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57화
나는 안내하던 어둠의 정령을 앞서 나가 그들의 중심부에 섰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
간단하다. 진실을 밝힌 탓이다.
참고로 누군가를 움직이는 데 진실만큼 강력한 힘은 없다. 전생에서는 그것을 몰랐으나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지브스와 케르피를 비롯한 물과 불의 정령들은, 이 어두컴컴한 성에서 유일한 구원자가 나뿐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마족들과 전혀 다른 노선을 걸으며 어둠의 정령이 계획한 암운을 걷어 낸 자.
신물의 행방과…… 나는 또 하나, 모종의 거래를 하였다.
‘이들의 신물을 찾아 주고 관계를 맺는다.’
일의 범위가 커졌다. 처음에는 마족 간의 싸움이었으나 이제는 정령계로까지 번졌다. 거기다가 천사들의 방해도 생각하면 나 혼자서 처리하지 못할 일이 늘어날 것은 당연지사.
우군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나를 대신하여 움직여 줄 팔과 다리!
나는 그 대상으로 불과 물의 정령을 낙점했다.
어둠의 정령과 대치하며 마족들과도 깊은 연이 없기에 안성맞춤이다.
어차피 포인트는 썩어 날 만큼 많았다. 이번 개별 경매에서 이 수치가 어디까지 치솟아 오를지는 나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자신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내가 내놓은 아이템에 눈독 들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특히 몇몇 것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다.
나는 가만히 경매장의 닫힌 문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문, 이 건너편에 그들이 있다.
아리엘, 우파, 판데모니엄!
빙글 미소를 지었다.
‘사냥꾼이 없는 산에서 저들끼리의 영역 다툼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이제 사냥꾼이 나타났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진짜가 모습을 드러내면……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자신의 힘을 믿고 이빨을 보일 것인가, 아니면 몸을 둥글게 말고 숨어 버릴 것인가.
끼이익.
문고리를 밀었다.
동시에…… 환한 빛이 나를 반겼다.
2층의 네 개로 분리된 홀. 그곳에 아리엘, 우파와 판데모니엄, 그리고 아도니스가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본래 아도니스가 앉아 있는 자리는 오쿨루스의 장소였지만 그가 죽고 사라진 지금은 공석과 같았다.
의외인 점이라면 오쿨루스의 휘하 마족 몇몇이 보인다는 것.
판데모니엄이 전부 흡수한 듯했다. 내가 그의 휘하 마족 넷을 죽였음에도 다른 파벌보다 숫자가 많았다.
아리엘이 열다섯, 우파가 열여덟, 판데모니엄이 스물!
나를 포함한 54명의 마족이 한 장소에 모여 있었다.
‘오쿨루스가 죽었다고 같이 공멸하진 않은 모양이군.’
판데모니엄이 가장 숫자가 많지만 그중 일곱이 본래 오쿨루스 파벌에 있었던 휘하 마족이다.
오쿨루스가 영혼 동화를 시행해 같이 자멸할 확률이 아예 없다고 보지는 않았는데, 그 효과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듯싶었다.
하여간 나는 판데모니엄의 발 빠른 대처에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오쿨루스가 죽자마자 그의 힘을 흡수할 생각을 할 줄이야.
아니,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인형처럼 조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판데모니엄은 마도에 정통하니 불가능하진 않았으리라.
그리고 내가 놀라는 것 이상으로 그는 나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를 보내오는 중이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아리엘, 우파 역시 마찬가지다.
딱히 출입을 금지당한 게 아닌 상황에서 마계 옥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드보롱도 그와 비슷하게 발표했을 터.
그런데 돌아왔다.
물론 전과 비슷하지도 않았다.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강해졌다. 나는 초월의 영역에 도달했고, 반대로 저들은 그 수준은 아니었다.
저들 또한 전생과 비교하면 놀라운 수준의 성장을 이뤄 냈지만 나에 비하면 한 끗 정도가 밀리는 게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1층의 중앙 홀에 앉았다.
1, 2, 3년 차의 마계 옥션에서 이 자리는 오로지 나 혼자만 앉았었다. 다른 마족들은 모두 2층의 홀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내 곁으로 불과 물의 정령들이 도열했다. 그들의 중심부엔 내가 있었고, 당연히 내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랜달프 브뤼시엘…….”
아리엘 디아블로, 그녀의 목소리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였으나 이내 굉장한 흥미를 가지고 내게 시선을 던졌다.
딱히 마력을 발산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리엘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다. 내가 초월자임을, 혹은 그와 비슷한 경지에 올랐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강자에 대한 호기심과 호승심은 마계에서 그녀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 경매에 집중하고자 애써 참는 기색이다.
나는 슬쩍 눈을 돌렸다. 입가에 호선을 그리면서.
여유!
이제야 비로소,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었지만 한계를 돌파한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밑이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평등하며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간다.
심안을 열고 아리엘의 상태창을 살폈다.
이름: 아리엘 디아블로
직업: 마계 대공(던전 마스터)
칭호 :
* 마왕의 적통(Epic, 마력+10)
* 웨폰 마스터(Epic, 모든 능력치+3)
* 혼돈의 전승자(Epic, 힘민체+6)
* 군림자의 길(Ex U, 힘마력+4)
능력치 :
힘 84(+15) 지능 92(+3)
민첩 89(+11) 체력 85(+11) 마력 87(+17)
잠재력(437+57/500)
특이 사항: 네 명의 대공 중 한 명. 언더 헬을 다스리며 열여덟 마족의 주인입니다. 혼돈을 깨닫고 진정한 군림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스킬: 웨폰 치트(Epic), 어비스 소드(Epic) 언령(Ex U), 용오름(Epic), 왕의 축복(Epic)
적용 중인 스킬&아이템 효과: 군림검(힘민체+2)
[전후 비교]
힘 75 지 76 민 81 체 73 마 87 잠재력(372+20/500)
힘 99 지 95 민 100 체 96 마 104 잠재력(437+57/500)
처음 마계 옥션에서 보았을 때와 비교하면 감히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성장이다. 능력치 총합만 494에 이르며 명실상부 최강의 검술로 익히 알려진 어비스 소드도 완성한 모습이었다. 전생에서 아리엘은 5년 차에 이만한 성장은 보이지 못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부족하다. 단순 능력치만 봐도 내가 앞선다.
스킬이나 아이템의 효과가 넘을 수 없는 벽의 차이로 뛰어난 영향도 있기는 했지만 나 스스로의 성장도 훨씬 가팔랐다.
“음……!”
반면 우파는 어떤가.
그도 내 출현을 전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아예 예정 안에 넣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리엘과 달리 내 진면목을 완전 간파하진 못한 듯싶었다.
판데모니엄은…… 견제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마족 넷이 증발한 일의 주범이 나임을 확신했으리라.
하지만 기린과 인간들의 연합 공격에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와서 파악한 걸 뒤늦게 후회해 봐야 늦었다. 나는 아무런 피해 없이, 도리어 그간 수많은 준비를 갖춘 채 이 자리에 섰다.
‘수준은 비슷하군.’
심안을 돌려서 대공들의 상태창을 살핀 결과 능력치 총합 자체는 비슷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스킬과 칭호, 아이템 등이었다. 누가 강한 지는 직접 붙어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아리엘 디아블로가 무력적 측면에서 우월한 것 같았다.
“쯧.”
불현듯 들려온 소리.
어둠의 정령왕 아도니스였다.
그는 언짢은 것처럼 혀를 찼다.
하기야 그는 불과 물의 정령이 부딪치길 바라고 있었다. 싸울 자리까지 마련해 줬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 와중, 나를 조금이나마 의심하는 시선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확증이 없으니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 뜻깊은 자리를 함께할 드보롱이라고 합니다.”
촤악!
하늘하늘한 커튼이 걷히며 피에로 분장을 한 드보롱이 나왔다. 활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곤 그가 고개를 주억였다.
“경매의 규칙이 바뀌어서일까요?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도 보이는군요!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손님분이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랜달프 브뤼시엘 님!”
짧게 고개를 흔드는 걸로 응수해 주었다.
‘능청스럽군.’
진즉 연락이 닿았지만 드보롱은 전혀 몰랐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연기력 하나는 수준급이었다.
“바뀐 규칙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손님분들이 내놓은 아이템을 판매하는 시간이지요. 과연 어떠한 물건이 있을지 저 드보롱은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이 대목에선 나도 살짝 궁금증이 들긴 했다.
다른 마족들이라고 이 개별 경매에 의미를 안 두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본경매에 들어가기 전, 부족한 포인트를 채울 수 있는 기회다. 필요 없는 걸 처분하거나…… ‘지뢰’를 깔아 놨을 가능성도 있었다.
예컨대 저주가 걸린 아이템 등이다. 단순한 관찰 스킬로는 결코 꿰뚫어 볼 수 없는 수준 높은 저주 아이템을 경매에 내놔 그것을 구매한 마족이 손해를 보도록.
아니면 특정 조건에서 발동되는 스킬, 몰래 추적 마법을 걸어 놨을 수도 있겠다. 그것을 구매한 마족이 만만한 녀석이라면 추적하여 털어 버릴 계획을 세운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여러모로 구매하기 전 심사숙고하여 결정해야 함이었다.
드보롱이 천천히 말했다.
“아이템의 입찰은 간단합니다. 포인트를 높게 부른 쪽이 갖는 것이지요. 하지만 가진 바 이상의 포인트를 입 밖에 내면 천장에 달린 소녀와 소년상이 비웃음을 흘릴 겁니다. 믿음이 안 가면 실험을 해 보셔도 좋습니다.”
알고 있는 사항이지만 새롭게 참여한 정령들 때문에 한 번 더 설명하는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경매장은 금세 숙연해졌고, 그 사이에서 드보롱이 손을 활짝 폈다.
“모든 손님분들! 다시금 인사 드립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령님들 같은 경우 구매하고자 하는 아이템이 있다면 자신의 ‘격’을 지불하면 됩니다. 그럼 시스템이 판단하여 그에 해당하는 포인트를 내줄 것입니다.”
자신만만한 미소.
싸움을 붙이겠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곳에 모인 불과 물의 정령들은 전부 강자다. 정예들만 모였다. 이들의 격을 낮출 수만 있다면 그것도 이득이라 판단한 듯했다.
‘드보롱, 지금 그들의 역할은 내 병풍 이상이 아니다.’
구매는 내가 한다. 불과 물의 정령들은 나를 띄우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정령들이 가진 신기라는 것도 제법 궁금했다. 만약 이들과의 동맹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고 사료된다면 그대로 내가 가지면 그만이었다.
여러모로 어둠의 정령들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공산이 컸다.
“자, 기대하고 기대하던 바로 그 시간입니다.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물건이 많은 관계로 두 번에 나누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간에 1시간가량 쉬는 시간을 갖지요.”
짝!
드보롱이 한 차례 손뼉을 치자 일꾼들이 물건을 가져왔다.
커다란 석상. 가고일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건 또 의외의 물건이군요. 느껴지는 마력이 범상치 않습니다. 섬세한 가고일 조각상! 마력뿐만이 아니라 예술가의 혼도 함께 담겨 있는 듯이 유려하기 그지없군요. 시작가는 5만 포인트입니다.”
이름: 섬세한 가고일 조각상
설명: 한 조각가가 혼신의 힘으로 조각한 조각상. 가고일이 바로 뛰쳐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
* 반경 10킬로 내 가고일의 번식률 15% 증가
* 예술가의 저주가 걸려 있다. 소유하게 되는 순간 귀속되며 마력이 1 깎인다.
‘역시.’
정상적인 물건을 정상적인 경로로 판매할 리가 없었다. 아예 포인트를 벌고자 판매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5만.”
하지만 옵션이 절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일반적인 관찰 계열 스킬을 가진 마족은 낚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시작가도 저렴했고, 번식률과 관련된 아이템은 굉장히 희귀했다.
“후작 하마투안 님!”
“10만.”
“백작 시엘 님!”
…….
가격이 올랐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가 낚이진 않았다.
몇 차례 오가더니 곧 종결되었다.
“30만 포인트에 백작 푸루룸 님께 낙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나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그 과정을 지켜봤다.
하려면 할 수는 있었지만 딱히 바람잡이를 할 정도로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여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뒤로 몇 가지 아이템이 더 나타났다.
문제라면 정상적인 물건이 거의 없다는 것.
있어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잡스러운 아이템을 그냥 팔고자 내놓은 것이다.
앙겔라의 화분, 전력 신발과 같이 쓸 만한 아이템이 간간이 나오긴 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내가 기다리는 건 그런 잡스러운 것들이 아니었다.
마침내 20번째 경매 물품이 등장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번에 판매할 아이템은, 대단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지고한 불의 정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지배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절대자의 아이템……! 지금 소개합니다!”
드보롱은 목에 핏줄을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일꾼들이 커다란 철창 하나를 가져왔다.
그 안에 지고한 불의 정수가 들어 있었다.
“굉장한 불이군.”
“묘한 마력이야…….”
마족들이 그에 따른 감정을 시작했다.
“오오, 우리의 아홉 신 중 하나시어!”
“힘이 다했을 텐데도 저리 타오르다니!”
불의 정령들도 흥분하며 경건한 자세를 갖췄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행동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저게 불이라고?’
그들이 불이라 칭하는 그것.
지고한 불의 정수가 내 눈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두 발 달린 용으로밖에 보이지 않을진대.’
붉은 용과 두 발 달린 짐승을 교배시키면 저런 형태가 나올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