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55화 (155/242)

던전 사냥꾼 155화

이윽고…… 거대한 불꽃들이 사방에 포진한 것을 눈으로 목격했다. 불덩이라고 표현할 만한 존재들이 20가량. 그 하나하나의 격은 이미 최상급에 달했다. 문을 열기 전부터 느끼고 있었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직접 보니 절로 감탄이 튀어나왔다.

‘정예 중의 정예.’

불의 정령들을 마주한 인상이다. 그 하나하나가 얕잡아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도 모든 걸 뒤집어엎을 전력! 정령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나온 것만은 확실했다.

‘불의 정령은 적을 상대할 때 불덩이가 되지.’

말인 즉,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기야 내가 알아봤는데 그들이라고 나를 못 알아볼까?

물론 초월자의 격 전부를 눈치채진 못하겠으나 만만찮은 적임을 단박에 꿰뚫었다. 그들의 기세는 실로 놀라웠고 날카로웠으며 또한 뜨거웠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크리슬리가 양해를 구했다.

한 발자국 물러날 시기임을 깨달았다.

이미 저들은 나를 본 즉시 긴장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내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좋게 풀릴 여지는 적다. 차라리 크리슬리에게 양보하는 게 대국적으로 봐도 옳았다.

“허한다.”

내 말이 끝나자 크리슬리가 양손을 든 채 한 발자국 앞서 나갔다.

“불의 정령들이여. 나의 이름은 크리슬리.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보다 강렬한 불꽃을 품을 자로서, 그대들에게 친선을 구합니다.”

―굉장한 기운이군.

―허나 나머지 반쪽은 물의 기운이야.

―아니…… 불 쪽이 더욱 거세다.

짧은 의견 교환이 오갔다. 불의 정령들은 크리슬리의 내부를 살피며 불과 물의 기운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윽고 가운데의 가장 큰 불덩이가 말했다.

―아이야, 네가 강대한 불의 기운을 가진 자인 건 알겠다. 하지만 느닷없구나. 하물며 뒤에 있는 자는 마족이 아닌가.

“이분은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다른 마족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분이시기도 하지요. 주인님께선 마족을 사냥하는 마족이며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대들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보았다. 크리슬리의 말마따나 마계 옥션과 관련된 부분은 다른 마족보다 잘 알고 있다. 용케 그것을 파악하고 거래의 주제로 사용한 것이다.

다시금 정령들이 시끄러워졌다.

―마족을 사냥하는 마족?

―마족들은 원래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잖아.

―대수롭지도 않군.

나에 대한 반응은 평범했다. 이게 마족을 대하는 대다수 정령들의 태도다.

그때 불의 정령들의 수장이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가 무엇인 줄 알고 친선을 이야기하는가?

“무례하기 짝이 없으나 바깥에서 그대들의 이야기를 잠시 엿들었습니다. 케르피란 이름이 나온 걸 보아하니 물의 정령들과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반목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굳이 이곳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곳에 도착하고 갑작스럽게 정보를 얻었다는 의미겠지요. 물의 정령들과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그런 정보를 누군가가 흘린 거라고 저는 감히 추측하고 있습니다.”

크리슬리의 언변은 유창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몇 마디의 대화만을 듣고 여기까지 추론해 낸 것도 대단한 능력이었다.

‘데려오길 잘했군.’

판데모니엄을 각인시키는 것도 이유지만 이런 점 때문에 크리슬리를 고른 이유도 없지 않았다. 임기응변. 머리를 굴리는 것만큼은 나보다 위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수하를 둬서 나쁠 건 없었다. 그 훌륭한 수하를 적재적소에 써먹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의 재능이 될 터. 그렇게 생각하고 데려온 게 정답이었다.

―호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러기 전에 우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런 대가 없이 해결해 드리지요.”

―아니, 처음부터 너는 우리에게 친선을 구한다고 했지. 지금의 행위,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인 시점에서 너의 목적은 달성이 되는 게 아닌가?

“고작 이런 일 정도로 환심을 사려 할 만큼 저는 뻔뻔하지는 못합니다.”

후우우웅!

불꽃이 점차 약해졌다.

잠시 후 불꽃의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붉은 머리를 지닌 거구의 사내.

그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좋다. 이야기해 주지. 어차피 우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니 말이다.”

사내는 잠시 뒤를 돌아보곤 말을 이었다.

“다들 폼을 풀도록. 이들은 적이 아닌 손님이다.”

후우우웅!!

20가량의 정령이 일제히 폼을 풀었다. 불덩이 대신 강한 인상을 지닌 남자와 여자의 형태로 나타났다.

모두 변신을 푼 것을 확인한 사내가 너른 식탁에 앉았다. 그 반대편에 크리슬리가 자연스레 착석했다. 나 역시 이야기를 듣고자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정령들은 선 채로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핵심만 말하마. 우리는 우연찮게, 경매에 나타날 물품으로 ‘지고한 불의 정수’가 들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지고한 불의 정수는 우리 불의 정령들이 모시던 아홉 개의 불 중 하나이며 2만 년 전 도난당한 신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아홉 신 중 하나를 훔친 자가 물의 정령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지. 이는 우리의 불을 훔친 직후 물의 정령이 세를 크게 넓혔기 때문이다.”

“2만 년 전 도난당한 물건이 하필 이곳에 있다는 거로군요.”

“그렇다. 신의 불은 결코 꺼지지 않지만 자리를 벗어난 지 벌써 2만 년이 지났다. 슬슬 그 힘이 약해질 시기인 것이다. 힘을 전부 잃기 전에 이곳에서 판매한 후 자신들의 ‘격’을 올리겠단 속셈이겠지! 참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하지만 경매의 물품은 마족만이 올릴 수 있습니다.”

“흥! 물의 정령들과 합심한 마족이 없으란 법은 없다. 지금 너와 너의 주인이 우리를 찾아온 것처럼. 어쩌면…… 우리를 농락하려고 직접 찾아온 것일 수도 있지.”

언뜻 보면 틀린 부분은 없었다. 물의 정령과 미리 접촉한 마족 중 누군가가 실제로 경매의 판매에 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건 심증이다. 정작 훔쳐 갔다는 부분에서조차 아리송했다. 진짜 물의 정령이 가져갔다면 굳이 2만 년이나 방치한 이유가 있을까? 부딪치는 걸 꺼려 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말만 저렇지 사실 ‘확신’은 못한 게 아닐까.

뒤에 부분도 마찬가지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크리슬리도 그 부분을 눈치챈 듯싶었다.

“한 번 주변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먼저 짚고 갈 건 분명하군요. 그 정보를 건넨 자, 그가 누굽니까?”

“드보롱이라고 하더군. 그저 지고한 불의 정수가 판매대에 올랐다는 말만 했을 따름이지만 이미 정황상 모든 게 들어맞고 있다.”

드보롱이라.

녀석의 이름이 나왔다. 딱히 신뢰는 가지 않았다.

크리슬리가 입을 열었다.

“물의 정령들이 한 짓이라고 말입니까?”

“아니라면 하필 이런 시기에 이곳에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크리슬리가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듣고선 무언가를 떠올리기 자체가 어렵다.

이내 이맛살을 찌푸린 크리슬리가 말했다.

“지고한 불의 정수가 어떠한 것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려주십시오.”

“말했지 않느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 아홉 개의 성스러운 불꽃 중 하나다. 더 첨언하자면 그중 지고한 불의 정수는 ‘지배’를 담당한다. 물의 정령들이 갑자기 세를 넓힌 것도 이 힘 덕택일 것이다.”

“…….”

“자,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느냐? 없다면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를 기만하는 물의 정령들에게 철퇴를 가해야 해.”

사내가 재촉했다. 크리슬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보가 너무 단편적이군요. 이만한 이야기 거리라면 물의 정령들도 이미 아는 내용이겠지요. 더 깊은 내용을 말해 주지 않는 이상 물의 정령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제 힘만으로 풀 수 없을 듯합니다.”

“아이야,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 물의 정령들을 만나겠다면 말리지 않으마. 분명히 발뺌하겠지만!”

고민이 더 늘었다. 잠시 후 크리슬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아르쉴라라는 자를 아십니까?”

“그 이름을 어찌 다크 엘프인 네가 아는 것이냐? 고대 물의 정령 중 하나이다. 이미 소멸한 자이지만 실력은 모두 인정했다고 하더군. 물의 정령왕 최측근의 존재이다.”

그제야 감을 잡은 듯 크리슬리가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물의 정령들을 만나 보고 오지요.”

“가는 김에 경고해라.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으면 전면전밖에 없다고!”

과연 불의 정령.

호탕하기 그지없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크리슬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말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일단 이곳은 나가자는 기색이었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즉시 사내가 말했다.

“내 이름은 지브스! 화염의 화수 지브스다.”

그의 눈이 내게 향했음을 안다. 묘한 호승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 도중에도 힐끔대며 나를 쳐다보았던 지브스다. 아무래도 ‘강자’와의 대결을 원하는 듯한데…….

“랜달프 브뤼시엘.”

가볍게 그 시선을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불의 정령들이 머물던 방과 상당히 떨어진 뒤, 크리슬리가 말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물의 정령은 범인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는 것 같군.”

“예, 좋은 방향으로 풀릴 듯합니다. 원래는 아버지의 이름을 빌어 그들의 환심을 살 생각이었습니다만…….”

진마룡 아오진.

불의 화신이라 칭해도 이상함이 없을, 용 중의 용이니 불의 정령과 안면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인연을 발판 삼아 환심을 사는 것도 충분히 괜찮은 수다.

한데 그러지 않고 그들의 문제 해결에 나섰다는 건 보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고한 불의 정수, 그 힘은 ‘지배’에 있으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그와 비슷한 물건을 소유한 자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확실한진 모르겠지만 이번 마계 옥션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누구지?”

“판데모니엄입니다.”

판데모니엄?

그 이름이 대관절 왜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나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입에 담았다.

“2만 년 전 도난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판데모니엄의 나이가 많아도 2만 년은 못 살았을 것이다.”

노괴, 대공 중 가장 연식이 있는 자. 하지만 2만 년은 너무 길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쿨루스의 던전이 붕괴된 직후의 일입니다. 그의 던전은 무너지며 타올랐고, 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하염없이 몸을 숨긴 채 던전을 지켜보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판데모니엄이 그 불길 속에서 작은 불의 정수를 꺼내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도 말이 안 맞다. 오쿨루스와도 연관이 없지 않나?”

“맞습니다. 진정으로 연관이 있는 자는…… 콘테고놈입니다.”

설인의 왕 콘테고놈!

허무에 물들어 나와 맞섰던 녀석의 이름이다.

타락을 사용하고 이성이 끊긴 덕분에 콘테고놈의 마지막이 기억은 안 나지만 죽였다는 확신만은 분명히 있었다.

내가 의아해하자 크리슬리가 마저 말했다.

“설인의 왕 콘테고놈. 그가 신의 불을 훔친 장본인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설인의 왕이 되었으며 ‘왕’이란 칭호답게 대륙을 지배해 갔습니다. 그러나 본래 설인은 물의 속성과 연이 깊지요. 아르쉴라는 콘테고놈과 계약한 물의 정령입니다. 계약의 힘으로 말미암아 지고한 불의 정수가 가진 힘을 사용했을 겁니다. 그러면 앞뒤가 맞습니다.”

탁. 작게 손뼉을 쳤다.

“계약. 계약이 있었군. 한데 콘테고놈에 대한 것을 불의 정령들이 몰랐단 말인가?”

“정령들은 중간계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으니까요. 저도 오쿨루스가 남긴, 콘테고놈에 대한 것들이 적혀 있던 저서가 없었다면 몰랐을 내용입니다. 더군다나 설인의 왕 콘테고놈이 활동한 시기도 무척이나 짧았습니다. 고작 15년. 대륙을 모두 제패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더욱 집착했던 것일지도…….”

내가 사라진 이후 크리슬리는 그 원인을 조사하고자 안간 애를 쓴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콘테고놈에 대한 이야기도 접하게 됐으리라.

“콘테고놈이 죽고 남긴 불의 정수를 판데모니엄이 손에 넣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저의 예상으로는 그러하옵니다. 더욱 정확한 판단은 물의 정령들을 만난 다음에 내릴 수 있겠지요.”

턱을 쓸었다.

콘테고놈의 이름이 다시 튀어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이름을 듣고, 지고한 불의 정수를 떠올리는 순간 왜인지 뱃속이 아려 왔다.

두근!

심장도 크게 뛰었다.

뱃속에 마치 이물질이 들어 있는 느낌.

여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콘테고놈을 되새기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가자.”

이상한 걸 먹지도 않았고, 설령 먹었다고 하더라도 내 신체가 고통을 호소할 리 없었다.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선 몸뚱이가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착각일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에 부닥치고 긴장이라도 한 것이리라.

웃기는 이야기지만 마냥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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