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51화
* * *
나는 유심히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기린이 인간들에게 불씨를 심었다. 어떤 종류의 불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것이 아마도 ‘기린아(Epic)’ 스킬이 아닐까 싶었다.
특정한 계기를 겪으면 발현하는 불씨. 거기다가 성군이라 함은 결국 지도자라는 뜻이다. 이곳에 모인 수만의 군중 속에서 한국을 이끌 진정한 지도자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들의 얼굴에 홍조가 서렸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기린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자신이 할 일을 깨달은 것 같았다. 어쩌면 기린이 심상으로 인간들을 조종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로써 나는 할 일을 전부 했다.
‘전할 말은 전부 전했다.’
상상 결계 속에서의 일이다.
나는 기린에게, 이 인간들을 짓밟은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잠시 방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판데모니엄. 놈과 놈의 휘하들이 이 땅을 짓밟았다. 유린했다. 나와 같은 마족이나, 그는 이 세계의 멸망을 원하고 나는 그의 멸망을 원한다. 선택은 자유다. 여기서 나를 적대하겠나, 아니면 인간들과 함께 판데모니엄을 치겠는가?
―당신은 그의 멸망을 원하면서 우리를 돕지 않겠다는 건가요?
―나는 마족이다. 인간들의 복수를 대신해 줄 순 없다. 그래서 너를 소환한 것이다.
―그 판데모니엄이라는 자가 당신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힘겨운 싸움이 될 겁니다.
―굳이 그를 칠 필요는 없다. 이번에 그의 휘하 마족 네 명이 죽었다. 나는 그들의 던전 위치를 알고 있지. 판데모니엄이 급히 마수나 마족을 파견했겠지만 그 숫자는 적을 터다. 그곳을 쳐라. 그리하면 복수의 진정한 발판이 마련될 것이다.
―복수의 발판…….
―나는 인간의 멸망을 바라진 않는다. 그보단 다른 마족들의 멸절을 원한다. 잘 생각하고 행동하라. 진정으로 네가 적대시해야 할 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다른 마족의 던전이 아니다. 시선을 돌리고 시간을 버는 게 훨씬 중요하다. 말이 최소한 한 달이지 본궤도에 오르려거든 몇 달이 있어도 부족하다.
그 시간을 기린과 인간들이 끌어 줄 것이었다.
더불어서 던전 공략에 성공하거든 가파른 전력의 상승도 맛볼 수 있으리라. 나는 언젠가 그들을 다시 지휘하며 제대로 다른 마족의 던전 공략을 시작하면 된다.
기린은 이미 판데모니엄 휘하 마족의 던전을 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다. 여기선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이제…….’
몸을 돌렸다.
이끌 자와 따를 자들이 결정됐으니 더 이상의 안내자는 필요 없으리라. 시기를 봐서 다시금 나타나는 게 오히려 더욱 ‘신비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그런 걸 좋아하는 편이므로. 모르면 모를수록,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혹은 신비할수록 더 잘 따르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구세주님!”
“어디를…….”
내가 등을 돌리자 인간들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그중 가장 먼저 도착한 게 유은혜였다.
“잠깐만요!”
유은혜는 번개의 마검사다.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것 또한 가능했다.
그녀가 앞을 막아서며 눈을 치켜떴다.
“당신은 누구죠? 그간 지켜봤어요. 하지만 도무지 모르겠어요. 왜 저에게 이런 익숙한 느낌을 가져다주는 거죠?”
대답을 하기 전까진 결코 보내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나는 백두산 천지의 중심부에서 이동 스크롤로 사라질 작정이었으나 잠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너에겐 아직 알 권리가 없다.”
“익숙한 목소리예요. 분명히 익숙한데…… 기억이 안 나요. 안개가 낀 것처럼. 그냥…… 그냥 알려 주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런 것을 아는 데 권리가 꼭 필요한가요?”
“강해져라. 모든 인간을 발밑에 두어라. 너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며 그때는 네가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불과 1년 8개월 사이 그녀는 몰라보게 강해졌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성장세를 유지한다면 시간문제이긴 하겠지만…… 나는 더욱 빠른 성장을 원했다.
하여 나는 품에서 양피지 두 장을 꺼냈다.
고급 수련의 방. 그것을 열 수 있는 일종의 티켓이다.
“그리고 더욱 빠르게 강해지고 싶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것을 찢어라. 나머지 한 장은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이에게 전하면 될 것이다.”
기대 이하의 성장을 이루고 있었을 경우엔 전해 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유은혜와 에드워드 윈저는 내 기대치보다 발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전생과는 달리 급격하게 변하는 현재 시대에서 인간들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면 안 된다. 끝까지 버티며 응전을 해 줘야 나로서도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기린의 말마따나 유은혜가 지도자로 발돋움한다면 그것도 나쁠 건 없었다. 인간들의 진정한 힘은 결집에서 나온다. 그 구심점이 되어 마족들을 타파하고, 나는 뒤에서 그녀를 조종한다.
나쁘지 않은 전개다.
“…….”
양피지 두 장을 건네받은 유은혜의 표정이 묘하다. 양피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끝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고 보자는 듯.
‘판데모니엄이 경각심을 가지게 하면 충분하다.’
놈은 나의 생환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연락이 끊긴 마족들을 수색하고자 대규모 부대를 보내올 가능성이 있었다. 바로 그럴 때 비어 있는 던전이 일제히 공격을 받게 된다면 움직이려는 부대를 돌릴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인간들의 피해도 상당히 불어나겠으나 크지는 않을 것이다. 설혹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더라도 유은혜와 에드워드는 산다. 수련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을 클리어하기 전까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로이, 너는 남도록.”
“예, 예에?”
만에 하나를 위한 대비다. 단순히 지켜보며 내게 경과를 보고하는 것쯤은 로이라도 할 수 있을 터. 로이를 통해 내가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성립된다면 치고 빠지는 전술이 훨씬 용이해진다.
로제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마스터 말씀 못 들었어? 그리고 마스터께선 두 번 말하는 거 되게 싫어하시거든? 로이, M3도 내가 가져갈게. 버팀목이 있으면 넌 매번 기대기만 하잖아? 이참에 그 소심한 성격을 좀 고쳐 봐!”
쌍둥이 남매임에도 로제는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로이가 울상을 지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렸다.
“마스터, 이제 갈게요?”
그러거나 말거나 로제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주억이자 로제는 이동 스크롤을 쫘악! 찢었다.
그와 동시에…… 빛이 번쩍이며 두 인영이 백두산 천지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던전으로 돌아오니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건 이히였다.
“오셨어요, 마스터.”
천천히 배꼽 인사를 하며 웃음기를 지웠다. 퍽 정숙해진 모습이지만 은연중의 어색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걸 연기라고 한다면 발도 아니고 발가락 연기라 자평할 수 있겠다.
“크리슬리와 타쉬말은 돌아왔나?”
“예, 안 그래도 2시간 전에 도착했답니다. 이히가 정성껏 보살펴 주고 있었답니다.”
입을 가리고 ‘오호호.’하고 웃어 본다. 평소라면 ‘이히히’하고 웃었을 터인데…… 등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전에 마스터,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이히가 성심성의를 다해서 꿀물을 타 봤답니다.”
이히가 손을 내밀자 어디선가 예쁘게 세공된 컵 하나가 딸려 왔다. 격이 높아지며 이런 묘기도 부릴 줄 알게 된 것이다.
“참고로 이 컵은 이히가 만들었답니다.”
장족의 발전이다. 이런 세련된 디자인을 이히가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뭐든지 바뀌는 법이었다.
꿀꺽!
단박에 들이켰다. 청량한 느낌이 목 안을 가득 채웠다.
“맛있군.”
“이히히!”
컵을 휙 던지자 이히가 재빨리 그것을 받았다.
“크리슬리와 타쉬말을 봐야겠다.”
“네, 마스터. 이히가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다시 한번 정중히 배꼽 인사를 한 이히가 앞장서서 날아갔다.
이히의 정원.
타쉬말과 크리슬리는 같은 방에서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집 주변을 윙윙 날아다니는 킹 비나 벌들이 시끄러울 법도 하건만 꿈쩍도 않는다.
‘마력의 질과 양 모두가 상승했군.’
타쉬말은 세 쌍의 날개가 더욱 커졌고, 크리슬리에게선 그야말로 ‘묘한’ 마력이 풍겼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더욱 정순해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성장했을까?
호기심에 심안을 열었다.
이름: 크리슬리
직업: 마스터 가디언(모든 능력치+5)
칭호 :
* 진마룡의 피를 잇는 자(Epic, 지능마력+6)
* 달의 가호를 받는 자(Ex U, 마력+8)
* 균형을 이룬 자(Epic, 모든 능력치+3)
능력치 :
힘 72(+8) 지능 94(+14)
민첩 68(+8) 체력 68(+8) 마력 80(+26)
잠재력(382+64/484)
특이 사항: 극악의 확률을 뚫고 진마룡 아오진과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 죽음의 왕 가낙이 가진 힘의 균형을 맞췄습니다.
스킬: 대규모 시체 조종술(Ex U), 언데드 제조(Epic), 태양과 달의 여왕(Epic), 죽음의 왕(Epic)
적용 중인 스킬&아이템 효과: 죽음 지팡이(Ex U, Set, 마력+4)
이름: 타쉬말
직업: 타락 천사
칭호 :
* 어둠에 물든 빛의 천사(Epic, 지능마력+6)
* 번뇌와 깨달음(Epic, 지능마력+5)
능력치 :
힘 88 지능 88(+11)
민첩 90 체력 83 마력 85(+11)
잠재력(434+22/471)
특이 사항: 세상에 빛을 전파하는 사품의 천사였으나 타락했습니다. 수많은 번뇌와 깨달음을 반복한 결과 그녀는 더욱 완전해졌습니다.
스킬: 어둠의 전파(Epic), 수없이 쇄도하는 어둠의 창(Epic), 어둠의 우레(Epic)
착용 아이템: 굳건한 신념(Ex U)
엄청난 성장이었다.
이 정도면 다른 최상급 마수에 전혀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도리어 그보다 강할 수도 있었다.
최상급 2와 3레벨 사이. 이 정도라면 충분히 기대 이상이다.
크라스라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았다.
“오, 오셨습니까?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크리슬리가 내 기척을 느끼고 어렵사리 상반신을 들었다. 파리한 안색.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있었다.
“더 쉬어라.”
“아닙니다. 오랜만에 뵈니…… 굉장히 기쁩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머물러 있었던 거지?”
“모르겠습니다. 3년이 조금 덜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며칠이 지나지 않았더군요.”
복잡한 표정이었다. 3년이나 지났음에도 진짜 3년이 아님을 슬퍼해야 하는지, 기뻐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고생했다. 너는 강해졌다.”
“마스터의 기대를 충족시켜서 다행입니다. 아, 그리고…….”
크리슬리가 품에서 조각난 판 하나를 내게 건넸다.
“수련의 방을 나설 때 제게 주어진 것입니다.”
“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군.”
묵직한 무게. 뭉툭하니 억지로 잘려 나간 모양새다. 이상한 벽화 같은 게 그려지다가 말았다. 깨진 조각 모두를 맞춰야 무슨 물건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 심안으로 보아도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이름- 균형의 조각(???)
설명: 고급 수련의 방을 완벽하게 클리어한 이에게만 주어지는 조각. 그중 균형을 담당하는 조각이다. 다섯 개의 조각을 모으면 조각들의 종류에 따라 특수한 효과가 발휘된다.
이게 전부였다. 어쨌거나 다섯 개를 모아야만 발동이 되는 것이었다.
타쉬말의 품에도 이와 비슷한 조각 하나가 꼭 안겨 있었다.
‘저건 깨달음의 조각이군.’
얼추 두 개가 모였다.
유은혜에게 준 입장권 두 개가 따로 있으니 나중에 가서 회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불현듯 크리슬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앞으로는 제가 검이 되어 적을 무찌르겠습니다.”
“크라스라의 대신인가?”
크라스라, 녀석은 내 명령을 칼 같이 따랐다. 누구보다 앞서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들었다.
“예.”
과연. 그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건가.
“좋다. 너는 앞으로 내 검과 방패가 되어 적을 무찔러라. 그리고…… 판데모니엄의 목은 너에게 주겠다.”
“감사합니다.”
크리슬리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크라스라를 죽이고 다수의 다크 엘프가 죽은 건, 어디까지나 판데모니엄이 내 던전의 위치를 찾아낸 후 공격했기 때문이다. 마족 넷을 죽였다고 복수심 전부를 태울 수는 없었다.
나는 작게 읊조렸다.
“몸을 회복해라. 바빠질 것이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제가 다음 행보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계 옥션의 준비를 해야겠지.”
마계 옥션!
시간을 벌었으니 다음은 던전을 회복하고 마계 옥션을 준비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