은 시간과 반비례했다.
워낙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데빌 헌터 공격대 공대장의 ‘부활’은 확실히 상징적이었으나 그것을 덮을 정도의 해일이 들이닥쳤다. 던전의 층, 천사의 타락,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것이며 던전 코어의 존재까지.
무엇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이 인터뷰는 세계 각지에 흘러들어 갔다. 동시에 세계의 거목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이 한국으로 향했다.
* * *
반파된 던전 코어.
백치호가 직접 부숴 버려 빛을 잃었지만 아직도 짙은 농도의 마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본래 있어야 할 요정도 자연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반파된 던전 코어를 최고의 대장장이 집단에 맡겼다. ‘블랙스미스’라 간판을 내건 대장장이 길드로, 드워프보단 못하지만 인간 중에선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공의 던전이라면 모를까, 공작이 머무는 던전의 던전 코어로 만들 수 있는 최고 등급의 무구라 봐야 익셉셔널 유니크 정도다. 차라리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게 낫다.’
여러 계산을 한 결과였다.
천명회, 특히 김용우에게 힘을 확실하게 실어 줄 수 있는 무기인 셈이다.
아직까지 인간 중 익셉셔널 유니크(Ex U) 등급 무기를 착용한 자는 없었다. 군침 흘리는 자들이 많을 것이고, 천문학적인 액수에 거래될 가능성이 높다. 그사이 간을 보며 시선을 외부로 돌려 버릴 것이었다.
“으으, 그러지 말고 나가요. 답답해서 못 살겠어요.”
유은혜가 축 늘어졌다.
지난 며칠 기자들의 공세에 시달린 탓이다.
그걸 못 참고 결국 길드 하우스 내에 틀어박혀 농성을 하는 중이었다.
나야 나가서 득이 될 게 없으니 그간 공격대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인간들의 돌아가는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떨어져라. 덥다.”
“에이, 공대장님도 좋으면서. 저한테 한 번 말이라도 걸어 보려는 짐승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 솔직해지자고요.”
유은혜는 내 옆에 철석같이 붙어 있었다.
살아 돌아온 뒤로 더욱 적극적이었다.
미래에 번개의 여왕이라 불릴 여인. 거기다가 에드워드 윈저까지 덤으로 껴 있으니 그저 담담하게 귀찮음을 감수해 주었다.
“맞다. 오늘 파티는 어떡하실래요? 정장 있어요?”
거대 길드들이 모이는 파티가 오늘 저녁에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간 몇 번 벌어진 것 같지만 내가 참여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퍼져 나가 모든 길드 마스터나 중요한 인물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유은혜가 참새처럼 조잘거렸다.
“이래 봬도 그동안 돈 많이 벌었거든요. 이참에 제가 한 벌 맞춰 줄게요. 어때요?”
“필요 없다.”
“에이~ 그러지 말고요. 가요, 네? 기자들 따돌리는 건 이동 스크롤 써서 가면 되니까요. 이전에 200미터쯤 이동하는 것으로 하나 꿍쳐 둔 게 있거든요!”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김용우가 들었다간 뒷목을 부여잡을 일이었다.
‘정장이라.’
하긴, 그동안 던전에 있어서 맞출 시간이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 시각.
길게 돌아 원정을 떠났던 마수들이 귀환했다.
백치호의 경우 던전을 빠져나간 게 처음이라 제법 지친 기색이었다.
그래도 전리품 하나를 물어 왔다.
특이한 생명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막대한 마력을 품은 괜찮은 놈이다.
주인도 매우 좋아하리라!
이전 일을 겪고 아예 굴종한 백치호였다.
“어어? 살덩이가 왜 이렇게 작아졌지?
백치호가 물어 온 것을 본 이히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주먹만 한 크기로 작아졌지만 무한의 살덩이가 분명했다.
작아진 무한의 살덩이는 꼼지락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슬라임 같았다.
헥헥!
백치호가 살덩이를 물면서 놀았다. 그것을 본 이히가 소리를 질렀다.
“지지! 흰둥아, 이런 거 물고 놀면 안 돼.”
백치호가 다시 살덩이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이히는 고민했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일단 크기가 작아져서 그런지 예전처럼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물고 있어도 별 저항을 못하는 걸 보니 힘도 약해진 상태인 것 같았다.
“이히가 결정하면 안 될 문제 같아. 마스터가 돌아오시면 물어봐야겠어.”
근원의 요정이 되면서 나름 사려가 깊어진 이히였다.
하지만 그 본성까지 어디 간 것은 아니었다.
“그 전까지 이히가 가지고 놀아야지. 이히히!”
이히가 살덩이를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며 악동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