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35화
여기에 또 한 가지.
막시움은 나를 본 즉시, 그 먼 거리에서도 나락 군주의 심장임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허나 오스웬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단순히 천둥새의 피를 묻히고 있어서는 아닐 듯싶었다.
같은 사령관이라 할지라도 차이가 있는 모양.
만약 처음부터 알아보고 응대했다면 자연스럽게 황제의 검을 꺼내어 굴복시켰겠지만 모든 게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행위는 자칫하다간 악수가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최상급 2Lv의 마수인 둠 나이트는 정상적인 상태에서조차 쉽지 않은 상대다. 내 목숨을 노리고 달려든다면 그땐 대처가 쉽지 않을 터.
그러니 간만 볼 셈이다.
“많은 이가 이 방에 찾아와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대뜸 본관에게 대련을 청하는 이는 처음이로군.”
여기서가 중요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본래 떠돌이 용병이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남부 사령관에 대한 위용은 익히 들을 수 있었지. 내 차가운 피를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더군. 듀라한 소믈렘은 너무나도 시시한 놈이었고, 그런 자가 서열 20위 안에 든다면 막달리의 수준도 알 수 있지 않겠나? 반면에…… 이곳에 모인 자들은 척 보기에도 하나하나가 대단하다. 이런 자들이 따르는 이라면 내 검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의 사탕발림은 나답지 않다. 하지만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간을 보는 것이었다.
오스웬의 표정이 바뀌었다. 찌푸려졌던 것이 풀리고 감탄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막달리는 하는 짓이 음습하여 진정으로 강한 자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제대로 보았구나. 단순히 무례한 녀석인 줄 알았건만 정확히 짚지 않았는가.”
더불어서 나는 오스웬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놈은 꽤 오만하다.
자신에 대하여 관대하고, 자신이 있는 부류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띄워 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도리어 좋아하는 편이다.
나는 이런 자를 몇 안다.
대하는 방식 역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내 검을 받아 주겠는가?”
하여…… 방향을 바꿨다.
대련을 하자는 게 아니라, ‘검을 받아 주겠냐.’는 이중적인 의미로 말을 했다.
듣기에 따라선 왕에게 기사가 검을 바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나는 막달리를 폄하했고, 듀라한 소믈렘을 잡아낸 전적도 있었다. 거기에 직접적으로 막달리와 오스웬을 비교했다.
그냥 비교만 했다면 ‘너에겐 자격이 없다.’는 소릴 듣기 딱 좋지만 나도 당사자라면 당사자였다.
전시 상황. 서로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이때 외지인이었던 내가 나타나 답을 내려 줬으니…… 오스웬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파브름의 새 영주 랜달프 브뤼시엘이여. 너의 검을 본관이 받아 주마. 안 그래도 본관이 남부의 사기 진작을 위해 생각한 게 있었다. 친선 형식으로 간단하게 검을 주고받자.”
처음으로 오스웬이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의도가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첫발은 디뎠군.’
이제 친선 대련에서 그가 오스웬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나는 그와 악수를 주고받았고, 잔뜩 얼어붙어 있었던 토리엄과 제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영주님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누가 보면 목숨이 일곱 개쯤 있는 줄 알겠습니다.”
제법 호화로운 방을 배정받은 뒤 그곳에서 토리엄이 내게 한 말이었다.
* * *
막달리는 지지 않는 싸움만 한다.
적을 눌러 버릴 수 있는 숫자로 습격을 반복하고 남부의 전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전쟁이 치러진 지 대략 보름이 지났건만 단 한 번의 승전보가 울리질 않았으니 남부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그럴 때 내가 승리했다. 듀라한 소믈렘을 상대로 두 배 이상 나는 전력의 차를 뒤집었다. 하물며 소믈렘마저 1:1로 상대하여 꺾었다.
역전의 용사.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사기 진작이라는 이벤트를 위해 사용할 패로 나만 한 이가 없다는 뜻.
그래서 대대적으로 친선 대련을 알렸다. 요새에 있는 모든 언데드가 이 대련을 보고자 모였다.
그 숫자만 어림잡아 20만!
‘상당하군.’
요새만이 아니라 남부에 흩어져 있던 언데드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마치 콜로세움과 꼭 닮은 건축물 안에서 대련이 진행되었다. 모든 이를 수용하지 못해 바깥에도 기나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스웬은 여섯 개의 검을 쥔 채 대련장의 중심부에서 주변을 바라보며 외쳤다.
“파브름 영지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은 좀비지만 듀라한 소믈렘을 상대로 승리를 일궈 낸 진정한 전사! 고작 400의 병력으로 1천의 적을 물리친 그 전적은 본관으로서도 매우 감명이 깊었노라!”
“와아아아!”
“랜달프! 랜달프! 랜달프!”
귀가 아플 정도로 수많은 이가 내 이름을 환호했다.
그나저나 소믈렘과의 전투가 있고 10여 일이 흘렀을 뿐이다. 그런데 모두가 알고 있다는 건…….
‘의도적으로 알렸다.’
소식을 듣자마자 오스웬이 손을 쓴 게 분명하다. 편지가 도달하기 전부터 내 이름이 이곳 요새에 돌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남부의 사정이 얼마나 급했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이었다.
“이 놀라운 전사는 소믈렘에 만족하지 못하고 본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본관은 이 전사가 그럴 만한 자격이 된다고 판단했다!”
오스웬은 여섯 개의 손을 더욱 높이 들었다.
“비록 전시라고 하나 막달리 따위가 우리 전사들의 뜨거운 혼을 막을 수는 없다! 축제를 즐겨라! 오늘만큼은 모두 축배를 들자!”
“와아아아!”
술통이 조달됐다. 술 자체로 취하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뜨겁다. 모두가 반쯤 넋을 놓은 채 대련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탁.
손을 내리고 바닥에 검을 꽂자 즉시 사방에 정적이 찼다. 대련의 시작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지만…… 시작 전에 확인할 게 남았다.
“남부 사령관 오스웬이여, 그 전에 묻고 싶다. 왕의 진정한 덕목은 뭐라고 생각하지?”
“……왕의 덕목이라?”
뜬금없는 물음에 오스웬은 즉시 답하지 못했다.
허나 내 의지는 확고했다.
“답을 들려주길 바란다.”
누가 이런 걸 물어보았겠는가.
그들은 사령관이다. 나락 군주라는 걸출한 황제가 이미 위에 있었다. 지저 세계의 존재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락 군주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내분이 일어났으며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사령관의 칭호를 고수하고 있지만…… 이건 황제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다른 모든 사령관을 배제한 채 황제의 보물 창고를 얻겠다는 건 결국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바라기에 생겨난 일이 아닌가.
은연중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으리라.
나는 그 정곡을 찌르고 들어갔다.
한참이나 뜸을 들인 오스웬이 말했다.
“왕의 진정한 덕목은…… 나태다.”
나태!
원하는 답이 나왔다.
내가 착용한 망토, 7대 죄악 중 ‘나태’에 해당하는 아이템의 설명에는 오스웬의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그 한마디는 지금 남부 사령관 오스웬이 내뱉은 말과 굉장히 흡사했다.
‘왕의 덕목을 나태라 칭하는 이. 이름이 같고, 7대 죄악을 착용하고 있다. 더는 우연이라 치부할 수 없다.’
나는 확신했다.
눈앞의 이는…… 황혼의 대장장이 오스웬이 맞다.
어째서 기억을 못하는지, 원래부터 둠 나이트였는지에 관해선 석연찮은 부분이 있지만 그런 것보다 내가 확신을 했다는 게 중요했다.
드보롱은 7대 죄악 모두를 어둠의 정령왕이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 나머지 행방을 찾을 방법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전율이 일었다. 마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답변 고맙다.”
나는 분노를 꺼냈다.
이제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최선을 다해 겨룰 것이다. 이제 막 잡은 하이엔달의 단서. 그것을 모두 펼쳐도 받아 낼 만한 상대였으므로.
* * *
단순히 황혼의 대장장이에 관한 사실을 확인할 셈이었는데, 오스웬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검을 받고, 왕의 덕목을 물어본 것을 ‘충신서약’이라도 한 것마냥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기꺼워했다. 영지로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대장의 직위를 내렸다.
무려 2천의 병사를 지휘할 권한이었다.
“……파격적이다 못해 입이 안 다물어지는 인사입니다. 남부 사령관께선 영주님의 무엇을 보시고 그만한 자리를 내준 것일까요?”
“나를 남부의 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겠지.”
성내에 개인적으로 준비된 연무장 안.
나는 1초도 쉬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마저 허투루 사용하지 않으며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토리엄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지만 하이엔달의 검술은 본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게 전부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그리고…… 걱정입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하면 반발이 클 텐데요.”
“그만한 업적을 세우면 된다.”
“사령관 막달리라도 잡으려는 겁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촤악!
분노가 빠르게 허공을 가른다.
나는 오스웬과의 일전을 되살피는 중이었다.
둠 나이트, 마계에서도 귀하게 취급받는 마수. 대공들도 쉽사리 가질 수 없었다. 그만큼 강했고, 여섯 개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술은 현란했다.
‘장갑에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대련의 와중에도 나는 오스웬을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스웬이 착용한 장갑.
7대 죄악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그 장비에서 기분 나쁜 마력이 느껴졌다.
그 마력은 내가 ‘정신 이상 상태’에 빠졌을 때 아이템에서 흐르는 것과 비슷했다.
께름칙하고 절제 불가능한.
“최대한 조심히, 사령관 오스웬이 착용한 장갑에 대해서 알아보라.”
“명령입니까?”
“명령이다.”
“그럼 따르겠습니다.”
토리엄이 고개를 숙이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쉭! 쉬익!
그 사이에도 나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틀이 더 지난 후 토리엄이 명상 중이던 나를 찾아왔다.
“절대로 장갑을 벗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무기보다 장갑을 소중히 여기며 물이 닿는 것조차 극도로 싫어한다고 하더군요.”
장갑만을 유독 아낀다. 단순히 7대 죄악 중 하나라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무기들도 굉장히 훌륭한 것들이었다.
물이 닿는 것조차 꺼려 할 정도라면 숨겨진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 이유를 알아내야겠군.’
여기서부턴 내가 할 일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명령은 따라야지요.”
피식 웃었다. 불현듯 크라스라가 떠오른 탓이다. 일단 명령만 내리면 어떻게든 해내려고 하는 태도가 닮았다.
‘빠르게 해결한 후 돌아가야 한다.’
동시에 던전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오쿨루스가 죽었으니 그 파동이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여파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다른 대공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아, 막달리에 관한 소문도 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조만간 영주님께도 연락이…….”
“내일.”
“예?”
“내일 출전한다더군.”
“가, 갑작스럽군요.”
“방금 막 알려 왔다. 슬슬 병사들을 보러 가려고 했던 참이다.”
토리엄이 도착하기 20분 전, 다크 워리어 하나가 다가와 출정 사실을 알렸다.
확실히 갑작스럽다. 하루 안에 모든 걸 끝마치려면 바로 움직여야 했다.
몸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돌아갈 것이라면 그 전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얻어야겠지.’
여기서만 얻는 게 가능한 것들.
그것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성장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단순히 스스로를 몰아붙여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비정상적이다.
이 세계 자체가 내 성장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이왕지사 딛게 된 땅.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고 지구로 돌아가거든, 나머지 대공들과의 접전에서도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