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50화
이마 위에 놓인 외뿔은 마치 유니콘을 떠오르게 만들었지만 근저에 흐르는 마력은 굉장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신성력에 가까우나 그렇다고 신성력이라 부르기엔 애매모호한.
언뜻 보면 사슴과 비슷하다. 그러나 얼굴은 용과 닮았다. 말의 굽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정체가 의심스럽다.
키메라인가?
여러 생명체를 조합해서 만든 키메라라면 저와 비슷한 형태를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키메라라고 보기엔 생명력이 넘친다.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확인을 하기 위해서 나는 심안을 열었다.
이름: 기린
능력치:
힘 105 지능 100
민첩 90 체력 80 마력 105
잠재력(480/???)
특이 사항: ‘모왈기빈왈린(牡曰麒牝曰麟)’이라 하여 수컷은 ‘기(麒)’라 하고 암컷을 ‘린(麟)’이라 부른다. 털 달린 짐승의 우두머리이며 사방의 중심을 맡고 있는 신성한 신수이다. 본래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신수이나 수많은 인간의 기원 속에서 태어났다.
스킬: 신성화(Epic), 기린아(Epic), 상상 결계(Ex Epic), ???, ???
심안의 등급이 에픽으로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물음표로 표기되는 게 있었다. 아무래도 전혀 다른 마력의 흐름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이 아닌지 예상할 따름이다.
‘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특이 사항의 그 문구를 주시했다. 한마디로 ‘창조’됐다는 말. 하기야 진짜 신이나 신수가 소환된다면 균형이 단번에 어그러진다. 삼족오도 용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졌지만 내가 본 바로는 마룡에 비하면 반 끗발 정도 밀렸다. 삼족오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이리라.
구우우우우!
기린이 울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기린……!”
“오오, 진짜 수호신이 나타나셨다!”
하지만 환호는 잠시였다. 주변 세계가 반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태양이 아홉 갈래로 늘어났고, 산 위는 어느덧 바다가 되었다.
즉시 결계임을 알아차렸다.
성스러운 신수. 내 본질을 알아차리곤 공격적인 태세로 접어든 것이다.
‘단순 능력치상으로는 내가 우위이나…….’
문제는 스킬이다. 상상 결계 스킬만 하더라도 익셉셔널 에픽 등급이었고, 뒤에 물음표가 쳐진 두 개는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진 않을 것 같군.’
기린은 거대한 몸집을 움직였다. 나를 밟아 버리고자 곧장 말굽을 내리찍었다.
콰아앙!
동시에 해일이 덮친다. 상상 결계. 모든 게 허구이지만 허구가 아니다. 이곳에서 상처를 입으면 실제로 다치게 된다. 인간들을 따로 격리시켜서, 이 결계 안에는 오로지 나와 기린만이 존재했다.
인간들은 결계 바깥에서 나와 기린의 싸움을 그저 지켜볼 따름이었다.
어찌한다…….
찰나의 고민. 그러나 답은 뻔했다.
황제의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이 까맣게 물들고 주변의 모든 빛을 집어삼켰다. 아홉 개로 늘어난 태양빛이 무척이나 따가웠지만 다크 소드를 발현하자 조금은 나아졌다.
“그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 주마.”
지저 세계를 다녀오기 전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터다. 막상 마주하니 졌으리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곳을 다녀온 이후 나는 한계를 깼다. 한 발자국이 아니라 열 발자국은 더 나아간 셈이다.
물론 죽이진 않을 것이다.
먼저 힘으로 굴복시킨 뒤 내 의도대로 따라가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만한 녀석이라면 판데모니엄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엔 적합하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태도로 보아 이 기린이라는 걸 굉장히 신성시 여기는 것 같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린은 인간들에게 따로 해를 끼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기린과 인간들을 조화시켜 판데모니엄의 던전, 혹은 그 휘하 마족들의 던전을 친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 달이 아니라 몇 달의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다.
콰르르릉!
맑은 하늘에서 수많은 벼락이 내리꽂혔다.
단순 능력치만 보자면 내가 밀릴 건 하나도 없었다. 힘 수치를 제외하면 모든 게 내가 높았으므로. 하지만 능력치만큼 중요한 게 스킬이다. 이 상상 결계는 생각보다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왜 상상 결계인지를 여실히 보여 줬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이적들이 이 결계 안에선 끊임없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하웁!
기린은 아홉 개의 꼬리를 바짝 세우며 아홉 개의 태양 중 하나를 삼켰다. 그러곤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태양을 내뱉었다.
화르르륵!
세상을 삼켜 버릴 듯 다가오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도 조금이나마 경각심을 느꼈다.
‘대충은 못하겠군.’
진지하게 임해야 할 듯했다. 대충 손을 봐주는 선에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파라노말.”
[파라노말의 축복!]
[높은 마력(110)과 지능(105) 보정으로 마력의 상승률이 1.2배 상향되었습니다.]
[30분간 마력이 +6 상승합니다.]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또 있었다. 초월한 능력치로 말미암아 아이템의 효율이 증대된 것.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내가 사용하자 도구의 한계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 듯싶었다.
어쨌거나 이로써 내 마력은 116에 달하게 되었다. 이는 기린을 한참이나 웃도는 수치이며…… 저 태양을 정면으로 깨부술 힘이었다.
나는 오만의 불꽃을 더욱 강렬하게 태웠다. 거기에 뇌신의 힘까지 더했다. 일전 티탄을 쓰러트릴 때 사용했던 힘이다.
‘출력 싸움이라면 밀릴 것도 없지.’
상상 속의 세계라고는 하나 나는 그 상상조차 깨부술 초월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다. 애당초 초월이란 의미 자체가 현실을 벗어나 있는데, 상상 결계 안이라 하여 그 영향을 크게 받을 것도 없었다.
단지…… 좀 귀찮을 뿐.
오만의 불꽃과 뇌신의 힘이 합쳐지자 다가오는 태양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었다. 나는 그것을 냅다 던졌다.
직후 태양과 부딪혔고 꽈르르르릉! 소리와 함께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상상 결계의 모든 범위를 태워 버렸으며 동시에 결계 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압도적인 출력의 여파를 결계가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이다.
기린은 잠시 당황하며 뿔을 높이 치켜세웠다. 뿔이 타오르며 결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금이 가던 결계가 다시 원상 복구되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와 같았다.
‘부숴야겠군.’
이 결계는 귀찮다. 지금도 계속해서 나를 노리고 각종 천재지변이 덮쳐 오고 있었다. 땅이 솟아나거나 꺼지거나, 용암이 해일처럼 달려들기도 했다. 그것을 버티지 못할 육신이 아니지만 마냥 맞아 줬다간 끝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오만의 불길을 끌어모았다. 방금 전과 다르게 최대한도로 부딪혀서 결계를 깨부술 작정이었다.
치익! 치이이익!
뇌신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니라 아예 뇌신 자체를 오만의 불길 속에 넣었다. 뇌신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섞여 들어갔다.
거대한 힘이 곧 주먹만 한 크기로 압축되었다. 허나 안에 든 힘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랬다.
손 위에 든 그것을 결계를 향해 던졌다.
빠른 속도로 나아간 압축된 힘이 결계에 부딪히자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걸 빨아들였다.
결계의 방어막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쥐어뜯듯이 결계가 무너지며 구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기린의 외뿔이 보다 강렬하게 불타올랐지만 부서지는 속도보다 재생 속도가 느리다. 이대로는 머지않아 결계가 부서질 판.
―멈추세요!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울리며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린이 내게 심상으로 전한 것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 힘이 새어 나가면 바깥의 모든 인간이 죽습니다!
오호라.
단순히 결계가 무너지면 나와의 싸움이 힘들 것이라 판단해 결계를 재생하는 줄 알았다. 이제 보니 바깥의 인간들을 걱정해서 저러는 모양이었다.
바깥 인간들의 기원으로 태어난 신수이기 때문일까?
그보다 대화가 통한다. 일이 더 쉬워졌다.
나는 녀석의 제대로 된 저의를 알고 싶었다.
“저들을 지키고 싶은가?”
―사악한 자! 어찌하여 저 무고한 인간을 모두 죽이겠다는 겁니까?
“무슨 소리인 줄 모르겠군. 먼저 공격한 건 너다. 나는 되받아친 것에 지나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이어 기린과 대치하며 피식 웃었다.
“저들은 부랑자다. 갈 곳을 잃고, 할 일을 잃고, 나만을 의지한 채 여기까지 도달했다. 저들의 기원이 너에겐 닿지 않은 건가? 진정으로 저들이 원하는 게 자신의 생명일 것 같은가?”
아니다. 나를 따르는 인간의 대부분은, 이제는 편해지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 더는 고통받는 게 두렵고 싫어서. 그래서 ‘천국’을 운운하며 나를 따른 것이다.
스스로의 목숨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기원을 흡수한 기린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고개를 돌려 지상의 불안정한 인간 무리를 바라봤다.
“저들은 이제 누구라도 상관없는 거다. 내가 악하다고 하더라도, 저들의 복수를 해 주겠다면 능히 악한 나를 따를 것이다. 낙원으로 데려가 주겠다면 나보다 더 악한 놈이 있더라도 따를 터다. 그 기원을 너는 알고 있음에도, 내 본질만을 보고 공격했다.”
인간들을 끌고 온 건 나다. 그들이 진정으로 믿는 것도 나다. 기원 속에는 그러한 믿음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럼 당신은 악하지 않다는 건가요?
이제 막 태어나서 제정신이 아닌 걸까? 내 말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아서 재차 정정해 주었다.
“나는 악하다. 누구보다 악하지. 그러나 그 악이 아무에게나 적용되진 않는다. 내가 인정한 자, 혹은 내 적이라 불리는 놈들. 내 악이 적용되는 대상은 크게 이 둘뿐이다.”
인간들은 아직까진 논외다. 내게 이빨을 들이밀지 않았고, 설령 들이민다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을 수준에 불과했다. 기린도 그 뜻을 드디어 이해했는지 심상 속으로 목소리를 전해 왔다.
―그럼…… 알겠어요, 당신을 인정합니다. 그러니 결계를 부수는 행위를 멈추세요.
“한 번 나간 힘을 회수하는 법 따윈 모른다. 알아서 해라.”
팔짱을 낀 채 나는 방관자가 되었다. 30미터에 다다르는 거대한 몸집의 기린이 질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결계를 재생하는 데 주력했다.
결계를 해제하고 기린이 지상에 내려왔다.
이미 나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져 있었으나 상당히 피로한 모습이다.
하지만 할 일이 있는 듯 기린은 멈추지 않으며 사람들의 앞에 섰다.
기린의 전신에서 불꽃이 타오르더니 점차 모습을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알몸의 여인이 기린을 대신하여 자리에 나타났다.
타는 듯한 붉은색 머리를 지닌, 몽환적인 여인이었다. 이마에 난 하나의 뿔이 아니라면 인간과 크게 다를 바도 없었다.
하지만 그 자태에 사람들은 잠시 넋이 나갔을 정도다.
“나의 이름은 린. 당신들의 기원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꿀꺽!
사람들이 침을 삼켰다. 모두가 집중하며 여인을 바라봤다.
단순히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범접하지 못할 분위기를 그녀는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들을 천국으로 데려다줄 수 없습니다. 그와 비슷한 ‘꿈’을 꿀 수 있도록 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 불과합니다. 진정으로 그것을 원합니까?”
침묵이 찾아왔다. 단지 상상만 하는 건 이미 숱하게 해 왔다. 그들은 현실로써 행복해지길 바라고 또 바라는 중이었다.
린이 이어서 이야기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을 괴롭힌 자들이 나도 무척이나 밉습니다. 우리의 땅을 짓밟고 소중한 걸 앗아 간 자들. 나는 그들을 벌할 것입니다.”
후우웅!
뿔이 다시금 타올랐다.
타오른 불꽃이 퍼지며 수만의 사람들에게 하나씩 흡수되었다.
이윽고 그녀가 힘을 담아 읊조렸다.
“그리고…… 모든 혼란을 종결시킬 자가 이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혹은 그녀는 성군이 될 것이며 이 나라의 진짜 수호자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