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41화
공작 디펠라와 후작 아나스타샤, 백작 아모른, 후작 제네랄드…… 판데모니엄 파벌의 네 마족이 한데 모였다.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짓고선 전방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보통의 때라면 같은 파벌이라도 네 마족이 모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사안이 중요한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눈앞에서 장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견 그렇게 보일 뿐 실상은 한쪽의 일방적인 유린과 다를 게 없었다.
다크 엘프를 비롯한 소수의 천사와 격이 높은 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물량의 마수들을 네 마족이 퍼부어 대고 있는 것이다.
크라스라, 마고, 타쉬말…… 확실히 강하지만 상처가 가득하고 지쳤다. 거대한 바위에 정을 박고 계속해서 두드린 결과 금이 가기 시작했다.
“15층에 엄청난 게 있다더니, 저항이 거세군.”
후작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던전에 남아 있던 모든 마수가 모여서 자신들의 발걸음을 막고 있었다. 던전을 친 초창기 이후로 이만한 저항은 처음이었다.
공작 디펠라가 피식 웃었다.
“그래 봐야 발악이다. 1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막아서던 마수들은 이제 거의 없어. 랜달프 브뤼시엘…… 이만한 전력을 숨겨 놓고 있었다니, 판데모니엄 님의 원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뚫는 것도 힘겨웠겠지.”
판데모니엄은 대공들 중에서도 가장 노괴다. 마도에 정통하고 고루고루 지식을 갖췄다. 던전의 마력을 뒤흔들어 충격을 주는 방법쯤은 간단하게 고안해 낼 수 있었다.
이 던전의 주인이 랜달프 브뤼시엘임을 알아낸 것도 판데모니엄이었다.
덕택에 진격이 쉬웠다. 지능이 낮은 마수들의 통제권을 상실시켰고, 요정이 이쪽의 움직임도 살필 수 없게 만들어서 전략적인 우위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1년…….”
아나스타샤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작년 마계 옥션에서 랜달프 브뤼시엘의 죽음이 확인됐다.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오쿨루스와 전쟁을 벌이다가 산화했음을 확신했고…… 그 과정에서 판데모니엄은 랜달프 브뤼시엘의 던전을 특정해 내기까지 하였다.
여기까진 문제가 없다. 주인이 없는 던전. 잡아먹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랜달프 브뤼시엘이 남긴 저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개 마족이 고작 3년 차에 가질 수 없는 질과 숫자의 마수.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었다. 하여 네 명의 마족이 달려들었다. 그 시간이 벌써 1년째에 접어들었다.
도중 판데모니엄의 원호로 최상급 마수들을 공략해 내지 못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아무런 충원 없이 1년을 버텼다.’
빠득!
아나스타샤가 이를 갈았다.
1년. 그간 14층까지밖에 못 뚫었다.
던전의 주인이 없어서 병력의 충원을 하지 못할 텐데도.
필사적으로 버텼다.
기가 질리다 못해 할 말도 잃었다.
그나마 15층을 사수하고자 남은 마수들을 총동원시킨 듯싶었다.
승기는 거의 가져왔다. 이제…… 쐐기만 박으면 끝이다.
그러자 아나스타샤의 옆에 선 디펠라가 말했다.
“15층에서 느껴지는 존재감. 세계수에 들어섰을 때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강렬한 느낌이 든다. 판데모니엄 님께서도 그것을 반드시 확인하고 가져오라 하셨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었을까? 후후.”
네 마족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것.
그것은 15층에 숨겨진 ‘무언가’였다.
랜달프 브뤼시엘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말도 안 되는 기행을 선보였다. 그 압도적인 포인트 수치는 다른 마족이 흉내 내지 못할 수준이었으니…… 오쿨루스가 편법을 사용해서 비슷한 흉내를 내긴 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하여, 랜달프 브뤼시엘이 매년 막대한 포인트를 모은 비법이 15층에 있으리라고 네 마족은 은연중 생각하고 있었다.
“슬슬 끝을 내야겠구나.”
디펠라가 움직이자 그 뒤를 거인이 따랐다.
티탄!
최상급 2Lv의 마수. 온몸이 철갑으로 둘러싸인 육탄전의 대가다. 천하의 기간테스도 티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작년 마계 옥션에서 구매하였으며 그 힘은 기대 이상으로 놀라웠다.
쐐기를 박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존재였다.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디펠라를 비롯한 다른 마족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 * *
붉은 창이 허공을 가른다.
철퍼덕!
힘을 잃은 신체가 바닥에 누웠다.
“끄으으…….”
크라스라. 상대 마족들이 던전을 침략할 초창기부터 무수히 적과 부딪혀 온 불굴의 전사.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건만 한참이나 깎여 나간 바위는 전처럼 단단하지 못했다.
크리슬리가 적의 함정에 빠져서 치명상을 입은 이후 그는 더욱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일어서야 한다.’
손가락을 놀려 바닥을 짚어 봤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깨와 허리를 관통당해 잘못하면 불구가 될 수도 있는 상태였다.
크라스라가 쓰러지자 수많은 마수가 주변을 감쌌다. 홀로 백 마리가 넘는 마수를 쓰러트렸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는 가망이 없었다.
‘지켜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쓰러지면 그 뒤에는 근원의 나무가 있었다. 근원의 나무는 다크 엘프의 희망이었고, 안락한 보금자리였다. 그곳에서 치료 중인 크리슬리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아니된다. 겨우 찾은 장소다.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며 정착하자고, 반드시 지키자고, 모두가 다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던전 마스터가 죽고 위태로워졌다. 주인 없이 1년이나 버틴 게 도리어 대단할 따름이지만…….
크르르!
웨어 울프가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크라스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의지는 모든 걸 초월하지만 현실의 벽도 무시할 순 없었다.
“이얍!”
그때였다. 이히가 요정 기사의 검을 휘두르며 날아왔다.
요정 기사의 검에 빛이 서렸고, 그 빛은 악한 것을 쫓아내는 힘이 있었다.
웨어 울프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주변의 마수들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요정님…….”
“더는 말하지 마!”
“부디 크리슬리와 저희의 보금자리를…….”
“죽으면 안 돼. 이히가 허락 안 해. 못해!”
보석 방패를 든 이히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지난 시간 동안 이히에겐 책임감이 생겼다. 이 모든 일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자책하며 매일을 후회로 보낸 탓이다.
“더는 안 잃을 거야. 이히가 잘못했으니까 죽지 마. 죽더라도 마스터가 돌아오고 나서 죽으란 말이야, 히잉.”
기세 좋게 나섰지만 공포는 어쩔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검을 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고 주변을 둘러싼 마수를 향해 돌격했다.
샤벨 타이거 무리와 타쉬말, 마고가 접전을 벌이고는 있지만…….
티탄과 마족들이 나선 순간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역전되었다.
“타쉬말이라 하였던가? 설마 천사마저 타락시켰을 줄은 몰랐다. 랜달프 브뤼시엘, 살아 있었다면 무척 귀찮은 존재가 되었겠어.”
네 마족 중 리더 격의 존재인 공작 디펠라가 티탄과 함께 타쉬말을 상대했다.
머지않아 타쉬말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이후 학살이 시작됐다.
나머지 마족들이 마고를 압박하자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마스터, 이히가 잘못했어요.’
이히는 눈을 감았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것은 벌이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이히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이히는 한 번만이라도 마스터를 보고 싶었다. 미움을 받아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빌고 또 빌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찰나지만 영원 같은 시간의 뒤로 주변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넌……?”
“아악!”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랜달프 브뤼시엘!”
마족들이 경악했다.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허둥지둥거렸다.
콰르릉!
천둥이 내리쳤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키에에엑!
크아아아!
마족과 마수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이히는 눈을 떴다.
동시에…….
“마스터.”
믿기지 않았다.
꿈일까?
자신의 바람이 만들어 낸 환상인 것일까.
아니, 허상이라도 좋다. 이게 거짓이라면…… 그래도 괜찮다.
“마스터! 히잉, 마스터!”
이히가 목 놓아 울었다.
* * *
나는 분노와 황제의 검을 들었다.
마족들, 그리고 마수들. 14층에 모여서 내 던전을 침략하는 중이었다.
기분이 더럽다.
허락하지 않은 이들이 이처럼 많이 들어온 것이다.
이곳은 오로지 나만의 던전이고, 저들은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도둑이 집에 들어왔는데 주인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황제 폐하, 어찌하시겠습니까?”
막시움이 물었다.
어찌할 것이냐고?
답은 뻔했다.
“허락받지 않은 존재들, 그들을 구분하여 모두 죽여라.”
내 것을 탐했으니 나도 마음대로 저들의 목숨을 탐해야겠다.
“다른 마족들은……?”
“내 사냥감이다.”
짤막하게 말했다. 양보는 없다. 익숙한 얼굴의 마족들. 저들은 내 먹이다.
“신 막시움, 황제 폐하의 명을 따릅니다.”
“저도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막시움과 오스웬이 곁을 떠났다.
나도 분노와 황제의 검을 들고 바닥을 박찼다.
머지않아 마족들이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확인하고 나서는 늦다.
저들이 성장한 것 이상으로 나는 강해져 있었다.
‘다크 소드.’
후우웅!
검이 까맣게 물든다. 그 위에 달빛이 덧씌워졌다. 보다 정교하고 완벽해진 기술. 그리고 압도적인 성장을 발판으로 나는 이미 저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완전히 늦지는 않았다.
그리고 늦지 않았다면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콰르르릉!
뇌신이 울부짖으며 튀어나왔다.
영 기분이 언짢은지 즉시 주변의 적들을 태워 버리기 시작했다.
공작 디펠라, 후작 아나스타샤.
백작 아모른, 후작 제네랄드.
이 네 명의 이름을 가벼이 되뇌며 나는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랜달프 브뤼시엘!”
나를 본 디펠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외쳤다.
1년 8개월 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불현듯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믿기지 않을 테지. 그러나 현실이었다.
나는 현존했고, 저들을 죽이고자 이곳에 나타났다.
“죽었던 놈이 진정 살아 돌아왔단 말이냐? 그러나 이미 늦었다. 너 혼자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디펠라는 애써 여유로운 척 팔짱을 꼈다.
승기는 한참 기울었다. 아무리 특이한 마족이라 하더라도, 백작 나부랭이 혼자서 상황을 타개하기엔 너무 늦었다. 불가능하다.
“너희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그러나 내 눈은 타오르듯 강렬하게 디펠라와 마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이라면 불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과 달리 나는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진실로 ‘초월’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그 근처도 가지 못한 것들이 내 가능성을 가지고 판별하는 건 그야말로 웃긴 일이었다.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들에게 선고했다.
“그 죄, 죽음으로 갚으라.”
내가 없는 1년 8개월 간, 그들은 마음껏 활개 쳤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귀환!
내가 돌아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저들에게 남은 것은 처절한 응징…… 파멸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