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14화
“이, 이히히. 왜 이렇게 덥지? 아우~ 더워.”
시침일 뚝 뗀 이히가 손을 펼쳐 휘휘 저었다. 하지만 경직된 표정과 몸짓이 따로 놀고 있었다.
“말 할 테냐, 가만히 있을 것이냐.”
“그게요…… 이히가요…… 잘못했어요…… 히잉…….”
쪼르르 날아온 이히가 내 앞에 양쪽 무릎을 꿇었다.
변명이 통하지 않으리란 걸 알아차린 것이다.
침묵을 유지하자 울상을 지은 이히가 이어서 말했다.
“흰둥이가요, 살덩이를 물어 왔어요. 그래서 이히가 일단 맡았거든요? 그런데 얘가 갑자기 화를 내는 거예요. 이히가 되게 잘해 줬는데 말이에요.”
흰둥이라면 백치호였다.
잠자코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이히는 열심히 손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근원의 나뭇가지를 구해 와서 핵을 찌른 것, 형질이 변하자 싫증을 느끼고 떠나 버린 것. 그리고 그것을 스테인이 주운 것 같다는 게 전체적인 맥락이었다.
한마디로 우연히 핵을 주운 스테인이 인피니티 아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히가 정말 잘못했어요. 끝까지 지켜봤어야 했는데 이히가 그러질 않았어요. 용서해 주세요, 마스터…… 히잉.”
전과가 있어서인지 더욱 간절히 빌었다.
나는 가만히 이히를 쳐다봤다.
자주 일을 만드는 게 놀라울 따름이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덜렁대는 성격. 매사에 대충이고 장난기가 많다. 집착이 없고 자신의 기분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히는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창의력.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는 힘.
내가 떠올리지 못한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실행하는 능력이 있었다.
어느 누가 근원의 나뭇가지로 핵을 찌르려고 하겠는가.
살덩이의 본질을 안다면 무서워서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아니면 필요 없다고 여기고 버리는 게 정상적인 절차였다.
천사를 근원의 나무 근처에 묻은 것도 그렇다. 나였다면 죽은 천사의 시체 따위, 마수에게 먹이로 던져 줬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히가 제대로 묻어 준 덕분에 타쉬말의 경계심을 많이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 여러 번 중첩되면 마냥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분명히 이히의 죄는 있지만 이것을 크게 꾸짖는 것이 옳은 일인지 살짝 고민이 되었다. 제약을 걸면 행동이 위축되고 창의력이 사라질 가능성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이히가 아니었다면 하지 않을 고민이지만…….
“너의 죄를 스스로 말해 봐라.”
우선 선택권을 줬다.
이히는 잠시 입을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마스터를 기다리지 않았어요.”
“아니, 그건 죄가 아니다. 그만한 권한은 너에게 주었으니 말이다.”
“이히가 살덩이를 방치했어요!”
“위험할 수도 있는 존재를 방치한 것. 죄이긴 하나, 보다 큰 죄가 아직 남았다.”
큰 죄.
무엇일까?
생각하는 이히의 표정이 진중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이히가 작게 말했다.
“히잉…… 마스터에게 연락을 늦게 했어요.”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일이 벌어지고, 크게 부풀려진 다음에야 내게 연락을 해 왔지. 만약 내가 멀리 있었다면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이젠 알겠어요. 이히가 정말 나빴어요.”
시무룩해진 이히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빠르게 연락만 했다면 이히 너의 잘못은 크다 할 수 없다. 그러지 못했기에 나는 너에게 벌을 줄 것이다. 하지만 벌의 수위는 스스로 정해라.”
“이히가 직접요?”
“그래.”
벌을 주면서 동시에 기대한다.
이히의 창의력이 어디까지 향할지를.
스스로 인정하고 정하는 것이니 다시는 실수도 하지 않을 터다.
뒷짐을 진 채 기다리자 이히는 한참을 고민했다.
10여 분간 이어진 행위 끝에 필사의 각오를 담은 눈빛으로 이히가 입을 열었다.
“한 달 동안 꿀벌이 될 게요. 꿀을 딸 거고요, 꿀벌이랑 생활도 같이할 거예요. 이히는 지금부터 꿀벌이에요.”
……장난인가?
‘아니로군.’
장난이 아니었다.
붉은 얼굴, 떨리는 몸동작. 괴롭히던 존재인 꿀벌이 스스로 되는 일에 커다란 수치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 다크 엘프를 개 취급한 것과 비슷한 선상인 듯싶었다.
대단한 창의력까진 아니어도 이 정도면 훌륭한 응용이다.
“한 달은 너무 길다. 그 시간 동안 던전을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지.”
“더 짧아지면 이히의 벌이 충분하지 않아요.”
“대신 나머지 시간 동안 타쉬말을 대신해 아기 천사들을 돌봐라.”
근원의 나무가 지닌 나뭇잎은 아기 천사의 날개를 성장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했다. 만약 근원의 요정이 직접 아기 천사들을 돌본다면 무슨 효과가 나타날지 자못 궁금하였다.
“알겠어요, 마스터. 이히에게만 맡겨 주세요.”
“그럼 이제 꿀벌의 흉내를 내면 되겠군.”
“아, 맞다. 이히는 지금 꿀벌이지. 위이잉~”
몸을 잔뜩 움츠리며 열심히 날갯짓을 한다. 꿀벌보다는 파리 같지만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흉내를 내는 이히였다. 이윽고 날아가더니 꿀벌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
할 말을 잃었다.
하는 수 없이 일주일간 관심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 * *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였을까?
중국의 던전을 키우고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 일들을 제외하면 천사의 침략, 잔혹한 사령관의 출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3개월 정도가 흐르자 차원 균열을 통해 메모지 한 장이 전송되었다.
발신자…… 드보롱.
‘마계 옥션의 경매 물품인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나는 가만히 메모지를 읽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올해가 분기점이 될 것이다.’
메모지에 적힌 내용은 휘황찬란했다.
몇 번을 확인할 정도로 대단한, 내가 아는 것들이 많았다.
지금 시기에 나오지 말았어야 하는 물건들. 나중에나 나오리라 내심 생각한 보물들…….
나는 이번 마계 옥션이 더욱 앞서가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를 정하는 분기점이 되리라고 보았다.
여기서 뒤처지면 향후 5년은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앞서 나가면…… 5년간 무수한 이득을 취할 수도 있으리라.
드보롱이 메모지를 전해 준 걸 보면 우리의 동맹 관계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하하!”
잔여 포인트를 확인한 나는 더욱 크게 웃어 젖혔다.
이번 마계 옥션.
작년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만큼 중요하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정도로.
그러나 승자는 나다.
동시에 차선, 차차선, 그리고 패배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특히 수많은 수족을 잃은 우파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과연 이변은 일어날 것인가?
‘일어나도 그만,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
어차피 승자가 나라는 사실은 확고했다.
그것마저 깰 이변이라면…….
‘웃으며 맞이해 주지.’
그러면 그런대로 새로운 자극이 되어 내 앞길을 밝혀 줄 것이다.
* * *
균열이 열렸다. 앞에는 언제나 나를 맞이했던, 노움 형상을 한 어둠의 정령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키히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1년이었다. 정령계는 어떤가?”
“아주 바빴습니다. 첩자를 조금 걸러 내느라…….”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허나 그 후의 경과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리고 드보롱과 나의 관계를 모르는, 제3자의 입장에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궁금증이 고개를 들자 지나가듯 말했다.
“이곳에도 첩자가 있나?”
“키히히, 말도 마십시오. 변장한 다른 원소의 정령도 있지만 어둠의 정령 몇몇이 매수를 당해서 여간 골치가 아팠습니다. 덕분에 이번 경매는 아주 조용히 치러야 할 겁니다. 그런데…… 몇 포인트나 모으셨습니까?”
“직접 물어보는 건 금지 사항이 아닌가?”
어둠의 정령이 멋쩍게 웃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못 들은 척해 주십시오. 그저 3년 차의 포인트 평균치가 매우 높아서…… 랜달프 님은 최고 고객 아닙니까? 평균치를 높이는 데 크게 일조하시니 자연스레…….”
“몇이지?”
“놀라지 마십시오. 130만입니다!”
130만이라.
짧게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잡은 마족은 셋.
69명의 마족이 남았다면 총합 8,970만의 포인트였다.
그리고…… 이중 2,200만가량이 내가 가진 지분이었다.
말인 즉, 본래 평균치는 100만에 간당간당한다는 뜻이다.
나 홀로 30만의 평균치를 올린 셈이었다.
전생이었다면 최상급 2Lv의 마수를 두 마리는 살 수 있는 금액.
물론 경매 물품으로 있어야 하고, 경쟁도 심하다. 간혹 전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 정도로 최상급의 마수는 비중이 높았다. 하물며 레벨이 높은 최상급의 마수는 능히 던전 하나만큼의 위력을 뽐내기도 했다.
한 방. 세력이 밀리고 있을 때 판도를 뒤집을 절대적인 히든카드가 되는 것이다. 하여 세력이 부족해진 대공은 기를 쓰고 최상급의 마수를 사려고 한다.
히드라, 마룡 등이 그러했다.
‘2Lv의 최상급 마수.’
그리고…… 그리핀이나 기간테스보다 한 레벨 높은 마수가 이번 경매 물품으로 들어 있었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하다. 일전 드보롱이 말한 굴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된다. 최상급 2Lv의 마수를 3년 차에 구매하는 것. 충분히 판을 흔들 만했다.
‘반드시 사야 한다.’
천만 포인트를 들여서라도 구입해야 하는 보물이었다.
나를 살피던 어둠의 정령이 말했다.
“크게 안 놀라는 기색이시군요.”
“놀랐다.”
“키히, 표정 관리가 대단하십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됐다. 창고로 이동하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미리 경매 물품을 확인할 수 있는 곳.
1년 차엔 아리엘과 나뿐이었고, 2년 차엔 제법 많은 마족이 둘러봤으며 올해에는 모든 마족이 창고 안에서 물품을 품평하는 중이었다.
몇몇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대공 오쿨루스와 그 휘하의 마족들.
대공 우파와…… 비어 버린 옆자리들.
다른 마족 모두를 합치면 정확히 68명이었다. 나를 합쳐 69. 숫자로 보건대 내가 처리한 마족을 제외하면 변함이 없다. 아직까진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음에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모든 마족의 관심을 끌고 있는 건 가운데 놓인 거대한 철창이었다.
“호오.”
“멸족한 이 마수를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르겠군.”
“마수 주제에……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은가.”
말은 달랐지만 느끼는 감정은 비슷했다.
바로 ‘감탄’이다.
나 또한 시선을 옮겨 거대한 철창 안을 바라보았다.
‘선녀족, 혹은 마고.’
바람에 섞여 다니며 태풍을 조종한다는 종족, 그것이 바로 마고이다. 언뜻 여인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선녀족이라고도 불리는데, 어감처럼 아름답진 않다.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신장, 모발 하나가 수십 센티를 자랑한다. 눈은 한쪽뿐이고, 늘어진 가슴이 여럿 달려 있다.
하지만 그 속도와 위력은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마고의 눈은 혜안이라 하였다. 오쿨루스의 그것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더할 나위 없는 보석이라 불리며 그 탓에 멸족했다.
애당초 숫자가 적은 데다 뭉치지도 않는 습성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고 한 마리가 죽은 자리에는 수백 킬로의 무참한 참상과 수천의 시체가 어김없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반갑다.’
진심으로 반가웠다.
미소를 띤 채 바라보자 마고가 한쪽뿐인 눈을 돌렸다.
이윽고 나를 바라본 마고가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쾅! 쾅!
마고의 주변으로 몰아치는 거대한 태풍.
하지만 특수한 장치로 만들어진 철창은 조금 흔들릴 뿐 끄떡도 하지 않았다.
“허!”
“대단한 마력이로구나!”
끼아아아악!
마고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붉은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쓰러졌다.
‘완벽히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로군.’
이제 3년 차.
정령들도 최상급 마수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마고를 쥐는 시늉을 했다.
‘넌 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