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53화
―…….
드보롱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능히 놀랐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균열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만큼 한가한 상황은 아니지만 앞으로 드보롱과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쥐려거든 ‘여유’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정말 랜달프 님이십니까?
“나 의외에 그 이름을 사용하는 마족은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분명히 시스템상에서 지워진 걸 확인했는데…….
“그런 것도 확인할 수 있나?”
마족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드보롱이 답했다.
―기, 기다려 주십시오.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길게 걸리진 않을 겁니다.
“기다리고 있지. 마침 내게도 손님이 왔군.”
손을 빼냈다. 균열은 닫히면 다시 열 수 없다. 드보롱이 따로 시스템의 눈을 피해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마계 옥션까지 고작 2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드보롱이 돌아오기 전까지 균열을 열어 둘 수밖에 없고, 시간이 지연되자 필연적으로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균열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고대의 타락한 정령입니다. 적어도 근 천 년간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균열 속에 있었을 줄이야! 지금이라도 균열을 닫을까요?”
나타난 존재를 보고 오스웬이 놀라며 말했다.
두터운 손, 어둠에 잠긴 본체, 퀭한 눈 두 개와 어둠만이 허공에 떠다녔다. 고대의 타락한 정령이라…… 급을 찾자면 충분히 상급 상위 레벨이었다. 그런 정령이 한 번에 10마리가량 나타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처리하마.”
검을 뽑았다. 돌려받은 분노와 황제의 검을 양손에 쥔 채 타락한 정령들을 바라봤다.
“저는 균열을 유지해야 하기에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충분하다.”
정령들의 속성은 어둠 그 자체였다. 내가 가진 다크 소드와 달빛의 마력으로는 타격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성만을 따졌을 때다. 나와 녀석들은 애당초 ‘격’ 자체가 다르다. 초월자의 격을 가진 내 공격은 속성의 상성을 무시한다.
고작 저런 놈들 열 따위에 힘들게 연 균열을 닫을 순 없는 노릇이다.
고오오오.
어둠 속을 뚫고 타락한 정령들이 다가왔다. 공격적인 성향밖에 남지 않은 듯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발자국 더 빨랐다.
촤아악!
일격에 하나를 베었다.
그러자 길게 베인 정령이 둘로 분열되었다.
‘조금 귀찮아지겠군.’
과연, 타락한 정령들은 자기 복제가 가능한 모양이었다.
‘분열할 수 없을 때까지 잘게 조각내면 되겠지.’
다크 소드는 재생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만 분열은 다른 분야였다. 어쨌거나 그다지 대수롭게 생각하진 않았다.
분열이 가능하다면 그게 안 될 때까지 공격하면 그만이었다.
고대의 타락한 정령들을 시작으로 오염된 노움, 썩은 위액 고렘 등이 균열을 통해 나타났다. 다행히 콘테고놈과 같은 허무의 존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더 끌면 모르는 일이었지만 드보롱이 시기적절하게 연락을 주었다.
―정말…… 살아계셨군요. 놀랐습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스팍!
썩은 위액 고렘의 머리를 등분하며 말했다.
내 꿈은 아직도 유효했다. 지금은 텅 빈 마왕의 좌에 앉아 크게 웃어 보는 것! 적어도 그 꿈을 이루기 전까진 죽을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었다. 죽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주변의 소리가 요란합니다. 혹시 지금 전투 중이십니까?
“별일 아니다.”
화르륵!
썩은 위액 고렘의 남은 잔재를 오만의 불꽃으로 태웠다. 그제야 사방이 잠잠해졌다.
―오오, 이제 좀 조용하군요. 그나저나…… 궁금합니다. 어디에 가 있으셨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쉽게도 해 줄 이야기는 없다.”
―이런…… 시스템의 눈을 피한 방법을 꼭 듣고 싶었는데요. 값은 치르겠습니다만…….
드보롱의 목소리가 제법 절실했다. 하기야 시스템의 허점은 어지간해선 없는 편이었고, 찾아도 막대한 희생이 동반되어야 한다. 어둠의 정령은 그 눈을 피하는 방법이 간절할 것이다.
허나 지저 세계는 이미 시스템의 안에 편입되었다. 그곳의 세계와 내 던전에 연결점이 생성되었고, 수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었기에 나로선 손해는 아니었지만 드보롱에겐 안타까운 일이었다.
“드보롱, 그따위 이야기를 하자고 내가 너에게 연락한 줄 아나?”
―흠, 아니겠지요. 랜달프 님께선 굉장히 시간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었으니. 따로 저에게 연락했다는 건 마계 옥션의 출입 여부 때문입니까?
타당한 추론이다. 실제로 마계 옥션의 출입과 관련하여 연락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었다.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함이다.”
―제안?
“드보롱, 경매의 방식을 바꿔 볼 생각은 없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질질 끌며 말을 돌리는 건 내 성미에 안 맞다.
어차피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내 쪽이었다.
―그건 또 뜬금없군요. 경매 방식을 바꾸자니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드보롱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경매 물품을 더 추가하는 것이다. 마족들이 얻은 아이템을 말이다.”
―한마디로 서로 경매 물품을 올릴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입니까?
“바로 그렇다. 대신 참가한 자의 익명성이 보장되어야겠지.”
―그건 불가합니다. 지금 와서 바꾸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정령왕께선 이미 정해 놓은 규칙을 바꾸시지 않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
규칙을 바꾸지 않는다고 못 박았지만 자신의 이득이 걸리면 생각도 바뀌는 법이었다.
“본격적인 경매 시작 전에 흥을 돋우는 의미로 진행해도 충분하다. 참고로 나는 근원의 정수를 경매대 위에 올리려고 한다.”
―근원의 정수를……!
근원의 정수. 이미 한 번 어둠의 정령왕 아도니스가 탐을 냈던 아이템이다. 7대 죄악을 조건으로 교환을 청한 일이 있었다.
한계 돌파를 강제적으로 시켜 주는 아이템. 일단 한 번 깨기가 어렵지 한계를 깨면 그다음 길을 찾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그래서 아도니스가 근원의 정수를 갈망하는 것이고, 전생에서 대공들이 한계 돌파의 방법을 숨긴 이유이기도 하다.
한데 그것을 경매장에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드보롱이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는지 드보롱이 물었다.
―랜달프 님, 저로선 랜달프 님의 속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저의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정녕 모르겠는가?”
―그래서 묻지 않습니까?
드보롱도 슬슬 약이 오른 듯싶었다.
그들은 나에게 호의를 보였고, 당연히 근원의 정수를 아도니스에게 넘기리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아무런 변화 없이 판을 뒤집을 순 없었다.
“아도니스, 그가 경매의 참가자로 나오길 바란다.”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내용은 충분히 파격적이었다.
판을 뒤집을 묘수!
나는 아도니스를 표면으로 끌고 나올 작정이었다.
더 이상 방관자의 위치에서 지켜볼 수 없도록!
―……미쳤군요. 정령왕께선 마계 옥션의 책임자이십니다.
“책임자는 참가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나?”
―형평성의 문제가…… 정령왕께서도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네가 정할 문제가 아니다.”
최종 결정은 결국 아도니스의 판단에 달렸다. 드보롱이 아무리 변을 늘어놔도 아도니스가 하겠다면 하는 거다. 드보롱이 아도니스의 최측근 중 하나라고는 하나 그래도 조언자에 지나지 않았다.
―경매의 방식을 바꾸고, 정령왕께서 참여한들 랜달프 님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그 역시,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어찌 이득이 없겠는가?
아도니스가 방관자에서 당사자로 변한다. 어둠의 정령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인식을 마족들에게 심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한 혼란을 원한다.
정령왕이란 강력한 변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지만 그가 바라는 건 오로지 나만이 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포인트를 사전에 얻어 보다 다양한 옥션의 물품을 구매하는 게 가능해진다.
내겐 필요 없고, 충분히 감당 가능한 것들을 풀어놔 사전에 포인트를 독식한다면 예전처럼 1인 파벌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일반 상점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업적 상점이 바로 그것이다.
―후! 좋습니다. 정령왕께 고해 보지요. 그리고…… 랜달프 님의 생존이 워낙 갑작스러워, 그동안은 경매 물품의 목록을 미리 전해 드렸습니다만 올해는 힘들 것 같습니다.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일이 진행된다면 정령왕님의 권한이 발동될 겁니다. 그러면 모든 마족 분들이 경매의 변화를 알게 되겠지요. 크게 기대는 마십시오.
“기대하고 있지.”
툭!
신호가 끊겼다.
* * *
내게는 오래된 기억들이 있었다. 아도니스나 다른 마족들의 성향 정도는 대부분 파악을 끝내 놓은 뒤였다. 일단 아도니스는 내 거래에 응할 것이며 그를 위한 준비를 하고자 나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대공들. 아리엘, 우파, 판데모니엄의 성향에 맞춰서 그들이 탐낼 만한 것들을 준비했다. 아주 좋은 것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들이 바라고 원했지만 구하지 못한 것들. 그 단서라도 되어 줄 아이템들. 모두 업적 상점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락 군주’의 보물 창고에 있었다는 게 맞겠다.
업적을 깨고 포인트를 모으는 일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나자 불현듯 메시지창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어둠의 정령왕 아도니스가 책임자 권한을 사용해 경매의 규칙을 추가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경매에 앞서 개별적인 경매가 진행됩니다.]
[이 개별적 경매에는 마족들의 참가가 가능합니다. 경매 물품으로 최대 열 가지를 들일 수 있습니다. 판매자의 익명성이 보장됩니다.]
[본경매와는 달리 개별적 경매의 구매자로 정령들이 참가합니다. 불의 정령과 물의 정령 또한 이 개별적 경매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격’, 혹은 ‘계약’을 통해 일정량의 포인트를 얻는 게 가능하며 이렇게 얻은 포인트를 경매의 참가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불의 정령, 물의 정령이라?
어둠의 정령과는 대치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마계 옥션의 진행을 숨기고자 안간 애를 쓰던 걸 기억한다.
어쩌면…… 내가 없는 사이에 모종의 일이 벌어진 듯했다.
그러나 나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다른 정령의 출현, 정령들의 경매 참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버린 건 의외였지만…….
‘낚았군.’
판을 엎을 준비가 끝났다.
마계 옥션.
그곳에 대동할 마수로 나는 크리슬리를 선택했다.
그녀는 복수를 바란다. 그 복수의 대상은 판데모니엄이었고, 보다 확실히 두 눈에 각인시켜 주기 위해, 다른 마족들에게도 각인시키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다.
처음 등장 당시, 크라스라에게 정신이 팔려 정작 크리슬리는 부속품 취급을 받았다. 모든 마족이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스라가 아니라 그녀가 진짜였다.
벌써 최상급의 반열에 드는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어찌 반응할까. 나의 출현과 더불어서 크리슬리의 성장을 확인하거든……. 그 반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아리엘, 우파, 판데모니엄! 내가 돌아왔다.’
이번 마계 옥션을 말하자면 나의 재데뷔전과 같았다.
금기를 어겼다고 여기며 오쿨루스와 함께 산화한 줄로만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나는 지저 세계에서 더욱 완성되었다. 초월의 경지에 제대로 발을 담갔다.
반면 그들은 어떨까? 나와 비견될 성장을 이뤘을까?
묘한 기대감을 품은 채 균열을 건너자 익숙한 모습의 너른 방이 나타났다.
그 앞에서 노움의 형상을 한 어둠의 정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흘흘! 랜달프 님,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