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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58화 (158/242)

던전 사냥꾼 158화

혹시 몰라 심안을 열었다. 저 용의 정체가 심히 궁금해진 탓이다.

이름- 지고한 불의 정수(???)

설명: 아홉 가지 불 중의 하나. 영원히 타오르며 ‘지배’하는 힘을 지녔다.

설명은 짧았다. 이름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저게 전부일 리 만무하다. 내 눈이 헛것을 보았을 리는 없었고, 그렇다면 에픽 등급의 심안으로도 확인하지 못할 봉인이 걸려 있거나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르릉!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용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음.’

뱃속이 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질적인 무언가가 안에 있는 느낌.

인상을 찌푸리며 용과 눈을 마주쳤다.

‘너는 누구냐?’

분명히 처음 보는 존재다. 나는 저렇게 생긴 용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그르르르릉!

불의 정수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양손으로 철창을 쥐었다. 그러자 녀석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허나 그뿐이었다. 타오르긴 하였으되 철창을 잡아 뜯지는 못했다. 강한 척을 하고 있지만 왜인지 무척 약해진 상태였다.

“우리의 정수께서 태동하신다!”

“이놈들……! 당장 저 철창을 열어라!”

불의 정령들은 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몇은 아예 화염구의 형태를 갖춰서 전투 준비를 끝마쳤다.

최상급의 격을 갖춘 정령들이다. 이깟 성 하나쯤은 먼지도 남기지 않고 타 버릴 것이다. 어둠의 정령들이 갖춘 전력도 만만치는 않겠지만 전혀 아랑곳 않는 태도였다.

드보롱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유연하게 대처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경매장에서의 혼란은 저희 어둠의 정령들도 원치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경매 물품’이고, 최종 입찰자에게 넘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령들은 자신의 ‘격’, 혹은 ‘계약’을 통해서 그 값어치를 지불할 수 있지요. 예컨대…….”

음흉한 미소와 함께 드보롱이 지브스를 바라봤다.

화염의 화수 지브스!

그는 무척이나 아니꼬운 표정으로 드보롱을 노려보고 있었다.

“불의 정령, 그중 서열 4위인 화염의 화수 지브스 님의 경우라면 일정한 격을 지불해 능히 수천만 포인트를 손에 쥐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아니면 이곳의 누군가와 간이 계약을 통해 포인트를 조달하는 방법도 있지요.”

그 누군가는 마족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의 정령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드보롱은 굉장히 자신 있어 하는 모습이다.

만약 계약을 하게 된다면 어둠의 정령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정령인 이상 ‘계약’의 이행에 있어선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처음 본 마족들과 계약 따위를 할 리는 만무하다고, 드보롱은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고로, 구매하십시오! 이곳은 경매장입니다! 눈이 돌아갈 만큼 훌륭한 아이템들, 탐이 나는 강력한 마수들 등, 보는 순간 절로 침이 고이는 모든 것을 판매하는 곳이지요! 보다 많은 포인트를 가진 이는 보다 좋은 물건을 구매하게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이는 상대적으로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말을 끝마친 드보롱이 짧게 인사를 했다. 지금까지 자기의 말을 들어 줘서 고맙다는 듯. 도태와 평등 사이에 느껴지는 괴리가 상당히 심했지만 그것을 일부러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이미 동의를 하고 들어온 것이다.

마족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정령들도 계약서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의 ‘격’, 혹은 ‘계약’을 통해 얼마의 포인트를 가질 수 있는지도 사전에 들었으리라.

“다시 경매를 진행하겠습니다. 지고한 불의 정수! 불의 정령들이 본래 모시던 아홉 가지 불 중 하나이며 그 힘은 ‘지배’를 담당한다고 합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수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시작가는…… 500만 포인트!”

내가 없을 적 마족들이 보유한 평균 포인트가 300만이라고 했었다.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포인트로 시작했다는 건, 아무리 봐도 마족들에게 판매하려는 셈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불의 정령들을 저격한 것이다.

바로 ‘구매하고 싶으냐? 그럼 격을 팔아라. 아니면 우리와 계약을 해라.’라는 뜻이었다.

어둠의 정령에게는 어느 쪽이든 이득이었다.

격을 판다면 상대 진영 정령들의 힘이 축소되는 것이고, 계약을 맺게 될 경우 그것을 이용해 여러 가지 전략을 세울 수 있다.

드보롱, 그리고 아도니스의 표정에 흡족한 미소가 서렸다.

너희는 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싶었다.

“500만 포인트.”

“나왔습니다! 500만 포인트. 랜달프 브뤼시엘 님……이군요.”

마지막 목소리가 꺾인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알게 모르게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걸 잡아냈다. 등장부터 시작해서 다른 정령들의 편을 들어주는 모양새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러나…….

‘드보롱, 영원한 우군은 없다.’

처음부터 각자의 이득을 위해 움직였다.

드보롱이 내게 경매 물품을 미리 알린 것이나 거래를 제안한 것도 이득을 얻기 위해서다. 나 역시 이득을 위해 불과 물의 정령들을 대동한 것이고.

그것을 배신당했다는 것처럼 여기지는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 승자를 위한 게임.

전생의 경험상 이 판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군도 없었다.

모든 건 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

거기다가…… 개인적인 흥미도 있었다.

‘너의 진짜 정체를 알고 싶다.’

다른 이들은 그저 불이라고 부르는 존재.

하지만 내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저 두 발 달린 용을 보게 된 순간부터 계속해서 다가가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저 존재를 잡으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500만 나왔습니다. 더 안 계십니까?”

“600만.”

“……아리엘 디아블로 님!”

이번에도 정령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아리엘 디아블로. 대공인 그녀가 불의 정수에 눈독을 들였다. 저게 무엇인 지 제대로 알고 있지 않고선 하지 못할 과감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파격적인 선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악!

2층 홀의 난관을 벗어난 그녀가 대뜸 내 옆에 앉은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휘하 마족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멀뚱히 나와 아리엘만을 번갈아 쳐다봤다.

우파, 판데모니엄은 아예 헛웃음을 흘려 버렸다.

하지만 비웃음은 아니다. 경계의 기색이 어렸다.

내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예전과 전혀 다른 존재감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판데모니엄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일 터.

그는 내가 오쿨루스를 죽였음을 은연중 깨닫고 있을 것이다. 현실을 부정해도 그만한 일을 저지를 자는 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라졌고, 판데모니엄은 내 던전을 공격했다.

선전포고와 같다. 던전의 중심부까지 침투했으니 이미 놈과 나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

내가 없었으면 모르되…….

대공들은 이미 수백 년간 싸워 온 탓에 절대로 손을 잡을 리 없지만 나는 다르다.

화가 난 내가 우파나 아리엘과 손을 잡는다면 판데모니엄은 힘겨운 싸움을 이어 가게 될 것이 뻔했다.

그것을 아니,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뭐 하는 수작이지?’

허나 나도 의아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리엘은 유일하게 종잡을 수 없는 대공이다. 그녀는 매우 변덕스러웠다. 내 옆에 온 것도 어떠한 의도인지 전혀 읽히지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리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뻔뻔스럽게 나를 쳐다보곤 말했다.

“랜달프, 랜달프 브뤼시엘. 나와 같이 앉게 된 소감이 어떠하냐?”

“불쾌하군.”

“하하! 맞다. 나도 그러하다. 랜달프 브뤼시엘, 너는 실로 불쾌한 놈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 하여 고개를 돌려 버리고 드보롱을 쳐다봤다. 어서 경매나 진행하라는 뜻을 보냈다.

하지만 아리엘의 말이 한 발 더 빨랐다.

“나는 마왕의 적통이며 마계를 주름잡을 대공이니라.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오시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여태껏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깨끗하게 닦인 길만을 걸을 특권이 내겐 있었다.”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아리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마계 옥션에 나타날 때마다 너는 달라졌다. 모든 사물을 대하는 태도, 스스로의 자신감. 그러나 너와 우리 대공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느니라. 그래서 모두가 너를 크게 여기지 않았다. 너 자신도 은연중 알고 있었을 테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구나.”

아리엘의 두 눈이 내게 향했다.

그 눈에는 무궁무진한 ‘궁금증’이 아롱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너는 벽을 넘었다. 나는 지금 그 벽을 넘은 자에게 짧은 축하를 보내고자 이 자리에 앉은 것이다.”

스윽.

말을 끝마친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2층의 홀을 바라봤다.

“오쿨루스는 죽었다. 우리와 수백 년을 싸워 온 그 녀석이 말이다. 허나…… 적어도 내가 생각기에 그의 죽음은 우리와 관련이 없을 것이다. 이런 결과를 그대들은 납득할 수 있는가?”

우파와 판데모니엄에게 묻는다.

우리의 적이 우리와 관련 없는 곳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느냐고.

대답은 없었지만 우파나 판데모니엄도 살짝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범인이 나임을 은연중 모두가 깨달은 듯싶었다.

“나는 랜달프 브뤼시엘을 새로운 네 번째 대공으로 인정한다. 그는 우리와 싸울 충분한 격을 갖췄으며 이 자리까지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올랐느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개척자에겐 본래 경의를 보내야 하는 법.”

이건 또 뜬금없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 디아블로는 변덕이 심하지만 남을 쉽게 인정하는 자는 아니었다. 휘하 마족으로서 들이긴 해도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주진 않는다. 은연중 다른 대공들마저 깔보는 게 그녀였다.

그녀만이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한데…….

아리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랜달프 브뤼시엘. 지금부터 너는 나의 적수다.”

맞다. 아리엘이 이 말을 꺼낸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관계가 형성됐다.

대공은 대공끼리 연합하지 아니하는 게 수백 년간 이어진 규칙.

즉, 나는 누구의 편에 들 수 없고 누구도 내 편에 들지 못한다.

“인정한다.”

판데모니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즉시 인정해 버린 것이다.

“아리엘! 판데모니엄! 드디어 미쳤느냐?”

우파만이 어이없다는 듯 항변했다.

하지만 아리엘과 판데모니엄은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시스템마저 우파와 다른 판단을 내렸다.

[불가능한 업적! 최초로 마계 대공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대공이란 마왕 다음가는 절대적인 존재. 그들 다수의 인정을 받은 이는 마계 역사상 전무했습니다. 마왕이 없는 지금, 그들이 인정한 자는 충분히 대공으로서의 격을 갖췄다고 판단, 대공으로의 품격을 부여합니다.]

[상태창의 표시가 마계 백작 → 마계 대공으로 변경됩니다.]

[이제 휘하 마수를 빈 던전의 ‘던전 마스터’로 임명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던전 마스터가 된 마수는 마족과 같은 권리를 가지며 마계 옥션 등에도 참여할 권한이 생깁니다.]

[6,000,000PT가 지급됐습니다.]

[업적 점수 5,000점이 추가됩니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서로 치고받길 원했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마왕이 되는 게 내 꿈이었다.

지금 그 꿈에 한 발자국을 더 다가선 것이다.

홀로 강해져서 그들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있지만 인정을 받고, 받지 않고의 차이는 크다.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정당성’, ‘정통성’이 부여되었으니 말이다!

“마신이 만든 시스템도 너를 대공으로 인정한 모양이구나.”

아리엘 디아블로는 그것이 진정으로 기쁜 듯싶었다.

자신의 혼을 울릴 적수가 등장했음에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투욱.

그러곤 다시 내 옆에 앉았다.

적수로 인정했으면서 이러는 저의가 뭔지 잠시 의문이었으나, 그다지 아무런 생각도 없을 가능성이 컸으므로 나도 무시하기로 하였다.

“진행자여, 오늘은 기쁜 날이다. 하지만 하던 건 마저 해야 하지 않느냐?”

드보롱이 정신을 차렸다.

“아…… 축하드립니다. 그럼…… 경매를 재개하지요. 아리엘 디아블로 님께서 600만 포인트를 부르셨습니다! 더 입찰할 분 안 계십니까?”

“700만.”

“랜달프 브뤼시엘 님! 혹시 2년간 포인트만 모은 거 아닙니까? 대단하군요.”

빠득!

내가 700만을 부르자마자 지척에서 이 가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러곤 아리엘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만족하며 미소 지었건만 태세 변화가 심상치 않다.

‘정말 알 수가 없군.’

나도 내심 고개를 저었다.

다른 대공들보다, 아리엘 디아블로가 가장 어려운 상대임이 이번에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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