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31화
이미 한 번 겪은 일. 거기다가 몸도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인지 회복 자체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하루하루가 달라진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첫날에는 걷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고작 이틀 만에 몰라볼 정도로 근육이 붙은 것이다.
‘단순한 방부제는 아니었군.’
특히 ‘젤림’이라 부르는 나뭇가지의 효과가 뛰어났다.
원기를 회복시켜 줘서 더욱 탄력이 붙었다. 미약하게나마 마력도 돌아왔다. 스킬을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분노. 황제의 검.’
이렇게 무거웠던가?
묵직하다. 느껴 본 적 없는 무게감이 양손을 타고 흘러들었다.
후욱!
검을 휘두르자 영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처음으로 검을 쥐어 본 기분에 피식 웃고 말았다.
‘딱 이런 느낌이었지.’
정확히 12살 때였다. 강제적으로 전쟁에 동원되었고, 훈련이라는 미명하에 검을 쥐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마족 서른 정도가 모여 있었는데, 그중 단 두 명만 살아서 병사가 될 수 있었다.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검이라곤 쥐어 본 적도 없지만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 당시 나를 바라보던 교관의 눈빛을 기억한다. 쓸 만한 병졸 하나가 들어왔다고, 자신을 대신해 죽을 이가 들어왔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싫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그날!
술에 취한 교관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그를 죽였다.
안 그러면 이용만 당하다가 죽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후 생존을 위해 발악했다. 마계는 어디서나 전쟁이 횡횡했다. 진정한 강자만이 자유를 얻는 게 가능했다.
‘그때의 나는 빠르게 성장했던 것 같군.’
아무것도 없는 마족. 있는 것이라곤 악밖에 없는 볼품없던 마족이 브뤼시엘이란 성마저 강탈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좋은 피를 이은 허접한 놈이었지만 그래도 상위 72마족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그저 강해지자고 발악했을 따름이다. 대공들을 만나고 의욕이 꺾인 뒤부터 발전이 디뎌졌다. 마신의 제안에 의해 지구에서 힘을 얻었지만…… 과연 그것은 진정으로 내 노력에 따른 ‘힘’이었을까?
물론 아예 부정할 순 없겠지만 마계의 전쟁터를 전전할 때보다 노력했다고는 하지 못한다. 치열하지 않았고, 그래서 졌다. 조금 더 치열해질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제약을 건 탓이다.
‘회귀한 다음 나는 노력했다. 적어도 전생에서보단 잘해 나갔지. 그러나 여전히 한 발자국이 부족하단 기분을 지울 수 없었어.’
전생의 기억이 있고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얻어서 자만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면이 분명히 있었다.
순수 능력치보단 보정 능력치에 기댄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대공들보다 위에 있다고 으스대며 자랑한 결과 오쿨루스란 변수에 휘둘리고 말았다.
만약 조금 더 내 스스로를 다그쳤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수많은 가능성의 한 가지지만…… 그 한 가지를 위해선 또 하나의 벽을 넘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차피 몸을 만들어야 한다면 나만의 순수한 힘을 키워 보자.’
다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내 스스로의 상승을 원한다.
분노와 황제의 검을 다시금 들었다.
‘하이엔달.’
타락으로 변신했을 때조차 완벽하게 흉내 내는 게 불가능했다. 99%는 비슷할지언정 중요한 1%가 부족했다.
그의 검술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보이리라.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곤 입을 열었다.
“여기도 달은 뜨는군.”
늦은 저녁.
달빛에 취해 검을 휘둘렀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내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6일 차.
점점 검의 무게에 적응이 되어 갔다.
‘타락의 영향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영향인가.’
절벽 위에서 쌍검을 휘두르며 잠시 생각했다.
지저 세계에 발을 들이고 몸이 약체화된 연유가 궁금한 것이다.
분명히 내 몸은 맞았다. 마력의 흐름도 일치했고, 나락 군주의 심장도 여전히 있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전신의 근육이 죽어 있다. 타락, 혹은 콘테고놈을 상대하며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타락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 위험했다. 궁금증을 잠시 뒤로 밀어 놓고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해야 할 듯싶었다.
그러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제프.’
언데드 제프.
날렵한 몸을 지닌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열심히 날이 빠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으쌰! 으랏쌰!”
기합 소리가 우렁차다. 어디서 배운 게 있는지 각이 꽤 잘 잡혔다.
이틀 전부터 반복된 행위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더니 ‘전쟁’ 운운하며 이곳에 오거든 항상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기합을 내지르며 실제로 가끔 내 쪽을 뻔히 바라보기도 하였다.
‘내 솜씨가 어떠냐.’고 자랑하는 작태.
확실히 검을 다루는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실전에 들어가야 확실해지겠지만 나도 나름 칼밥을 먹었기에 자세만 봐도 대충 알 수는 있었다.
“한번 붙어 보지.”
슬쩍 검을 내리며 다가갔다.
적당히 체력도 붙었고, 검에도 익숙해졌다.
남은 건 실전 감각이다. 이 몸을 활용해서 싸우는 데 차츰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제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괜찮겠어? 꽤 회복은 된 것 같지만 검을 다루는 게 여엉…….”
며칠간 나를 지켜보곤 내뱉는 소리다.
하기야 하이엔달의 검술은 복잡하다. 제3자가 보거든 칼춤 이상으로 여기기는 힘들 터였다. 게다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려고 천천히 행하는지라, 오해를 사도 할 말은 없었다. 제프가 검술의 현묘함을 눈치챌 수준이었다면 또 모를까.
“자신 없나?”
“뭐? 내가? 허, 참. 내가 전장에서 죽인 숫자가 백을 넘겨. 일당백의 용사 제프! 그게 나라고!”
가슴을 떵떵 친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자만이 느껴졌다.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내기를 하나 하지. 승자는 원하는 걸 얻고 패자는 승자가 바라는 걸 준다. 어떤가?”
“승자가 원하는 건 무조건 줘야 하는 거냐?”
“그렇다.”
제프는 내가 든 검을 바라봤다.
분노와 황제의 검.
딱 봐도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무기다. 느껴지는 마력도 범상치 않았다.
검사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 법했다.
여태껏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게 대단한 거다. 침을 질질 흘리는 주제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손을 대면 죽일 자신이 있었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자 일부러 꺼내 보인 건데 그다지 실효가 없었다.
허나 공식적으로 기회를 줬다.
제프가 입술을 훑었다.
“그 검, 이기면 두 자루 전부 내가 갖지. 랜달프, 너는 내게 바라는 게 있나?”
“이기고 나서 말하마.”
“영영 못 듣겠구먼, 흐흐.”
동시에 제프가 거리를 벌렸다.
시미터 형태의 날이 굽은 검을 쥐고 히죽거렸다.
자신이 지리라는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지금의 상태로는 살짝 밀린다.’
객관적으로 분석했다. 나름 적응이 됐지만 살짝 부족하다. 그러나 이 부족함이야말로 내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래…… 이기는 게 당연한 싸움은 재미가 없다.
“먼저 들어와라.”
“하하! 후회할 텐데?”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제프가 혀를 찼다.
선수 필승. 먼저 때린 자가 이길 가능성이 높은 건 모든 싸움에 통용된다.
어이가 없겠지.
하지만 나는 나대로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는 작전이었다.
다행히 그 작전이 통했고, 제프가 발을 놀려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흐랴앗!”
제프의 검술은 뛰어났다.
실전으로 제법 잘 다져져 있었다.
100명가량을 죽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교함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분명히 있었다.
힘의 배분, 상대의 허를 찌를 줄은 알지만 몇 수 앞까지 내다보진 못했다.
나는 천천히 몰이사냥을 하듯 제프를 몰아갔고, 끝내 목에 검을 겨눌 수 있었다.
‘힘들군.’
고작 10여 분 움직이는 게 전부였건만 진이 다 빠졌다.
무엇보다 나도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중요 부위만 방어하며 몰아갔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분명히 내가 이기고 있었는데……?”
제프가 경악했다.
시종일관 자신이 우위에 서서 공격을 했다고 판단한 듯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겠지만 그것도 내가 의도한 바다.
나는 검을 내리며 짧게 말했다.
“앞으로 30일 간 매일같이 제프, 너는 나와 싸워야 한다.”
나날이 달라지는 몸 상태를 점검하기에 제프는 적합한 상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격해졌다. 내 몸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고, 덕분에 싸우는 시간도 짧아졌지만 그럴수록 제프는 필사적이 되었다.
“이 괴물 같은 놈!”
태엥!
20일이 지나갔을 때 제프는 손에 쥔 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20전 20패!
심지어 이제는 1분도 버티지 못하니 골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나를 죽여! 그만 괴롭히고 죽이라고!”
“그럴 수는 없지.”
“으…… 독하다, 독해. 콱 혀를 깨물고 죽어 버려야지 원.”
자리에 주저앉아 제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짝짝짝!
그때 토리엄이 모습을 보였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 것 같소.”
“오늘은 또 웬일이지?”
“걱정 마시오. 찾아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니깐.”
토리엄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프도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군.”
“중부의 사령관 막달리가 남부로 진격하는 중이오. 제프와 나는……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
“준비라?”
“이곳에 일궈 논 터전은 지켜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남부의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살아온 게 벌써 50년이오. 지금 와서 포기할 순 없소.”
토리엄의 눈빛이 거세졌다.
반드시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내가 돌아갈 방법은 찾지 못한 건가?”
제프와 토리엄이 전쟁에 나서면 나 혼자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해서 물어봤는데 토리엄이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찾아보았소. 그래서 한 가지 발견한 게 있긴 있소만…….”
“듣고 싶군.”
“실은, 말하지 않은 게 있소. 이 세계에 관한 진실이오. 너무나도 창피하여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으나 지금 같은 마당에 마다할 게 뭐 있겠소?”
가만히 팔짱을 꼈다.
얘기를 꺼내 보라는 태도로 지켜보았다.
토리엄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은 가짜요. 나락 군주가 만들어 낸 가짜 세상이오.”
“……나락 군주?”
저도 모르게 말했다.
나락 군주. 익숙한 이름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토리엄은 엄숙한 태도를 일관했다.
“그림자 황제라고도 불리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오. 이미 죽었지만 신위를 얻고 신이 되어 이 세계를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그 사탕발림에 속아 우리는 이곳에 들어왔소. 실제로 나나 제프는 그를 본 적조차 없소만……. 하여간, 사령관들은 이 세계와 그의 보물 창고를 지키는 존재이오. 언젠가 돌아올 자신의 신을 위해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게 그들의 역할이오. 허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변질되었소.”
토리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로가 나락 군주의 보물 창고를 얻겠다며 ‘정통성’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오. 하지만 나락 군주의 보물 창고는 모든 사령관이 동의했을 때 열리오. 돌아갈 방법이란 이것이오. 보물 창고가 열리면 세계 자체에 변화가 생길 것임은 자명하니 말이오.”
방법에 대해 나열한 토리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든 사령관이 동의하면 열린다는 말은, 다른 사령관 모두를 죽이면 홀로 열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하오. 몇몇 사령관이 그것을 알아챈 이후 전쟁을 일으켰소. 끝나지 않는 길고 긴 전쟁이 시작…….”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
토리엄이 끝맺으려는 순간 내가 말했다.
그러자 토리엄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그 이름을 어떻게?”
“그도 중부에 있나?”
“그, 그렇소……! 그가 바로 전쟁을 선포한 중립의 사령관이오!”
아아.
조금씩 안개가 걷혀 간다.
이곳은 내 심장과 관계가 많은 곳이다.
그리고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이라면 내가 업적 상점에서 불러들인 기사였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세계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이유가 없지는 않은 듯싶다.
토리엄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적이 없소만 어찌 아는 것이오? 그 이름은 우리에겐 공포의 대명사요. 여태껏 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의 진면목을 본 자도 극소수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서 그는 금기와 같다오. 제프가 그 이름을 꺼냈으리란 생각은 안 드니…….”
이어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황제의 검을 높이 들었다.
이 검은 막시움의 검이다. 그가 내게 준 것이었다. 그리고 진짜 정체는 나락 군주가 사용하던 무기였다.
“토리엄. 이 전쟁, 나도 참가하겠다.”
조용히.
그러나 무게를 담아서 말했다.
돌아갈 방법이 진정 하나뿐이라면…….
내 스스로 이 멈춰 버린 세계를 움직이게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