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54화
본래 마계 옥션에서 항상 나를 반기던 정령. 먼저 대기하고 있는 걸 보아 미리 전해 들은 게 분명하다.
마침 잘됐다.
이번 경매는 여러모로 바뀐 점이 많다.
나 혼자서 알아보려 하는 건 한계가 있다.
안내역인 만큼 어느 정도 정보는 가지고 있을 터.
궁금증을 풀 존재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잘 지냈나?”
“그럴 리가요. 작년에 뵙지 못해 상당히 유감이었습니다. 사실 랜달프 님의 안내역 자리도 어렵사리 얻은 것인지라…… 재미를 못 봤습죠.”
어둠의 정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심으로 서글퍼하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안내역이 바뀌는 건 본 적이 없군.”
“크흘흘! 지금 와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마계 옥션이 시작되기 전에 이 안내역 자리를 걸고 경쟁이 치열했습지요. 떨어지는 콩고물로 ‘격’을 올리는 게 가능하니까요. 경매 참여자께서 죽지 아니하시면 본래 바뀌지 않는 게 규칙입니다. 3년 차가 넘어가고 랜달프 님이 계속해서 진가를 발휘하자 제게도 바꿔 달라는 청탁 아닌 청탁이 여럿 있긴 했습니다만…….”
“그다음 해에 내가 모습을 감췄지.”
짧게 호응하자 어둠의 정령이 고개를 주억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드보롱 님께선 ‘시스템’으로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대상이 죽을 때밖에 없습죠. 저도 상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설마, 휘유~”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마냥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랜달프 님을 위해서라면 이 모습을 바꿔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크흘흘! 혹시 서큐버스나 엘프를 좋아하십니까?”
성적인 농담이었다. ‘크흘흘!’ 웃으며 다가오는 서큐버스, 엘프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시답잖은 소리는 되었다. 그보다 물의 정령과 불의 정령이 개별 경매에 참여한다던 문구를 보았다. 어찌 된 일이지?”
“아아…… 그것 말입니까…….”
어둠의 정령은 표정을 굳혔다. 마음에 들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자 어둠의 정령이 이어서 말했다.
“중간계에서 지저 세계 쪽을 감시하다가 다른 정령에게 걸린 이야기는 아십니까?”
“안다.”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을 소환할 때 생겨난 변화로 말미암아 어둠의 정령이 움직이고, 그 일련의 과정에서 다른 정령들의 의심을 샀다는 내용이었다.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중 물과 불의 정령이 저희 어둠의 정령을 가장 심하게 압박했습니다. 작년 이맘때 즈음 결국 마계 옥션의 비밀도 탄로 나 버렸지요.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두 정령왕이 비밀 엄수를 대가로 거래를 청한 것이었지요.”
“그것이 마계 옥션의 참가였나?”
“아닙니다. 그들은 마신이 만든 시스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도 그 시스템에 관한 건 잘 모릅니다. 그저 저희에게 주어진 권한을 발판 삼아 몇 가지 시도를 하는 게 전부이니 애당초 거래 자체가 성립하질 않았습니다.”
마신의 시스템…… 그것을 파악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실체가 무엇이고, 어떠한 경로로 발동이 되는지 전생에서 역시 밝혀진 바가 없었다.
굳이 파헤치려는 이도 없었다. 이미 시스템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정령들이라면 또 다른 시각에서 봤을 수도 있겠다.
“그럼?”
“일단 그 계약 건을 빌미로 시간을 버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다가 불과 몇 달 전, 갑자기 정령왕께서 그들의 경매 참가를 결정하셨지요. 본경매는 아니고 개별 경매에만 국한되긴 합니다만…….”
그것이 전부였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는 모습이었다.
‘아도니스. 내 제안을 수락하고, 동시에 무엇을 노리는 거지?’
당연히 드는 의문이었다. 나 하나로 인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근원의 정수 하나를 얻고자 ‘파멸’로 이어질 수 행위를 할 정도로 그는 어수룩한 이가 아니었다.
따로 노리는 것이 있기에 내 요구에 응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참여하는 마족의 숫자는 어떻게 되지?”
“54명입니다. 크흘흘, 고작 5년 차에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3년 차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죽인 마족 외엔 모두 정상이었다. 그런데 고작 2년 사이에 숫자가 확실히 줄었다.
“그들의 평균 포인트 수치는?”
“본래 300만이었습니다만…… 갑자기 어느 날을 기점으로 70만가량이 더 치솟았지요. 크흘흘!”
어둠의 정령이 나를 음흉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내가 보유한 포인트가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았다는 듯. 하지만 그 시선에는 언뜻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개별 경매에 관한 계약서입니다. 마신의 인장이 찍혀 있으니 부디 부담 가지지 마시고.”
마신의 인장. 허락받은 이만이 사용 가능하며 그조차 제약이 크다고 들었다. 그러나 마신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는 절대적인 강제력을 발휘한다. 아도니스가 가지고 있는 건 알았지만 그것을 벌써 사용할 줄은 몰랐다.
나는 어둠의 정령이 건넨 양피지를 쭉 훑었다.
익명 보장, 아이템 보호, 비밀 엄수 등이 적혀 있었고, 아무래도 이와 비슷한 계약서를 불과 물의 정령 쪽에도 건넸을 듯싶었다.
딱히 중의적이거나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마신의 인장과 아도니스의 이름이 찍힌 곳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후 지장을 찍었다.
직후 양피지를 돌돌 말아서 어둠의 정령에게 넘겼다.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개별 경매에 판매하실 아이템을 보도록 할까요? 경매는 저희가 진행하지만 시작가 같은 건 미리 정해 놔야 하니깐 말입니다.”
나는 마법 주머니를 풀었다.
정확히 10개. 이번 개별 경매에서 판매할 것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아이템을 본 어둠의 정령이 눈을 한참이나 크게 떴다.
“허어……!”
동시에 감탄사를 흘리고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대강 정리가 끝나자 안내자인 어둠의 정령이 내게 말했다.
“물과 불의 정령들이 참여하며 작년과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본경매의 아이템을 경매 시작 전에 보는 게 가능했지만 이제는 안 됩니다. 보안상의 이유이니 양해를 해 주십시오.”
“그럼 바로 경매에 들어가는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달라진 게 있으니 만큼 적응할 시간을 각자에게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의 절반 동안 자유 시간이 주어집니다.”
인상을 찌푸렸다. 하루의 절반이나 모두에게 자유를 준다는 건, 단순하게 보면 별일이 아닐 것 같지만 파고들어 가면 심각한 문제다.
마족, 그리고 원소의 정령들은 서로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무시하고 있다는 게 정확하지만 이는 서로 접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다. 그저 좋게만 흘러갈 까닭이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짓을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이다. 여태까진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즉시 경매가 진행됐고, 끝나면 던전으로 돌아가는 행동만을 반복해 왔다.
‘명목상 적응을 위해서라지만.’
애당초 마족들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생과 달리 모든 게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규칙상 마수들의 싸움만이 가능하지만 그것도 정령들이 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우파가 파간 그리울리를 희생양으로 내세워 마계 옥션에 재차 참가한 전례가 있었다.
상대 파벌의 핵심을 확실히 죽일 수만 있다면…… 휘하 마족 하나쯤은 버려도 나쁠 게 없었다.
‘혼란이 크게 생기겠군.’
쯧! 혀를 차고 말았다. 이번 마계 옥션은 여러모로 정상적인 진행을 바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아도니스는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크흘흘! 랜달프 님, 저는 경매의 수속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럼…… 자유 시간이 끝난 후 찾아뵙지요.”
어둠의 정령이 문을 열고 떠나갔다. 문 쪽에 대기하던 최상급의 정령들이 호위를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어찌 움직이시겠습니까?”
명석한 크리슬리는 대강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이번이 처음 오는 것일 텐데도 어색함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은가?”
무엇 하나 정확한 게 없었다. 섣불리 움직이는 건 피해만 낳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 크리슬리에게 물었다. 나 혼자만의 의견으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크리슬리라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의견을 내줄 수도 있었다.
이어 잠시 고민한 크리슬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것만으로 종합하여 결론을 내 보자면…… 먼저 정령들과 접선함이 가장 나을 듯싶습니다.”
“정령들과?”
정령들과의 접선. 의외였다. 내가 생각한 건 아리엘 디아블로 쪽을 노려보는 것 정도였다.
크리슬리가 작게 헛기침을 흘리며 말했다.
“마족들은 아직 마스터의 생존을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허나 알고 있다면…… 이 하루의 절반이란 시간 동안 무슨 수작을 부려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특히 판데모니엄 쪽이라면 반드시 얼굴을 내밀게 되겠지요.”
“그들이 어쩌지 못하도록 정령들과 어울리라는 소리인가?”
나는 강하다. 허나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나 혼자서 하나의 파벌 전부를 상대하진 못한다.
그러나 회의적이었다.
빛의 정령이 아니라면 굳이 크게 적대하진 않겠지만 내가 다가간다고 하더라도 무시할 공산이 컸다.
그때 크리슬리가 자신 있게 말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제 몸속에 흐르는 피는 그들과 매우 궁합이 좋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진마룡 아오진,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
둘은 불과 물의 속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친화력은 발도 못 내민 만큼.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방법이 생겼으니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좋다, 너의 말에 따르마. 하지만 접선하는 쪽은 내가 고르겠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크리슬리가 진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두 발자국. 과거에는 세 발자국까지 다가오는 걸 허락했으나 수련의 방에서 강해진 그녀는 나조차도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두 발자국 앞까지 다가오는 걸 허락했다.
“불의 정령을 먼저 보겠다.”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불의 정령.
어둠의 정령들이 차지한 지역에 보낸 이들이니 그만한 격을 갖추고 있을 터.
게다가 불의 정령은 대부분 호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물의 정령보단 말이 통할 것이었다.
불의 정령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불의 마력이 집결된 장소로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이상한 점이라면 거대한 성을 휘저을 동안 마족 하나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아무래도 마계 옥션에 도착한 즉시 기본적인 설명만을 듣고 파벌끼리 모인 것 같았다.
‘대공들도 멍청이는 아니니…….’
경매의 변환점을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짜고자 함이 분명했다. 나는 파벌이 아닌 개인으로 움직이니 그들보다 한 발자국 빠르게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보안도 허술하군.’
무엇보다 의심쩍은 것은 성의 보안 레벨이 참으로 낮다는 점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어둠의 정령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원소의 정령들이 성 내부에 있음에도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건, ‘방관’을 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성 내부가 원래 이리도 조용한 것인지요?”
“아니다. 평소보다 심하게 조용하다.”
“왜인지…… 곳곳에서 악의가 느껴집니다.”
맞다.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자는 크리슬리 외엔 없었다. 이는 다른 마족, 정령들도 비슷할 터. 당연히 악의뿐이 없을 수밖에.
곧 나와 크리슬리가 불의 정령들이 머무는 장소에 도착했다.
경매장과 맞먹을 거대한 문 건너편에 그들이 있었다.
―그 정보가 사실일까요?
―이건…… 용서할 수 없는 문제…….
―‘케르피’가 대표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 빌어먹을 년이?
―굳이 케르피를 보낸 저의가 저는 수상쩍습니다.
―먼저 선수를…….
―조용. 손님이 오셨군.
문 안쪽은 시끄러웠다.
하지만 누군가의 저지로 인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끼이익.
나는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