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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10화 (110/242)

던전 사냥꾼 110화

근처의 유명 정장 매장으로 들어간 유은혜는 나를 마네킹 삼아 옷 갈아입히기를 시작했다.

“아, 이거 멋있다. 이걸로 한 번 갈아입어 볼래요?”

“벌써 다섯 벌째다.”

처음에는 군말 없이 갈아입었지만 오냐오냐하다 보니 끝이 없었다. 유은혜는 물 만난 고기처럼 이것저것 골라 보며 입맛을 돋우는 중이었다.

덕분에 피곤한 건 나와 매장의 직원들뿐이었다.

“손님, 손님께선 비율이 좋으셔서 이런 스트라이프 슈트도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어머! 완전 제 취향 저격이에요! 대장님, 대장님, 빨리 갈아입어 봐요! 어서요!”

“아니면 이런 색깔의 네이비 슈트는 어떠세요?”

“직원 언니 센스가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어쩜 가져오는 것마다 마음에 쏙 들지?”

“이것도 한 번 입어 보시면…….”

피곤할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여직원들은 특히 신이 났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자는 대로 입어 줬다.

마족이 인간과 어울리는 일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내 목적과 효율 등을 따져 보면 여기선 어울려 주는 게 맞는 듯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파티를 가 본 적이 거의 없다. 인간의 파티는 아예 무지하다. 이럴 땐 조금이라도 아는 이를 따르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정장을 갈아입고 나올 때마다 유은혜가 보여 주는 행동은 비슷했다.

“굿 잡.”

엄지를 척 드는 것.

여직원들도 흘끔흘끔 나를 바라보며 감탄을 흘렸다.

인간이나 마족이나 아름다움의 관점은 비슷했고, 이런 시선은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별로 대수롭지도 않았다.

20벌 가까이를 갈아입은 뒤에야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아…… 전부 마음에 드는데. 어떡한담?”

유은혜가 침음을 흘리며 정장들을 주욱 훑어봤다.

하지만 고민하는 시간은 짧았다.

생각하는 걸 포기한 유은혜가 통 크게 말했다.

“에이, 몰라. 입어 본 거 전부 주세요.”

“과소비 아닌가?”

내가 묻자 유은혜는 콧대를 높이 세웠다.

“대장님, 저 돈 많아요. 3대가 써도 남을 만큼 있어서 이 정도는 써도 돼요. 티도 안 나요.”

“그렇군.”

업적 달성을 위해 어느 정도 손실을 감수하고 포인트를 뻥뻥 써 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지금 유은혜의 실력이면 천명회 내에서도 최강자에 속할 터.

돈을 갈퀴로 쓸어 모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마수들이 판을 치는 세상. 강자는 그만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내가 납득하니 유은혜가 실실 웃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일시불!”

“따로 배송해 드릴까요?”

“오늘 저녁 6시 이전까지 가능할까요? 강남인데.”

“물론이죠. 특급으로 보내드릴게요.”

“그럼 배송지는…… 여기로 해 주세요.”

다행히 천명회의 길드 하우스를 주소로 적지는 않았다. 이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일전에 빌렸던 카페 아닌가?”

“그 건물, 한 달 전에 제가 샀어요.”

유은혜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시크하게 대답했다.

랭킹전이 있기 전, 대원들을 뽑고 모였던 카페. 그곳을 아예 통으로 사들였다는 의미다.

그 씀씀이에 나도 조금 놀랐다. 처음 길드에서 봤을 때만 하더라도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던 유은혜다. 버는 수준에 따라서 쓰는 게 달라지는 건 당연한 거지만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나한테 장가올 남자는 참 복 받았어요. 이렇게 젊고, 예쁘고, 능력까지 있잖아요.”

보브컷의 머리를 찰랑대며 유은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지체된 터라 나는 가볍게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가지.”

대답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얇은 웃음을 띤 유은혜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없네요. 다음은 구두 보러 가요.”

“…….”

“정장만 살 순 없잖아요?”

쇼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장장 4시간에 걸친 쇼핑이 끝난 뒤 길드로 돌아간 우리는 다급히 강북으로 이동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억! 소리가 나오게 큰 마당 딸린 저택.

대원 몇몇은 입을 크게 벌리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곳이 바로 파티가 벌어지는 장소였다.

입구에서부터 수십의 경비원이 교대로 돌아가며 초대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했다. 하지만 이미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은 천명회의 간부들은 별다른 제지 없이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와, 진짜 크다. 이만한 집에 살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 할까?”

“너 팔아도 안 될 걸.”

“난 아직 개발도상국이라고.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아무도 몰라. 두고 봐.”

이지혜의 우스갯소리를 받아친 유은혜였지만 살짝은 압도된 표정이다.

천 평은 되어 보이는 넓은 부지. 저택도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네 개가 조금씩 떨어져서 배치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잘 다듬어진 풀이 무성했고,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길이 예쁘게 나 있었다. 정원사가 열심히 나무를 가다듬는 모습도 생소했다.

“길을 벗어나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일행을 안내하던 여자 안내원이 점잖이 입을 열었다.

길을 벗어나 풀을 밟지 말라는 뜻이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김용우, 유은혜, 이지혜 등은 어깨를 움찔하며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 정도 되는 위치면 거드름을 피울 법도 하건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지라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유일하게 꿈쩍도 하지 않는 자는 나와 김태환뿐이었다.

김태환. 길드 내에서 제대로 입지를 다진 공격대장이었으며 김용우와는 우호 관계에 있었다. 우직한 마초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로서 일전 내가 돌아왔을 때 ‘충고’를 해 주는 등 나쁘지 않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검소해.’

이번 파티는 규모가 남다르다.

무려 대한민국 최고 재벌인 ‘일성 그룹’의 회장이 직접 개최한 것이다.

대통령도 그 앞에선 벌벌 떤다고 했던가.

물론 내 기억에는 없었다. 유은혜와 김용우가 전해 준 정보다.

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 부자가 사는 곳치곤 작다.

그야 여러 별장 중에 하나겠지만 마계의 공작이나 대공이 사는 성에 비하면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 가면은 좀 벗는 게 어때? 보는 내가 다 답답하군.”

김태환이 인상을 구기며 내게 말했다.

그는 인상이나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참가했는데, 칙칙하기 그지없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라.”

“젠장, 이런 놈이 최강의 각성자라니. 신비주의가 밥 먹여 주나?”

“나를 꺾으면 신비주의도 사라지겠지.”

김태환이 고개를 저었다.

“분하지만 나는 나를 잘 안다. 그리고 너는 확실히 강하다.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하지만 지금뿐이다.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머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피식 웃었다.

격차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당장은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포기는 안 했다. 열혈남다운 부분이다.

머지않아 파티장으로 준비된 건물의 지근거리에 섰다. 안에선 시끌벅적한 노랫소리며 웃음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대장님, 저 어때요? 저 괜찮죠?”

유은혜가 호들갑을 떨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가슴골이 파인 붉은색의 원피스를 입은 유은혜는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웠다.

“나쁘지 않군.”

“화장은요? 안 떴어요?”

“잘 모르겠다.”

“그럼 됐어요.”

잘 몰라야 맞는 화장인 듯했다.

이어 허리를 곧게 세운 유은혜가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전 호들갑을 떨어 대던 인물과 동일한 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변신이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끼이익-

파티장에 도착한 안내인이 문을 열었다. 동시에 수백 쌍의 눈이 이쪽으로 향했다.

익숙한 얼굴이 몇몇 보인다.

5대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

그중 한 명은 나와도 안면이 있는 이였다.

아린.

담비 길드를 이끄는 여자.

전생에서 던전을 치던 도중 화염의 마수에게 깊은 화상을 입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내 뒤를 좇은 악귀 같은 각성자다.

2년 전 어중간하게 나를 스카우트하려다가 실패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흰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아린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반가워요. 오랜만이군요.”

김용우가 손을 맞잡으며 머쓱하게 답했다.

“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올해는 좀…… 일이 많았잖아요?”

천사의 출현, 마수들의 집결, 몬스터 웨이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수많은 각성자가 죽어 나갔고, 대부분의 길드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담비 길드는 잘 버텨 낸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운이 좋았죠. 그나저나 뒤에 분들은 소개시켜 주지 않을 셈인가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를 바라본다.

아린의 눈빛은 복잡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쳤다는 아쉬움? 짜증과 자조도 섞여 있었다. 여러모로 애증이라 할 만하였다.

“이런!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김용우가 막 몸을 돌려 일행을 소개하려는 찰나.

“어험…… 나도 좀 껴 줄 수 있겠는가?”

선글라스를 착용한 대머리의 남자가 다가왔다.

이후 내게 시선을 옮기곤 씨익 웃었다.

“오늘은 밥맛 떨어질 일 없을 거야.”

친근한 척 구는 대머리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누구지?”

“이런, 기억 못하는 것 같군. 나름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라 생각했는데……. 하긴, 2년 전의 일이니 잊을 만도 하지. 2년 전 자네를 스카우트 하러 갔다가 대차게 욕먹은 ‘아리랑 길드’의 길드 마스터 박민우라고 하네.”

아리랑 길드.

이 역시 5대 길드 중 한 곳이다.

기억에 없는 걸 보면 그다지 비중이 있는 인물은 아닌 듯싶었다.

그때 또 다른 인물이 끼어들었다.

“어머머, 자기네들끼리만 그러기야?”

웨이브 진 긴 머리칼과 농염한 입술. 3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여인이 다가오자 박민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 여사, 내가 먼저 왔어. 순서 몰라?”

“인사에 순서가 어디 있어?”

“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인사에 순서가 왜 없어?”

“나한테는 없어!”

박민우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그를 옆으로 밀쳐 낸 김 여사가 이어 간드러지게 미소 지었다.

“호호, 데빌 헌터 공격대의 공격대장이죠? 나는 ‘쓰리고 길드’의 총책임자 김숙수라고 해요. 제가 2년 전에 편지 한 통도 보낸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 안 나요?”

쓰리고 길드도 5대 길드 중 한 곳이다.

“기억에 없군.”

하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내 기억에 없다는 건,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다는 걸 뜻했다.

“분홍색 봉투, 입술 자국, Love. 떠오르는 거 없어요?”

“그런 게 왔다면 버렸겠지.”

“아…… 너무 강렬한 게 문제였나?”

김숙수가 혼자 고민에 빠지자 참다못한 김용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뭣들 하는 겁니까?”

박민우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해 좀 해 주게. 데빌 헌터 공격대의 공격대장이라면 한국에서 만나고 싶은 각성자 1순위야.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우리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나?”

“당신네들은 체통도 없습니까? 길드 마스터면 길드 마스터답게 순서를 지키란 말입니다.”

“김 여사, 들었지?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께서도 순서를 중요시한단 말이야.”

김용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걸 봐선 이게 평소 모습인 듯싶었다.

쨍그랑!

그때 파티장의 중심부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퉤! 오늘 음식 맛이 왜 이래!”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하자 한 젊은 청년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마구 인상을 구긴 채로 불평불만을 쏟아 내는 중이었다.

주변에는 젊은 층의 인사들이 모여 있었고, 청년은 그 중심부에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이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터졌네. 에휴~”

유은혜가 작게 혀를 찼다.

그다지 청년 자체에 관심은 없었지만 주변에 흐르는 기류가 의아하여 물었다.

“무슨 말이지?”

“잠시 귀 좀.”

살짝 자세를 낮추자 유은혜가 까치발을 들었다.

“……저 패기 넘치는 젊은이가 성 회장님의 유일한 자식이거든요? 반년 전에 각성해서 돈으로 길드를 꾸리고 있는 진짜 관심종자예요.”

“관심종자?”

“뭐, 자기한테 관심이 전부 쏠리길 바라는 거죠. 미스릴 길드의 길드 마스터가 비슷한 나이인데 5대 길드라서 관심을 독차지하니까 일전에도 한 번 난리를 일으켰어요. 오늘은 아예 초대도 안 한 것 같네요. 그냥 관심 끄는 게 답이에요. 상대도 해 주지 마세요. 괜히 골치만 아파질라. 알았죠? 절대 상대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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