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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26화 (126/242)

던전 사냥꾼 126화

페루가 그런 상태였는데 던전의 지근거리에 있는 브라질이라고 무사할 순 없었다. 도리어 페루보다 끔찍한 몰골로 나를 맞이하였다.

“던전 마스터시여. 저 크라스라가 마중 나왔습니다.”

정해진 구역으로 다가가자 크라스라와 몇몇 다크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쿨루스의 던전을 감시하던 중이었는지 온몸에 흙이나 지푸라기 따위가 묻어 있었다.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겠지?”

내가 묻자 크라스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게…… 일순간이지만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던전 안에 형성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져서 잠시 착각인가 싶었습니다만 확실합니다. 그와 동시에 마수들의 움직임도 왜인지 잔뜩 위축되었습니다.”

던전 내 마수에게까지 영향이 갔다면 확실히 예삿일은 아니었다.

눈썹이 휘었다.

‘소환에 성공했군.’

무엇을 소환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알지 못한다는 건 은연중의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나는 전생의 정보를 바탕으로 여태껏 움직였기에 완전히 새로운 일에 관해선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다.”

그래도 칭찬을 아끼진 않았다. 크라스라와 다크 엘프들이 지난 보름간 잠 못 이루며 고생을 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이들을 무시하며 나는 분노와 황제의 검을 빼 들었다.

던전은 이제 지척이었고, 눈치채기 전에 몰아쳐야만 했다.

오쿨루스가 위험을 느끼고 휘하 마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일이 더욱 복잡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적을 멸하겠다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이미 숱하게 했다. 목표와 목적에 관해서도 털어놓은 뒤였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해야 할까.

크리슬리, 크라스라, 타쉬말…… 모든 마수는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래, 말은 필요 없다.

남은 것은 돌진뿐!

“가자.”

던전을 향해 달렸다.

* * *

지면을 뚫고 나오는 거대한 개미들.

‘워 엔트’라 불리는 최하급의 마수다. 개체 자체는 별 볼 일 없지만 수백에서 수천의 숫자가 모여 다니는 탓에 보다 강한 적도 사냥을 하곤 했다.

하지만 보통의 최하급 마수라면 내 군단을 보고 느낀 즉시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도리어 빠르게 몸을 빼는 행동을 보여야 했다.

따로 누군가가 명령을 내릴 시간조차 없었을 터. 격의 차이가 너무나도 큰데 이처럼 겁 없이 달려들었다는 건…… 정상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핀.”

키이익!

일전 무한의 살덩이와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지만 회복한 뒤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그리핀이 날개를 활짝 폈다. 곧이어 입에 마력 입자가 모이며 ‘불과 번개(Epic)’ 스킬이 지상을 때렸다.

콰르르릉!

혼비백산.

워 엔트 무리가 닿는 즉시 녹아난다.

숫자만 많은 최하급 마수는 한 방이면 족하다.

상대가 물량으로 승부를 보거든 역시 그리핀만 한 게 없었다.

형체마저 남기지 못한 채 박살 났다. 살아남은 워 엔트는 극소수였고, 쿠르족이 달려 나가 사냥했다.

걸린 시간? 5분이 안 된다.

속전속결로 끝낼 작정이었다. 적을 전멸시키고 바로 움직였다.

크라스라가 올라가는 길을 미리 파악해 둔 덕에 층을 오르는 일도 간단했다.

하지만 5층까진 워 엔트뿐이 보이지 않았다.

‘개미굴.’

오쿨루스의 던전은 개미굴이었다.

보이는 마수라곤 개미가 전부였다.

6층.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알 저장고. 수천, 수만의 개미 알이 잠든 장소. 가디언 엔트가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하급 3Lv의 마수. 일반적인 워 엔트보다 컸으며 부리가 훨씬 날카로웠다. 속도와 힘도 무시할 수 없다.

“다 태워 버려라.”

그래 봤자 하급 마수다.

문제라면 알 저장고가 한 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척 보기에도 수십 개는 존재했는데, 그리핀이 모두 처리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불과 번개’가 광역기 스킬이라도 한 번에 쓸어버리자니 던전이 생각보다 넓었다.

하여, 나는 파이어 골렘 셋을 배치했다.

알 저장고를 깡그리 태워 버리고 만에 하나의 사태에서 뒤를 지켜 줄 터였다.

아무리 가디언 엔트의 부리가 날카로워도 파이어 골렘을 공격하진 못한다. 말하자면 극상성이라는 것이다.

쿵! 쿠웅!

내 명령을 받은 파이어 골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지면이 들썩였다.

화아악!

파이어 골렘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불길이 치솟았다. 알 저장고의 알들이 그 화력을 버티지 못하고 새까맣게 타 버렸다. 가디언 엔트가 그를 막고자 덤벼들었지만 파이어 골렘의 다리를 깨문 부리가 녹았다. 공격 자체가 불가능했다.

쉽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고작 이런 수준이라면 최상층까지 닿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층을 오르는 와중, 슬슬 의아함이 들었다.

‘알아차릴 때가 되었을 터인데?’

5천이 넘는 숫자가 들어왔다. 던전의 요정이라면 알아차리고 주인에게 알려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 그런데 마땅한 움직임이 없었다.

올 테면 와 보라는 건가?

아니면 오르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진정 모른단 말인가.

나는 오쿨루스가 아닌 고로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어느 것이든 나로선 나쁠 게 없었다.

11층.

중급 마수가 출현했다.

‘기간틱 엔트’라 이름 붙여진 중급 3Lv의 마수.

온몸에 특수하고 단단한 성분의, 언뜻 보기에는 철갑처럼 보이는 것을 착용한, 제법 까다로운 녀석이다. 게다가 마치 인간들이 사용하는 총처럼 입에서 화학 성분을 빠르게 뱉어 냈다.

꽝! 꽝!

소리 또한 요란하다. 수백의 기간틱 엔트가 공격을 감행하자 섣불리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상급의 골렘들을 방어벽 삼아서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기간틱 엔트가 뿜어 대는 화학 성분은 생명체에게 치명적이다. 닿는 순간 폭발하며 상처를 입히고, 그 상처에 침투해서 모든 신경계를 망가트린다.

‘화염 내성’에 가까운 방어력을 자랑해서 그리핀이 나서기도 애매했다. 그야 스킬을 퍼부으면 죽기는 할 테지만 효율이 별로다. 여기서 그리핀을 방전시키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지라 할 수 없었다.

“나가 퀸.”

쉬이익-

뱀의 꼬리와 아름다운 여인의 상반신을 가진, 내가 지닌 마수 중에서도 아주 강한 축에 드는 상급 5Lv의 강자.

나가 퀸을 비롯한 나가들이 바닥과 벽을 타고 빠르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이빨과 그곳에 묻은 강력한 독은 기간틱 엔트가 갑옷처럼 입고 있는 화학 성분을 녹여 버릴 수 있었다.

하아아!

기간틱 엔트의 전방에 선 나가 퀸이 보라색의 입김을 크게 내뱉었다.

입김이 번지자 안개가 되었다.

바로 ‘독성 살포(Ex U)’다.

보라색 안개에 닿은 기간틱 엔트는 흐물거리다가 녹아내렸다.

단단한 갑옷, 강력한 무기를 지녔지만 나가의 독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이 역시 극상성이라 하겠다.

‘이제 여왕개미만 잡으면 되겠군.’

워 엔트, 가디언 엔트, 거기다가 기간틱 엔트까지 나왔다.

이 이상의 존재라면 퀸 엔트뿐이 없었다.

개미굴의 종착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고…… 과연 언제쯤 오쿨루스가 움직일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퀸 엔트!

골렘과 비슷한 크기의 초거대 개미가 비명을 내질렀다.

키이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퀸 엔트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다리가 모두 토막 나고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등의 치료 불가한 상처를 가득 입었다.

크롸앙!

그리고 퀸 엔트의 몸통 위에서 백치호가 울부짖었다.

승리의 포효.

이어 퀸 엔트의 목을 물어뜯는 것으로 전투의 종료를 알렸다.

샤벨 타이거 수십이 죽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대승이다.

‘퀸 엔트가 죽도록 방치했다. 포인트가 썩어 나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오쿨루스가 이동한 흔적은 없었다. 이동 마법진이 새겨졌다면 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리도 없었다. 마법진이 새겨진 직후 생기는 거대한 마력의 파장은 평범한 인간도 느낄 정도로 강렬하니까. 필시 소란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 징조가 전혀 없었다.

설혹 오쿨루스가 없더라도 요정이 나서서 나를 배척해야 함이었다. 대항할 수 있는 숫자의 마수를 배치하는 식으로 말이다.

‘피해는 적다. 기껏해야 중급 마수 2백. 놈의 목을 딴 뒤 빠져나가기에는 더없이 충분하다.’

고개를 돌려 크리슬리를 바라봤다.

“다른 다크 엘프에게서 연락은 없나?”

“없습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휘하 마족들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로군.”

그저 오쿨루스만 감시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의 휘하 마족이 기거하는 던전에도 다크 엘프를 보내 놨다. 이상이 생기거든 알릴 수 있도록 수정구도 지참해 주었다.

연락이 없다는 건 움직임이 없다는 뜻.

고로, 오쿨루스 하나만 신경을 쓰면 되는 것이다.

“그럼.”

움직이지, 라고 말하려는 찰나.

휘이익!

거친 바람이 불었다.

키이이!

죽어 가던 퀸 엔트가 대관절 단말마를 내뱉었다.

그리고 퀸 엔트의 사체가 눈 깜빡할 사이 사라졌다.

아무런 기색도 없었다. 그저 바람이 불어온 게 전부이거늘.

“이 기운은……!”

타쉬말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수없이 쇄도하는 어둠의 창(Epic)’이 발동되며 수백 개의 창날이 그녀의 앞에 생겨났다. 그것을 던전 곳곳에 날렸다.

쾅! 콰르릉! 콰앙!

폭발이 일어났고, 주변이 밝혀지며 그제야 나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

그림자. 그것도 무척이나 커다란 그림자가 던전의 외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 타쉬말이 경악하며 외쳤다.

“허무!”

허무?

무엇이기에 타쉬말이 저처럼 놀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그림자를 경계하는 중이었다.

“나와선 안 될 존재가 나왔구나! 돌아가라!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나는 본래 이곳과 다르지 않은 곳의 원주민이었다.

살짝 짜증이 난 듯한 중저음의 목소리.

그러나 타쉬말의 태도는 강경했다.

“‘허무’에 들어갔다면 더는 원주민이라 할 수 없다! 신을 먹고, 신이 되지 못한 배은망덕한 자야!”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애당초 허무가 무엇이란 말인가. 모를 땐 아예 기색이 없었으나, 알아차리자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는 저 그림자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다.

마계에서 대공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나 느껴 본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쉽지 않은 상대. 강자라는 것.

―신이 되지 못했다고? 천만의 소리. 나는 나 홀로 존재하는 진정한 신일지니. 타락한 천사 주제에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다면 전생의 기억도 모두 온전할 터. 너는 누구의 신이냐? 내 비록 타락했지만 가짜 신이 진짜 신을 사칭하는 건 참을 수 없다!”

휘이이잉!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타쉬말도 어둠의 창을 수없이 띄웠다.

―나는…… 콘테고놈! 내가 진정한 신이다! 가짜는 바로 네년이다! 이 빌어먹을 타락한 천사여!

그러자 타쉬말이 고소를 지었다.

“흥, 보아하니 이름 외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허무로 들어서며 모두 잃어버린 것일 테지!”

스팟!

자신을 콘테고놈이라 칭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콰릉!

타쉬말이 응전했다. 어둠의 우레를 퍼부으며 수없이 창을 날렸다.

허나 그림자는 빠르다.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반면 그림자가 스칠 때마다 타쉬말의 몸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콘테고놈.’

나는 잠시 그 이름을 곱씹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

곧 기억을 해냈고, 작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인의 왕, 콘테고놈!’

감히 설인 중에서도 왕이라 칭할 수 있는 유일한 그 이름.

마계 옥션에서 팔던 저주받은 설인의 선조이며 업적 상점에서도 그의 투구를 팔던 걸 본 적이 있었다.

그 이름을 여기서 마주할 줄이야.

저 거대한 그림자의 형태도 잘 보면 설인과 비슷하다.

진즉에 죽어 사라졌어야 할 놈이 이곳에 있다. 그것도 그림자의 상태로.

‘확실한 건.’

놈을 없애야 전진할 수 있다는 것.

“마고.”

후우웅.

이번 마계 옥션에서 구매한 최상급 2Lv의 최강자.

외눈박이의 마고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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