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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56화 (156/242)

던전 사냥꾼 156화

결과부터 말하자면 물의 정령들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하기야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행위에 찬동하는 이가 얼마나 있겠냐마는. 애당초 답을 바라고 온 게 아니라는 듯 크리슬리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아르쉴라의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들었을 따름이다. 그중 놀라운 건 물의 정령, 그중 이곳의 수좌를 차지하고 있던 ‘케르피’가 아르쉴라로 말미암아 태어난 정령이라는 것이었다.

케르피는 아름다운 여성체였다. 불의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실체화를 하자 아름다운 외견과 함께 연파란 머리칼이 도드라졌다. 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앉아 입을 열었다.

“나는 호수에서 태어난 정령입니다. 그분께선 내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크리슬리는 계약에 관해 물었다. 혹 아르쉴라와 계약한 자를 아느냐고.

그러자 케르피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나의 이름을 지어 줬다는 것뿐이에요. 정령의 수명이 아무리 길어도 3천 년 정도가 한계이니……. 내가 호수에 있을 적, 아직 정령으로서 자아를 갖추지 못했을 때 그분께서 이름을 지어 주고 새로이 생명을 부여한 게 전부입니다.”

정령이 태어나는 과정은 요정과는 조금 다르다. 요정은 여러 사물에서 억겁의 세월을 겪고 자연스럽게 태어나지만 정령은 특정 자연계에서 다른 정령이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잉태된다.

물론 이름을 지어 준다고 다는 아니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야 정령으로서의 자각을 갖추는 것이다. 그 점만큼은 요정과 비슷했다.

결국 케르피도 아르쉴라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모르는 것 같았다.

크리슬리가 불의 정령들이 매우 노했다며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던 내용을 전해 주자 케르피는 도리어 역정을 내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했다.

“바라는 바. 괘씸한 불의 정령들, 놈들이야말로 우리의 신물을 훔쳐 갔습니다! 벌써 2만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그것을 뻔뻔하게 이번 경매에 내놓았다고 들었어요. 결코 용서하지 못할 자들입니다.”

2만 년이란 시간이 겹친다. 거기다가 이번 경매에 올랐다는 점도 비슷했다.

이 내용을 전한 자마저 같았다. 드보롱!

물의 정령, 그리고 케르피와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케르피가 물었다.

“그런데 마족, 이름이 무엇입니까? 매우 큰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르쉴라께 느껴 본 것만 같은…… 뭔지 모를 익숙함이 있으니 굉장히 당황스럽군요.”

물의 정령은 기본적으로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졌다. 개체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제법 정확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케르피는 최상급 중에서도 높은 레벨의 소유자였고, 그녀가 느꼈다면 무언가가 있음이었다.

“랜달프 브뤼시엘.”

나는 짧게 답하며 문을 닫았다.

어쨌든, 양쪽의 의견을 대강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 * *

“결론은 내렸나?”

문을 나선 이후 나는 짧게 물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크리슬리에게 일임하자고 마음먹었으니 그녀의 의견에 따라 방향을 잡을 것이다.

크리슬리가 시원하게 답했다.

“생각 이상으로 정령들이 단순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원래 정령들은 머리가 나쁘다. 어둠의 정령들이 이상한 것이지.”

꾀를 내고 실행하는 능력만큼은 어둠의 정령을 당할 자가 없었다. 어찌 보면 가장 마족과 비슷한 족속들. 탐욕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그래서 마신이 어둠의 정령들에게 마계 옥션의 제안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중간에서 드보롱이 수작을 부린 건 당연합니다. 정령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테지요. 하지만 정확한 물증이 나왔고, 이 과정 중 어둠의 정령이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무려 2만 년 전의 일이니까요. 아마 지브스와 케르피는 여기서 추론을 멈췄겠지요.”

“두 정령들 간의 사이가 나쁜 것도 한몫했겠지. 깊숙이 들어갈수록 화만 났을 테니 말이다.”

정령들이 단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생각을 안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과 물의 정령들은 사이가 굉장히 나쁘다. 서로가 서로의 신물을 훔쳤다고 믿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개입했다고 여기기보단 서로 치고받고 하는 게 더 원하는 그림일 것이다.

이성보단 감정으로.

불의 정령은 성격 자체가 불과 같았고, 물의 정령도 거센 해일마냥 급격했다.

가만히 있으면 곧 부딪힐 게 자명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물과 불 중에 말인가?”

크리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둠의 정령이냐, 물과 불의 정령이냐를 말입니다.”

이미 드보롱을 비롯한 어둠의 정령들이 수작을 부렸다고 확신하는 어투다. 그리고 이번 일을 밝힘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것임을 암시하였다.

나는 곰곰이 두 선택이 불러올 이득과 손해를 따져 보았다.

어둠의 정령을 도와서 불과 물의 정령들이 부딪치기를 충동질 한다. 그 틈을 타서 어둠의 정령들이 득세하면 마계 옥션에서 출품되는 아이템과 마수의 질과 양이 좋아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반대로…… 불과 물의 정령에게 진실을 밝히고 어둠의 정령을 구석으로 몰아간다면?

‘더욱 포인트에 목을 매게 되겠지.’

나는 오히려 후자가 끌렸다. 정령왕 아도니스를 돕는 것보다, 그를 구석으로 몰아서 도움을 바라도록 만드는 것!

어차피 마계 옥션은 지금 내게 부가적일 따름이다. 질과 양이 좋건 나쁘건 크게 상관은 없었다. 마족들이 무엇을 사는지 살피고 그들을 경계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

반면 아도니스는 궁지에 몰리게 되거든 더욱 간절하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마신의 가호가 있기에 쉽사리 멸망하진 않겠으나 마족이 가져다주는 포인트는 ‘격’을 올리고 정령들의 힘을 키우는 데 필수적인 탓이다.

그 힘을 발판 삼아 정령들에게 대항하는 게 아도니스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지금까지 쌓아 온 힘이 있기에 상대가 아예 안 되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전생에서 아도니스는 정령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 균형을 조금 비틀 셈이다.

여기서 내 소행임이 밝혀져도…… 나를 내칠 수는 없었다.

다른 누구보다 막대한 포인트를 사용한 게 나다. 그야말로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되리라.

“불과 물의 정령들에게 진실을 밝히는 게 낫겠군.”

계산은 끝났다. 내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답을 내리자 크리슬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판매자의 신원을 알아내기만 하면 되겠군요. 판데모니엄이 불의 정수를 판매대에 올렸으니 그 확증을, 물의 신기를 훔친 누군가를 알아내기만 한다면 일은 쉽게 풀립니다.”

“마신의 계약으로 묶인 상태다. 허점은 찾기 어려울 텐데.”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계약을 행한 것은 마족입니다. 아직 준비가 미흡하여 안내자가 직접 물건을 받아 가고, 그것을 호위하는 모습까지 보였지요. 그 말인 즉, 판데모니엄을 담당하는 안내자에게서 정보를 받아 가면 될 일입니다.”

하기야 준비가 철저했다면 그 자리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안내자조차도 내용을 알 수 없도록 했겠지. 하지만 워낙 갑작스럽게 경매의 내용이 뒤바뀌어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니 직접 몸으로 뛸 수밖에.

그 허점을 노리자는 것이다.

“가능하겠는가?”

조용히 처리하기엔 너무 위험한 일이다.

만약 시도했다가 발각되면 무슨 역풍을 맞을지 알 수 없었다.

직접적인 공격의 시도이고, 아무리 좋게 넘어가도 적대적 관계로 돌아설 가능성이 다분했다.

힘을 갈구하는 그런 시기라면 모를까, 지금 아도니스는 그다지 급한 기색이 없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게 움직이고 있다고 여길 것이었으므로.

크리슬리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죽음의 왕 가낙의 힘을 새로이 얻었습니다. 가낙은 죽음, 그리고 어둠을 완전히 지배하려 한 미치광이 흑마법사였지요. 그러나 그의 주특기는 다름 아닌 ‘조작’입니다. 하물며 어둠의 정령이라면 쉬이 정신 조작을 행할 수 있을 겁니다.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어렵진 않다. 어차피 안내자라면 창구 근처에 모여 있을 터.”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마족들이 가장 큰 변수입니다. 그들이 설치기 시작한다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을는지요?”

물과 불의 정령들은 경매가 진행되는 장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서로 싸우는 걸 전제로 자리를 배치한 게 틀림없었다.

주변에 보이는 어둠의 정령들도 매우 극소수였다.

반대로 마족들은 성의 중심부와 가깝다.

마족들이 움직이면 어둠의 정령들도 살짝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동선에 변화가 생기게 될 테고, 안내자들도 자리를 벗어나 움직이리라.

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혼란이 생기면 안내자 몇이 사라지는 건 신경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럼…… 그 전에 먼저 안내자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 놔야겠군요.”

“간단한 문제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행하는 일이다.

내가 숨고자 한다면 이 성 내에서 나를 찾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크리슬리가 짧게 읍했다. 그러곤 무한한 신뢰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전생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안내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기가 담당하는 마족들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스스로의 성과를 자랑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정확했다.

“진짜 살아 있었다고? 허!”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건지 드보롱 님도 매우 당황한 것 같더군.”

“히야…… 좋겠어. 내년이면 승격해도 이상하지 않겠는걸?”

“개별 경매에서 판매할 아이템도 대단해. 반쯤 발아한 세계수의 씨앗, 근원의 정수…… 우리 정령왕께서도 그 경매에 참여한단 이야기가 오가잖아? 크흘흘!”

나는 벽 너머에 숨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안내자들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경매가 시작하고 끝날 때 마족의 안내를 하는 것과, 비상 상황을 제외하면 이곳에만 있어야 하는 게 규칙이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소란은 반드시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마족들이 하루의 절반이란 시간 동안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쿠르르릉!

“뭐, 뭐야?”

“성이 무너지나?”

성이 진동했다. 격한 폭파 소리가 지척에서 오갔다.

“대피! 안내자들은 당장 대피해라!”

입구를 지키던 최상급의 정령 중 하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안내자들은 그 말마따나 정신없이 발을 뗐고, 그때야 비로소 나는 움직였다.

그림자처럼 조용하게 접근해 판데모니엄의 담당 안내자를 낚아챘다.

“읍……!”

안내자는 놀라며 발악했지만 그래 봐야 부질없었다.

재빨리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공간으로 놈을 데려갔다. 그곳엔 거대한 까마귀를 대동한 크리슬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의 왕, 가낙. 그의 힘을 제대로 발휘한 것이다.

크리슬리가 죽음 지팡이를 꼬나 쥔 채 안내자를 바라봤다. 본래 판데모니엄의 안내자 역할을 맡았던 어둠의 정령은 그녀의 눈을 바라본 즉시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흐물거렸다.

“물의 정령들이 가진 신기를 판매한 자와 그의 안내자가 누구냐?”

“아리엘…… 디아블로…….”

이어 아리엘 디아블로를 담당한 안내자의 이름과 외양 등을 설명하곤 머리를 푹 숙였다.

크리슬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지속 시간이 길지는 않아서 기절시켰습니다. 하지만 지금 있었던 일을 기억하진 못할 것입니다.”

“충분하다. 이제 또 다른 하나를 낚아 올 시간이군.”

“부디…….”

걱정스러워하는 눈빛. 피식 웃으며 답했다.

“크리슬리,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믿습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나는 재빨리 이동했다. 이 혼란을 마음껏 이용하기 위해!

* * *

12시간이 지나고 개별 경매가 시작되었다.

나는 노움 형상의 정령을 따라서 이동하였다.

“대공 아리엘과 우파가 제대로 싸웠다고 하더군요.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렇군.”

“크흘흘! 그래도 원만하게 끝나서 다행입니다. 몇몇 마족 분이 중상을 입긴 했습니다만…….”

어둠의 정령이 조잘대며 나를 이끌었다.

이윽고 경매장 앞에 도달하자 눈에 익은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음?”

어둠의 정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즉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그들이 왜 입구에서 가만히 서로 대치한 채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실제로 불과 물의 정령은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쉽사리 움직이질 않으니 당최 이상한 일이었다.

허나 그 의문은 잠시 후 깨졌다.

나를 발견한 그들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연 탓이다.

“랜달프 브뤼시엘!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들어가도록 하지.”

“지브스, 그는 우리와 함께할 겁니다.”

화염의 화수 지브스.

그리고 물의 정령 케르피!

두 집단이 경쟁하는 양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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