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60화 (160/242)

던전 사냥꾼 160화

* * *

개별 경매가 막을 내렸다. 불과 물의 정령이 참여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그들은 이 경매의 경험을 바탕으로 돌아가서 보고를 해야 했다.

“경매 물품은 던전이란 곳으로 돌아가야 발송이 된다지? 그 전에 나는 먼저 정령왕께 고하러 가겠다. 랜달프 브뤼시엘! 그대의 이름도 정령왕께 반드시 전해 주마. 나와 그대는 계약이 돼 있으니 내 이름을 부르면 그대가 어디에 있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브스는 상당히 흥분한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처음으로 겪는 경매였고, 어둠의 정령들의 행태도 파악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2만 년 전 잃어버린 그들의 신도 되찾기 직전이었으니 그 마음은 이해가 되었다.

‘과연 불의 정령왕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계 옥션과 포인트. 그로 인해 ‘격’을 올리고 내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무언가 움직임을 보일 게 분명했다. 판매되는 물건도 상당한 수준이었고, 마족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으니 가만히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둠의 정령들을 이용하거나, 혹은 적대하거나……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어둠의 정령들이 모를 리 없었다. 본래 저들의 격을 내리는 게 목적이었으나 그마저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가는 길이 평탄치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지브스가 작게 웃었다.

“모든 상황을 상정하고 최정예로 구성해서 이곳에 왔다. 우리를 공격하는 순간 불의 정령과의 전면전을 뜻하니 확신이 서지 않거든 쉽사리 건드리진 못할 터. 설령 우리를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바라는 바다.”

“자신만만하군.”

지브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당장 보이는 불의 정령들 모두가 최상급의 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만한 전력이라면 어둠의 정령들의 영역을 빠져나가기엔 충분하다.

내가 고개를 주억이자 지브스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이제는 계약자라고 불러야겠군. 계약자여! 지고한 불의 정수를 우리에게 넘기는 순간 우리의 계약은 보다 완벽해진다. 정령왕께서도 기뻐하시겠지. 계약자의 이름을 필히 각인하시리라. 이것을 결코 작게 보지 마라.”

불의 정령왕이 내 이름을 중요히 여긴다는 뜻이다. 특별한 일이 생기면 도와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계약 외적인 요소였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였다.

그들을 움직여 제대로 판을 키우는 것!

‘잘하면…… 가능하겠어.’

피식 웃었다. 정령계의 판을 키운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내가 계획하는 건 지구에서까지 영향을 끼칠, 거대한 변화다.

예컨대 불의 정령이나 물의 정령들이 인간을 상대로 계약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령사를 대폭 늘린다.’

정령은 강하다. 허나 전생에서 그 힘을 다룰 줄 아는 인간은 적었다. 그러나 내가 길을 터 주면 계약 자체가 어렵지 않게 된다. 정령왕과 접촉하여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리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인간의 힘을 키우면 더욱 유리한 고지에 앉을 수 있었다. 내게는 여러 가지 신분이 있었고, 기린의 도움을 받아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윽고 지브스와 그의 휘하 정령들이 내게 짧게 고개를 숙이며 몸을 돌렸다. 물의 정령과 함께 가면 더욱 안전할 것이건만 원체 사이가 좋지 않다 보니 괜한 고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물러나기 무섭게 케르피를 비롯한 물의 정령들이 다가왔다.

“랜달프 님, 대공으로의 진급을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찰랑이는 머릿결을 흔들며 케르피가 싱그러운 미소를 흘렸다.

“당신과 저는 이제 곧 완전한 계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새로운 계약자를 받은 건 500년 만의 일이지만……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어요.”

“죽지 않는다면 가능하겠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케르피,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불의 정령들은 자신만만한 태도였지만…… 어둠의 정령들이 세운 계획이 파탄 났으니 어떠한 행동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경매를 진행하며 의도를 읽혔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사이가 틀어질 게 확실하다면 여기서 다른 정령들의 전력을 줄이는 것도 고려해 볼 법하다.

십 중에 팔구는 돌아가는 길에 습격이 있으리라 사료되었다.

내 저의를 파악한 케르피가 미소를 잃지 않고 답했다.

“계약자님. 물의 정령은 잔잔한 호수도, 거친 바다의 해일도 될 수 있답니다.”

“죽는다면 활은 내가 접수하마.”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겠군요.”

신기, ‘히아신스의 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자 케르피도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나도 어느 정도 리스크를 지고 있었기에 이는 타당한 결론이었다. 지브스나 케르피가 가는 도중 죽어 버리면 나는 허공으로 3천만 포인트를 날리는 꼴이다. 그러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담보로 맡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우리와 오래 얘기하면 나쁘게 볼 나쁜 이들이 이곳에 너무 많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케르피가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경매장을 벗어났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창구를 개방한다고 합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옆에 있던 크리슬리가 즉시 말을 걸어왔다.

창구라.

본경매에 있을 아이템, 마수 등을 미리 보여 주겠다는 건데.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저도 방금 막 전해 들은 터라…….”

크리슬리도 자세한 사항은 모르는 모습이었다.

‘시선을 돌려 두겠단 속셈인가?’

불의 정령, 그리고 물의 정령.

둘을 동시에 잡으려면 상당한 병력이 필요하다.

성 내부가 텅텅 빌 수밖에 없었고…… 이를 의아하게 여긴 어느 마족이 목격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면 완전 범죄는 물 건너가고 추궁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어둠의 정령들로선 최악의 경우다.

‘여기서부턴 온전히 그들의 실력을 믿을 수밖에.’

나는 지금 절벽 위의 외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이상으로 더 깊이 관여한다면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본경매도 그들만큼이나 중요했다. 1년의 공백이 있으니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론을 내리곤 말했다.

“창구로 가자.”

내가 없는 2년 사이에 경매 물품의 질이 얼마나 좋아졌을까.

최상급 2Lv의 티탄을 보았고, 그렇다면 그보다 뛰어난 마수나 아이템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건이 조금 적군.”

작게 중얼거렸다.

창구 안에 보이는 건 100개가 되지 않았다.

끽해야 50개 안팎.

말 그대로 구실만 갖춘 느낌이다.

“작년부터 절반만 공개하기 시작했지.”

어느덧 아리엘 디아블로가 옆으로 다가왔다.

“이유가 있나?”

“글쎄, 신비감이라도 주려는 것 아닐까? 딱히 큰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

보여 주다가 보여 주지 않는다. 답답함이 생겨나는 건 당연지사다. 더불어서 보이지 않는 경매 물품에 대해 더욱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일종의 맛보기라는 건가.’

이것도 전략인가 싶었다. 물건을 공급하는 게 어둠의 정령들뿐인지라 불만을 표출할 수도 없었으니…….

“랜달프 브뤼시엘. 이번엔 얼마나 대단한 모습을 보여 줄지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리엘이 지나가듯 말했다.

나는 짧게 읊조렸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법이라더군.”

“그런 말이 있었나? 흠……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크다…… 허나 내 기대는 대체로 맞아서 동의는 못하겠구나.”

잠시 고민하던 아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아리엘 정도의 마족이라면 기대와 결과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날 것도 같았다. 그녀의 뛰어난 안목과 길을 넓히는 능력은 감히 발군의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마수들이 많군.’

이어 아리엘에게 관심을 접곤 창구 안을 둘러봤다.

전체적으로 급이 높은 마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개인의 힘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던전 자체의 저력이 중요해진 시기.

어둠의 정령들이 그 부분을 잘 잡아냈다고 할 수 있었다.

‘굴핀, 티탄. 최상급이되 레벨2 안팎의 마수들.’

최상급의 마수로서 당장 보이는 건 저 두 개가 전부였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왕이면 3Lv 수준의 마수가 보이기를 바랐는데, 아직 시기상조인 건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숨겨 둔 것인지…….

“랜달프 브뤼시엘이여, 실망스러운가? 그러나 작년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적당한 것만 내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도록.”

“…….”

아리엘은 바짝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반대편에서 크리슬리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꿈쩍도 안 했다. 심지어 그녀의 휘하 마족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도 요지부동이었다.

‘의도를 모르겠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엘 디아블로. 정말 어려운 상대라 아니할 수 없다.

개별 경매가 끝나고 2시간 후.

본경매가 시작되었다. 성 내부가 평소보다 조용한 걸 보면 이미 많은 숫자의 어둠의 정령이 빠져나간 듯싶었다.

‘지브스, 케르피.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지.’

고작 이 어둠의 숲을 빠져나가지 못해 비명횡사한다면 1,500만 포인트나 부르며 계약을 한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 된다. 하지만 내 안목이 정확하다면 그들은 어렵지 않게 이 숲을 빠져나갈 것이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여기 앉으십시오.”

크리슬리가 미리 먼지를 털어 둔 객석으로 나를 안내했다.

본경매라서인지 껌딱지마냥 붙어 있던 아리엘도 2층의 홀로 이동한 뒤였다.

“크리슬리, 많이 눈에 담아 두었나?”

“예, 마스터의 적이 될 자들의 얼굴을 빠짐없이 기억했습니다.”

“직접 보니 어떠한가?”

“한 가지 확실한 건…….”

크리슬리가 슬쩍 고개를 돌려 2층의 홀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모인 대다수의 마족보다 제가 더 강하다는 겁니다.”

정확히 봤다. 크리슬리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이곳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모두 들으라고 한 소리.

일종의 도발이었다.

“다크 엘프 년이 겁이 없군.”

“흥…….”

저들이라고 어찌 기억하지 못할까. 1년 차, 크라스라와 함께 있던 가녀린 다크 엘프가 크리슬리임을.

그러나 직접적으로 부딪혀 오는 이는 없었다.

정령들 때문인지, 아리엘 디아블로 때문인지, 나 스스로의 격을 느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크리슬리는 대놓고 마력을 흩뿌리는 중이었다. 내가 제지하지 않자 거리낌 없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아예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경이로운 성장.

그리고 크라스라와 크리슬리를 사려고 했던 우파가 가장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말마따나 표정도 썩어 있었다.

촤아악!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전방을 바라보자 곧 커튼이 걷히며 드보롱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재차 인사합니다. 제2부이자 본경매의 진행을 맡게 된 드보롱입니다. 불과 물의 정령들이 없으니 조금 덜 습한 것 같군요.”

우스갯소리로 말한 드보롱이 그러면서 살짝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표정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드보롱은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 첫 번째 물건을 소개합니다. 이건 정말 물건입니다!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수! 아홉 개의 목을 가진 뱀의 왕! ……히드라입니다.”

마지막 발언이 끝난 순간, 나는 눈에 힘을 잔뜩 줄 수밖에 없었다.

히드라라니. 그것을 정말 어둠의 정령들이 사로잡았단 말인가?

하물며 고작 5년 차에?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물품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파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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