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12화 (112/242)

던전 사냥꾼 112화

“이게 뭘까?”

빛이 사라진 직후.

이히는 한참 동안 허겁지겁거리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곤 제자리로 돌아왔다.

괜히 심술이 나서 살덩이를 발로 찼는데, 얻어맞은 것처럼 발가락이 아팠다. 다시 발동 동동 굴리며 사방팔방을 굴러다녔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살덩이를 살핀 결과…… 방금 전과는 조금 형태가 달라진 걸 깨닫게 되었다.

“으음, 뿌리를 흡수했네.”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뿌리였다. 그것을 흡수하며 빛을 뿜어낸 것과 지금의 변화는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살덩이에서 은은히 근원의 마력이 풍겨 왔던 것이다.

“살덩아, 이히한테 화가 난 건 아니지?”

괜히 양심이 찔려 온 이히가 살금살금 다가가 살덩이를 눌렀다. 전이었다면 딱 누르기 좋은 탄성으로 손가락이 튕겨 나와야 했건만 왜인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화가 나서 몸을 경직시킨 모양새다.

“움직이지도 않고 말이야. 에이~ 재미없어.”

툭!

심통이 난 이히가 경직된 살덩이를 발로 찼다.

“아야!!”

발이 아픈 건 당연한 일이다.

이히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불과 수십 초 전 같은 일을 반복했음에도 학습 효과가 전혀 없는 이히였다.

“히잉, 너랑 안 놀아!”

울상을 지은 이히가 꿀벌들을 괴롭히러 날아갔다.

* * *

스테인.

던전의 7층을 배정받은 드워프들의 장로이자 가장 연로한 남자.

그는 지금 몇몇 건장한 드워프들과 함께 15층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스테인 장로님, 이번에도 질 좋은 뿌리를 얻을 수 있을까요?”

“목소리에 근심이 묻어나는구나. 우리가 구걸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다크 엘프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조금 껄끄럽습니다.”

“흥, 제깟 것들이 우리를 무시해 봤자 우리는 던전 마스터의 명령으로 정당하게 뿌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저기서 정보를 모아 봤다만 근원의 나무는 그들이 틔운 게 아니야. 모두 던전 마스터의 위대함 덕분이지!”

스테인이 노기를 일으켰다.

드워프와 엘프는 서로가 천적인 종족이다.

만날 때마다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근원의 나무에서 얻는 뿌리는 무구를 만드는 데 아주 좋은 재료다. 드워프들의 실력 향상도 빠르게 꾀할 수 있었고, 괜찮은 무구를 진상하면 던전 마스터의 신뢰도 높일 수 있었다. 하여 근원의 뿌리는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크 엘프는 근원의 나무를 무기 삼아 항상 협상을 해 왔다. 가소롭고 가당찮다. 던전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그 모습조차 보일 수 없었을 터였다.

스테인이 코웃음을 치며 이어서 말했다.

“우리 드워프는 매우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 반대로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식물 조금 키워 내는 게 전부다. 그 정도는 우리도 할 수 있다.”

“여러모로 던전 마스터의 대행자 행세를 하는 게 아니꼽긴 합니다.”

“두고 봐라. 지금은 크리슬리라는 여자의 비중이 높지만 뿌리를 보다 완벽하게 다루거든 반드시 역전된다. 하다못해 ‘드워킹’의 재목만 태어난다면 우리 드워프는 던전에 없어선 안 될 최정상의 위치에 서게 될 거다.”

“맞습니다. 그날이 손꼽아 기다려집니다.”

건장한 청년 드워프들의 눈가가 풀렸다. 던전 마스터의 신임을 얻으며 권위를 떨치는 드워프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전율이 일었다.

한참 숲속을 걷다가 스테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슬슬 마중을 나올 때가 됐는데…… 에잉, 게으른 놈들 같으니.”

“그들의 천성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쯧쯧. 이래서 다크 엘프는…… 응?”

혀를 차고 욕지기를 내뱉으려는 그때 스테인이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수풀에 숨겨져 있었다.

짧은 발을 놀려 다가가자 드워프 몸통만 한 금속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조심스럽게 금속 철판을 들었다.

만져 보고, 두드려 보고, 가만히 철판에 귀를 가져다 대는 등의 행위를 반복하다가 스테인이 턱을 쓸었다.

“장로님, 그게 뭡니까?”

“처음 보는 재질의 철이다. 느껴지는 마력도 심상치 않아. 이건 두드려 봐야 알겠어.”

청년 드워프들이 눈을 크게 떴다.

“장로님께서도 모르는 철이 있었습니까?

“당연하다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욱 많지.”

스테인은 천성적으로 모든 철을 알고 다루는 ‘드워킹’이 아니었다.

모르는 걸 연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그렇기에 흥미가 동한다.

‘심상치 않아. 뭔가 작품 하나가 탄생할 것 같군.’

자신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날 정체불명의 금속.

결과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들떴다.

까앙! 까앙!

화로 앞에 앉은 스테인이 열심히 망치를 두드렸다.

벌써 40시간이 넘도록 식음을 전폐한 채 같은 행위만 반복하는 중이었다.

‘대단한 금속이다. 세상에 이런 금속이 있을 줄이야!’

우연찮게 주운 금속은 여태껏 스테인이 만져 본 적도, 본 적도 없는 그런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화나 전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그저 대단하다는 말로는 설명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는 금속이었다.

‘부서지면 원상태로 돌아온다. 본래의 성질을 유지하려는 특성이 매우 강해.’

단단한 건 둘째 치고 그 성질이 놀랍다.

그래서 형태를 변화시키고 고정시키는 작업이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갑옷을 만들자. 세상에 다시 없을 그런 갑옷이 될 것이다.’

왜 하필 갑옷인지 그조차 알지 못했다.

그냥 갑옷을 만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까앙-!

스테인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떼면 형태가 돌아가 버리기에 수십 시간을 뜬 눈으로 보냈다. 망치와 모루는 붉게 달아올랐으며 공방 안은 화끈한 열기가 가득 찼다.

반대로 그는 하루하루 말라 가는 중이었다. 근육질의 몸매가 조금씩 앙상해져 갔다. 말 그대로 생명을 깎아 작품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집착으로 버텨 낼 뿐. 하지만 조금씩 금속의 형태가 잡혀가고 있었다. 눈가의 열기는 처음과 다를 것 없이 그대로였다.

3일, 4일…… 일주일.

주변의 드워프들이 걱정했지만 스테인은 자신의 공방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걸 금지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최고의 역작이 완성될지도 모르는 일.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대략 10일이 흐르자 갑옷의 형태가 조금씩 잡혀 가기 시작했다. 일이 진행될수록 스테인의 몸은 메말라 갔으며 정신도 조금씩 침식당했다.

침이 흘렀다. 눈은 실핏줄이 가득하다. 머리와 수염이 더욱 하얗게 새어 버렸다.

그럼에도 손은 쉬지 않았다.

의지가 마모되며 어느덧 스테인은 금속의 노예가 되었다.

금속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여간의 대장정이 끝이 났을 때.

‘이 물건은…… 나의 것이다. 누구에게도 건넬 수 없어.’

갑옷을 쥔 그의 눈이 탐욕으로 일렁거렸다.

* * *

파티가 끝나자 한차례 폭풍이 불었다.

하지만 입과 손이 닳도록 바쁜 건 김용우뿐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정작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일상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물론 일상이라고 해 봤자 별 건 없었다. 주로 유은혜와 에드워드를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에드워드는 크라스라가 대부분 도맡았지만 유은혜의 경우 같은 번개의 속성을 다루기에 내가 적합했다.

“아직도 검에 전뢰가 머금도록 하는 게 약간 어색하군.”

“그쵸? 계속 반복해도 잘 안 되더라고요.”

“내가 길을 유도해 보겠다.”

“벗을까요?”

“필요 없다.”

“정말?”

“…….”

유은혜가 능글맞은 고양이마냥 웃어 보였다.

예전과 달리 크게 성장을 이룬 터라 직접 살결을 부딪치며 길을 유도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유은혜의 배에 살짝 손을 대, 강렬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으음…….”

몸을 배배 꼬며 유은혜가 애써 인내했다.

배를 타고 흘러오는 전류가 묘하게 성감을 자극한 탓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몇 번은 뒤집혔을 것이건만 번개의 정령에게 가호를 받은 유은혜는 논외였다.

유은혜의 몸속에 내재된 전류가 내 흐름을 따라 이동했다. 이어 쥐고 있던 검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다른 사람의 기운을 움직이는 작업은 굉장히 섬세한 일이다. 제아무리 나라도 엄청난 집중력을 요할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큰일 났어요. 한 드워프가 미쳐 날뛰고 있어요!

“아악!”

집중력이 깨졌다. 흐트러진 전류가 유은혜를 벌떡 뛰게 만들었다. 다행히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왜, 왜 그러세요?”

“잠깐 기다려라.”

자리에서 일어나 룸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이히에게 연락을 보냈다.

‘이히, 무슨 일이지?’

―이히도 잘 모르겠어요. 드워프 장로가 살덩이를 입고 있어요. 이히가 말려 봤는데도 말을 듣지 않아요. 막 이히랑 근원의 나무를 흡수하려고 해요. 그리핀은 쓰러졌고, 기간테스가 막아서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스테인이로군. 한데, 살덩이를 입고 있다?’

―살덩이를 갑옷으로 만든 것 같애요. 어떡하죠? 이히는 무서워요, 마스터.

살덩이라 함은 무한의 살덩이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무한의 살덩이는 파간 그리울리의 던전에서 죽지 않았던가?

그것이 어떻게 살아 있고, 어째서 돌아왔는지, 하물며 그 살덩이가 갑옷으로 둔갑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히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천성이 낙천적인 이히가 저 정도로 떨고 있다면 예삿일은 아니었다.

‘그리핀이 쓰러졌다고…….’

미간을 눌렀다. 그리핀은 최상급의 마수다. 가장 낮은 레벨에 위치하긴 했지만 쉬이 쓰러진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그로도 모자라서 기간테스마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핀과 기간테스는 내가 보유한 최강의 마수들이다. 그 밑으로 크라스라, 크리슬리, 백치호 등이 있기는 했지만 둘과 비교하면 역부족인 게 사실이었다.

‘버텨라. 당장 가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스테인…… 아니, ‘탐욕’은 배가 고팠다. 목이 말랐다.

자신을 각성시킨 근원이 무척이나 탐이 났다.

저것을 흡수하면 이 허기가 조금은 가실 듯싶었다.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것처럼 탐욕은 쉴 새 없이 앞으로 향해 나갔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막아서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너! 못 지나간다!”

커다란 새에 이어서 이번에는 거인이었다.

탐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자신을 막아서는 것인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막는다면 뚫고 지나갈 따름이었다.

거인과의 전투는 격렬했다. 커다란 새보다 까다롭고 공격력이 강했다. 몇 번이나 갑옷이 찌부러지는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금세 본래의 형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지치지 않는 무한한 힘. 그것이 탐욕의 진정한 실체다.

기간테스는 강력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단순히 힘과 힘으로 부딪치는 거라면 탐욕도 지지 않았다.

꽈르릉!

격돌했다.

놀랍게도 기간테스가 밀렸다.

“쿨럭!”

역류한 피가 기간테스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주변에서 전투를 바라보던 모두의 눈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다크 엘프와 드워프 무리가 모여서 다음 차례를 대비했다.

이제 자신들마저 뚫린다면 뒤는 없었다.

그 중심부에 선 크리슬리가 지팡이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리치, 용아병, 백치호 등등이 모였지만 지치지 않는 존재를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탐욕이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긴장감은 배가 됐다.

이윽고 탐욕이 지척에 다다랐을 시점.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던전의 진정한 주인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