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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29화 (129/242)

던전 사냥꾼 129화

시야가 어두워진다. 감정이 마모되고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살의!

먹이를 찾는 야수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떨어지는 침, 붉어진 눈동자. 이어 가장 가까운 마수들을 차례대로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콰득!

콰지직!

종잇장처럼 찢겨 나간다. 양손으로 어깻죽지를 부여잡고 쭉 갈라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튄 피가 전신에 흠뻑 묻었다.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자 검은색 피부가 완전히 붉은 피로 가려질 정도였다.

목줄을 물어뜯고, 안구를 파낸다. 마른 목을 축이고자 송곳니를 박고 피를 빨아들인다.

“크르르르!”

아비규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내게서 비롯된 악몽이 이곳에 재현되고 있었다.

“너는…… 네놈은 무엇인가?”

콘테고놈.

허무의 그림자.

과거 설인의 왕이라 불렸지만 지금의 그는 더없이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하지만 내게는 외견보다 얼마나 강하느냐가 중요했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이 목마름이 해소되리라고 본능이 말하는 것이다.

그는 마고를 상대할 때조차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오히려 마고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지 않았나. 각개격파로 나갔다면 진즉에 처리했을 터.

콘테고놈은 자신이 있었다. 결국 이들은 필멸자들. 언젠가 죽는 게 확정된, 불쌍한 육체의 종속자에 불과했다. 반면 불멸자인 자신은 속박되지 아니하며 영원하다. 애당초 짜여진 각본과 같았다. 질 리가 없었고…… 그게 당연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콘테고놈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허무와는 정반대에 있는 자. 신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만 그럼에도 네놈은 모든 걸 가지고 있구나! 그 육체, 무척이나 탐이 난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육체는 그저 허울이라 여겼거늘.

편견이 깨졌다.

경악과 동시에 탐욕도 함께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것은 이전에 없었던 훌륭한 예술품을 발견한 예술가와 비견될 만하였다.

“너를 갖겠다. 허무에서 벗어나 그 육체로 진정한 신위를 얻으리라!”

콘테고놈이 발을 들썩였다. 주변의 모든 마수가 그의 존재감을 느끼고 물러섰다. 거대한 원이 만들어졌으며 그 중심부에는 나와 콘테고놈뿐이었다.

나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내 육체는 나만의 것이었고, 누구에게도 넘길 생각이 없었다. 저것 또한 헛된 갈망이다. 오쿨루스가 바랐지만 이루지 못한 허망한 꿈.

과연. 둘은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처럼 비슷한 성향의 그림자를 소환한 것 같았다.

‘맛있겠군.’

물론 콘테고놈만 갈망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콘테고놈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저놈을 먹어 치우면 채워질 듯싶었다.

사냥꾼은 나였고…… 놈은 사냥감일 따름이었다. 맹수도 노련한 사냥꾼을 이기지는 못한다.

“얌전히 몸을 내놔라!”

그림자가 요동쳤다. 빛무리가 퍼지는 것마냥 전방에서 나를 압박했다. 달의 마력으로 치환한 마력을 나는 다시 한번 바꿨다.

화아악!

두 개의 뿔에서 빛이 쏘아졌다.

치환한 마력은, 놀랍게도 ‘빛’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력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주 다르지는 않은, 비슷한 속성의 마력이다.

그림자는 빛에 의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나를 향해 쇄도하던 그림자가 그 빛을 받곤 주춤거렸다.

“네놈은 마족이 아닌가? 어찌하여!”

콘테고놈도 재차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치이이익!

허나, 그 여파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살이 타들어 갔다. 급격한 마력의 변환. 하물며 그 마력이 나와는 상극이니 내부에서 몸을 태워 가는 것이다.

“크르르르!”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발자국씩 다가가며 빛을 뿜었다. 그러자 콘테고놈이 그림자를 회수했다.

“이놈……!”

쿠아아아!

회수된 그림자가 차츰 모여들어 하나의 커다란 검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흉측한 육체가 여과 없이 드러났지만 진짜 실력을 보이겠다는 작태다.

뭉친 그림자에겐 더 이상 빛이 통하지 않았다. 하여 나는 한 번 더 마력을 치환했다. 이번에는 ‘혼돈’이다. 아리엘 디아블로의 전매특허, 어비스 소드는 심연 속 혼돈을 다루는 힘이었다. 그것을 전신에 둘렀다.

치이이이익!

내부에서 타는 냄새가 더욱 강렬해졌다. 이대로는 머지않아 스스로 파멸할 것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내게 있어서 중요한 건 저놈을 먹느냐, 마느냐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먹을 작정이었다.

“크르르르!”

목울대를 울리며 달려 나갔다. 콘테고놈이 그림자로 이루어진 검을 든 채 나를 맞이했고…… 부딪치는 순간 강렬한 파장이 주변을 휩쓸었다.

콰아앙!

둘 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과 손톱이 나부끼며 폭발을 일으켰지만 힘은 비등했다.

“더욱 욕심이 나는구나!”

흉측한 몰골의 콘테고놈이 웃었다. 끔찍하기 짝이 없었고, 그것을 알기에 그림자로 감췄지만 이제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그것도 자신의 진심마저 받아 내는 아주 훌륭한 육체로 갈아탄다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없었다.

시간만 끌면 된다. 보아하니 저 상태가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시시각각 생명력이 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런 것을 챙길 이성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콘테고놈은 여유로웠다.

“크롸앙!”

쾅! 쾅!

대치가 풀리자 마구잡이로 손을 놀렸다. 그럴 때마다 혼돈의 마력과 그림자가 폭발을 일으켰고, 주변을 마구잡이로 휩쓸었다. 그 여파 탓에 죽어 나간 마수가 수백에 이르렀다.

둥글게 원을 이룬 채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마수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상급의 마수도 버티기가 힘들어서 발을 뺐을 수준이다.

둘의 대결은 던전의 마력마저 태워 버리는 중이었다. 층을 지탱하던 마력이 사라지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콰아앙!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무너지는 바위의 틈새로 크리슬리가 달려왔지만 한발 늦었다.

공간이 나뉘었고, 이제는 완전히 둘뿐이었다.

“그만 포기하고 얌전히 몸을 내놔라!”

시간이 길어질수록 콘테고놈도 서서히 질려 갔다. 거의 다 됐다고 여겼는데 끝이 없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몸 곳곳에 자상이 가득했건만 더욱 흉포해져서 사납게 이빨을 드러낸다. 천하의 콘테고놈도 무사할 순 없었다.

목 줄기의 절반을 뜯어 먹혀서 고름이 줄줄 새는 중이었다. 빨리 육체를 갈아타지 않으면 자신도 위험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이히히. 예쁘고 착하고 귀여운 이히가 돌아왔어요, 마스터!”

뿅!

소리와 함께 이히가 나타났다.

황금의 왕관과 이쑤시개 같은 찬란한 검, 보석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왠지 모를 현기가 느껴졌다.

이히는 나타난 즉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곧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넌 누구니?”

모습이 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히가 이번엔 콘테고놈에게 시선을 던졌다.

“넌 또 누구야? 뭐야, 이히의 마스터는 어디 갔어? 분명히 마스터가 있는 곳으로 왔는데? 이상하다.”

이히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곤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을 뻗어 콘테고놈을 가리켰다.

“그런데 느낌이 묘하단 말이야. 얼굴도 못생긴 게 말이야. 막 이히가 짜증이 난단 말이야. 요정 기사님은 이히가 나쁜 놈을 알아차릴 수 있댔어. 그러니까, 너 나쁜 놈이구나!”

이히가 방패를 들었다. 그러자 보석 방패에서 환한 빛무리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콘테고놈은 어이가 없었다. 막상막하, 아니 승기를 조금씩이나마 잡아 오고 있었다.

지쳤는지 움직임이 굼떠졌다. 앞으로 몇 번만 더 부딪치면 확실하게 ‘승리’를 확정 지을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 웬 듣도 보도 못한 요정 한 마리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것이다.

그냥 무시해도 좋겠지만…… 보석 방패에서 쏟아지는 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정확했다.

“커억!”

타격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시 주춤거리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작은 틈. 그 틈 사이로 날개를 펼친 놈의 이빨이 날아들었다.

콰직!

콰지직!

“크아아아악!”

연이어 벌어진 광경은 끔찍했다. 이빨로 콘테고놈의 몸을 거칠게 유린했다. 승리자가 만찬을 즐기는 그런 느낌조차 없었다.

먹는다. 먹고 또 먹는다. 그저 그게 전부인 행위.

부들부들!

그 괴이한 광경에 이히도 넋을 잃었다. 소름이 돋으며 몸을 잘게 떨어 댔다.

끝내, 콘테고놈의 전신을 먹어 치우고 잿빛 날개의 악마가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 이히가 있었다.

“이, 이히는 맛없어요…….”

검과 방패를 쥐었지만 공격하기가 애매했다.

분명히 많이 본 얼굴인데, 느낌이 확연하게 달랐다.

마스터라면 응당 연결되었어야 할 축복도 전혀 낌새가 없었다.

어떡하지?

그러는 찰나에도 잿빛 날개가 펄럭이며 이히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결국 이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에잇!”

위이잉!

왕관이 빛났다.

이히도 처음으로 사용하지만 왕관의 능력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알고 있는 대로라면 분명히 효과가 클 터.

잠시 이히는 분홍색 여왕을 만난 일을 상기시켰다.

* * *

버섯 왕국.

쿠키 왕국.

두 곳의 보물은 황금 왕관과 보석 방패였다.

보물을 착용하고 분홍색 여왕을 만나러 갔다.

싸웠고, 졌다. 이에 분해서 엉엉 우는데 분홍색 여왕이 깔깔 웃었다.

“아, 재밌었다!”

알고 보니 분홍색 여왕이 요정 기사였다. 무려 2만 년 동안 다음 후계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너무 심심해서 이런 연극을 꾸몄다는 것이다.

버섯들도, 쿠키들도 일제히 사과를 했다. 이히는 울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정말 나쁘다고 입을 열자 요정 기사가 말했다.

“너 정도면 충분해. 이히라고 했니? 심성이 무척 착하구나. 너에게 계승권을 넘겨줄게. 이미 넘겼지만.”

왕관과 방패, 그리고 검.

이 세 가지가 요정 기사의 증표였다.

“검은 악을 꿰뚫고, 방패는 악을 밝히며 왕관은…… 악을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낸단다. 특히 왕관은 자주 못 쓰니까 위험할 때만 사용해야 해. 이 세 가지 힘을 잘 활용하렴.”

“그럼 이히는 돌아갈 수 있나요?”

“그래! 어디로 가고 싶니?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떠올려 봐. 그곳으로 이동하게 될 거야.”

“이히는 마스터의 옆으로 가고 싶어요!”

“응? 이미 섬기는 분이 있는 거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알았어. 그분을 잘 떠올려 봐. 특징 같은 것들을 확실하게 새겨야 해.”

“마스터는 커다란 무기가 두 개고요, 아니 세 개고요, 엄청 잘생겼어요. 막 나쁘다가도 자상하고, 이히히, 이히한테만 그러는 거 같애요.”

“어…… 음, 알겠어. 자, 마스터 자랑은 거기까지 하고 슬슬 가야지?”

“네, 안녕히 계세요, 요정 기사님!”

꾸벅!

* * *

왕관은 악을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낸다.

악이라면 통할 것이고, 마스터라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히는 계산한 것이다. 마스터는 가끔 심술궂긴 했지만 이히에게 있어서 결코 악은 아니었던 탓이다.

그리고 왕관의 힘은 악을 돌려보냈다.

“아! 역시 마스터가 아니었구나.”

이히를 위협하던 잿빛 날개의 소유자는 그 자리에서 말끔히 지워졌다.

먹다 만 그림자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람? 요정 기사님이 이히를 골리려고 이상한 곳으로 보내 준 게 분명해.”

주변을 둘러봤다. 커다란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서 나가기가 힘들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바위의 작은 틈새 사이로 크리슬리가 비꼼 튀어나온 것이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손가락의 손톱은 전부 깨졌고, 핏덩이가 되었다. 그만큼 간절히 바위 사이를 뚫고 나온 것이었다.

“크리슬리?”

“요정님?”

“네가 여기 왜 있어?”

틈새를 빠져나온 크리슬리가 초조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답했다.

“던전 마스터를…… 못 보셨습니까? 분명히 방금 전까지 이곳에.”

이히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마스터는 없었어. 못생긴 애들 두 명만 있었어.”

“그, 그럴 리가요. 비록 모습은 변하셨지만 잿빛의 날개를 가지고 계셨을 겁니다.”

크리슬리의 말을 듣고 이히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왜 그러십니까?”

“이히가 본 거 같기도 해.”

“그럼 어디에……?”

왕관은 악을 본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리는 힘이 있었다.

마스터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라면.

“……마계?”

“예?”

“크, 큰일이야! 이히가 또 큰일을 저질러 버렸어!”

이히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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