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64화
내가 가진 던전은 한국을 포함하여 세 개. 이중 두 개의 임명을 끝냈으니 공실 없이 꽉꽉 채운 셈이었다. 크리슬리와 타쉬말의 능력이라면 던전 마스터로서도 손색이 없을 터.
그리고 타쉬말에겐 건넬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게 무언지 알아보겠나?”
경매에서 구매한 물건 중 하나를 타쉬말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본 타쉬말의 눈에 큼지막하니 커졌다.
“천사의 알이 아닌가? 알의 단계에서부터 이미 축복이 서린……. 맙소사, 이걸 어디서 구한 것이냐?”
“마계 옥션이다. 너도 내년부터 출입이 가능한 공간이지.”
“어둠의 정령들이 천계의 알에 손을 댔단 말인가!”
타쉬말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도 천사의 알을 업적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기는 하지만 어둠의 정령들과 달리 대의명분이라도 있었다. 다른 마족들의 씨를 말려 인간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이다.
실제로 신들과 약속한 회귀의 조건도 그것이었다. 크게 신경은 안 써도 기회를 줬고, 오로지 그 하나만을 약속했다. 기적과 같은 일. 가만히 등을 돌릴 만큼 나는 몰염치한 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몇 가지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여간에…… 타쉬말은 내 뜻에 동참했지만 어둠의 정령들은 경우가 아예 다르다. 타쉬말은 마계 옥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는 상태였고, 어둠의 정령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아이템이나 마수를 판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천사의 알 또한 그와 같은 명목으로 판매되었을 터.
그녀의 분노는 지극히 당연했다.
“걱정 마라. 이것 외에는 없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타쉬말이 조금 화를 누그러트렸다.
“이 알은…… 천왕님의 축복이 깃든 특별한 알이다. 상급의 천사로 내정된 알에게만 천왕께서 직접 축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치품, 지품, 좌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허나 타쉬말조차 본래는 중급 주천사의 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능력을 선보였건만 상급의 천사라?
“타쉬말, 네가 맡아 키우도록.”
“말도 안 된다! 지금 당장 천사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할 신성한 알이다!”
타쉬말이 크게 반박했다. 다른 건 몰라도 상급의 천사에게 보내는 예우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알을 받은 손길도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는 냉정히 웃었다.
“누구에게 말인가? 지금 지구에 머무는 다른 천사들에게? 그들이 우리의 손을 탄 알을 받아 줄 것 같은가? 하물며 그들은 천계로 돌아가지 못한다. 언제나 마족들의 위협을 받고,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아 안전하지도 않다.”
나도 조금은 천사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마족과 타락한 천사의 손을 타 버린 알을 그들은 받아 주지 아니할 것이다. 축복을 받았다고 한들 마찬가지다. 하물며 상황도 좋지만은 않았다.
“…….”
타쉬말은 할 말을 잃고 묵묵히 있었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안전히 양육할 수 있는 장소로는 일본의 던전만 한 곳이 없다. 알겠나? 네가 아니라면 이 알은 그저 방치당한 채 빛조차 보지 못하고 끝이 날 운명 속에 있다는 말이다.”
“……알겠다. 그러나 크게 기대는 말라. 나보다 격이 높은 천사의 양육을 내가 온전히 잘할 자신은 없으니…….”
씁쓸히 읊조리며 타쉬말은 몸을 돌렸다.
어차피 그녀가 못한다면 아무도 못한다. 나와 내 휘하 마수 중에서 천사에 관한 지식은 그녀가 가장 많은 탓이다. 지금은 타락하긴 하였으나 본질은 천사 그 자체였으므로.
‘남은 포인트는 1,200만가량.’
임명식은 끝났다. 따로 예를 차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하다. 그런 허례허식보단 실적이 더욱 중요했다.
‘내가 착용할 것으로는 이 반지 하나면 되었다.’
나는 경매장에서 구매한 것 중 하나인 ‘정복자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심안을 띄우자 그에 관한 설명이 떠올랐다.
이름- 정복자의 반지(Epic, Set)
설명: 정복자만이 착용할 수 있는 절대 반지입니다. 두 개가 한 쌍의 세트이며 나머지 하나의 반지를 함께 착용하거든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 착용자의 마력과 비례하여 ‘위엄’ 효과. 소모한 마력의 회복력 대폭 상향(정복한 영지 하나당 +10%)
* 개인 소유의 ‘영지’를 가진 자에게만 효과가 발휘된다.
* 약자 멸시의 반지와 함께 착용 시 ‘파이널 임펙트(Ex Epic)’ 스킬 사용 가능.
따로 능력치를 올려 주는 옵션은 없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건 세트의 효과와 소모한 마력의 회복력 향상이다.
상처를 재생하거나 잃은 체력을 돋워 주는 아이템은 많지만 마력의 회복을 돕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물며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성장형 아이템이었다.
이 회복력이라는 게 정확한 기준이 없어서 애매모호해 보이지만 대략 감은 잡을 수 있다. 내 경우 모든 마력을 소모하면 대체로 5일은 쉬어야 회복이 되는 느낌이었다. 던전 세 개와 지저 세계를 접수하며 40%가 향상되었으니 이 일수가 3일 수준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약자 멸시의 반지는 아직 구할 길이 없지만…….’
애당초 처음 보는 반지였다. 나도 약자 멸시의 반지가 어디에 있을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언제고 반드시 구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크리슬리, 로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로이. 그 작은 다크 엘프는 한국의 각성자들, 그리고 기린과 함께 판데모니엄과 관련된 마족의 던전을 공격하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공격의 성과가 나타날 시간이었다. 못내 궁금하였다.
“수정구를 가져오겠습니다.”
크리슬리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떠났다.
잠시 후 그녀가 자기 몸통만 한 크기의 수정구 하나를 가져왔다.
그곳에 마력을 흘려 넣자 로이의 주변 영상이 떠올랐다.
* * *
“젠장!”
수천의 각성자 중 하나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피폐한 몰골. 접질린 다리를 억지로 끌며 이동하는 중이었다.
“거의 다 됐는데! 던전 코어가 코앞이었는데!”
“거기서 충원이 이루어질 줄이야.”
완전한 던전 공략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공략 직전까지 갔으나 갑작스러운 마수의 충원으로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기린이 발동시킨 ‘결계’가 없었다면 몰살당할 판국이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그들에게 입힌 피해는 실로 막중한 것. 고국으로 돌아가 다시금 힘을 기르면 저들을 없앨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장 선두에서 여인의 형상을 취한 기린이 말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여태껏 억눌리고 도망만 다니던 각성자들이 반격을 가한 것이다. 이 경험은 저들을 빠르게 성장시켜 줄 터였다.
“마, 맞아요…….”
그 옆에서 로이가 고개를 주억였다.
전선에서 함께 싸우며 로이도 나름 분주히 움직였다. 말은 버벅거렸으나 몸 곳곳에 상처가 생겨서 제법 믿을 만한 얼굴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이들은 지도한 둘이 그렇게 말하자 분위기가 단박에 반전되었다.
“맞아. 구세주의 아이께서도 동의하시잖아?”
“힘을 기르겠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부디……!”
각성자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스스로의 힘으로 던전 코어의 공략 직전까지 간 것이다. 오로지 각성자만으로 해낸 쾌거였다. 전례가 없는 일. 자신감이 상승할 법도 했다.
그 소란의 와중 기린이 로이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아이야, 저들의 의지는 나에게만 닿아 있지 않다. 너의 주인이 나선다면 일이 쉽게 풀리겠으나 그에게 그럴 의지는 없는 것 같으니…… 네가 나서야겠다.”
“제가요?”
“나는 저들에게 암시를 걸었다. 내 ‘기린아’ 스킬은 저 중 몇몇에게 왕의 기질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생긴 탑은 무너지기 마련.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하다.”
“기린 님이 하시면 되잖아요?”
“나는 저들의 수호신이니라. 그 믿음을 전제하에 내 스킬이 성립하는 것인즉. 내가 저들을 벌한다면 왕도 탄생하지 못하게 되리라. 설령 탄생한들 그는 성군이 아닌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겠지.”
로이가 망설이며 말했다.
“……마스터의 동의를 구해야 해요.”
기린이 얇게 웃었다.
“그라면 동의할 것이다.”
* * *
나는 로제를 불렀다.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로이 혼자서는 벅찰 것 같았다. 아무래도 로제의 도움이 있어야 할 듯싶었다.
“로제, 지금 바로 로이에게 가서 이 검을 건네라.”
“엄청 멋있게 생긴 검이네요?”
“에세랄 블레이드다. 로이를 증명할 검으로선 충분할 것이다.”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거는요, 마스터?”
로이 혼자서 검을 가진다니 샘이 난 모양이었다.
“너는 따로 만들어 주마. 안 그래도 소량의 ‘오리하르콘’을 구할 수 있었다.”
“앗! 그거 저도 책으로 봤어요. 대단한 금속이라고요. 그걸로 로제의 검을 만들어 주신다는 건가요? 와!”
자리에서 방방 뒤며 로제가 기쁨을 표했다.
오리하르콘.
마계 옥션에서 구매한 물건 중 하나.
오리하르콘은 신의 금속이라 일컬어지는 지상 최강의 철이다. 이 철을 정제하여 무기를 만들면 그 하나하나가 역작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그만한 실력의 대장장이를 구하기도 힘들지만 내겐 드워킹과 오스웬이 있었다. 둘의 조합이라면 이 금속도 충분히 제련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이 완성되거든 따로 보내 주겠다. 로이에게 검을 건넨 뒤 합류하여라.”
“로제보고 로이를 도우라는 말씀이죠?”
“그렇다.”
“하긴, 로이만으로는 미덥지 못해요. 로제가 옆에서 철저하게 감시해야 해요.”
로제는 자기 몸보다 큰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이후 M3에게 검을 옮기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M3의 어깨에 올라타곤 로제가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경매의 사후 처리는 대강 끝이 났다. 다른 것들은 시간이 필요하고, 당장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지고한 불의 정수.’
지고한 불의 정수는 철창 속에 갇힌 채로 던전에 들어왔다. 나는 최상층으로 올라가 그 자태를 잠시 감상하였다.
다른 이들은 모두 불의 형태라고 하지만 내게는 두 발 달린 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짧은 손도 있는 걸 보면 ‘용인(龍人)’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등줄기를 따라 불이 솟아올랐으며 날카로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너는 무엇이냐?’
속으로 되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끌림이 있었던 걸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익숙한 느낌도 들어서 얼마나 당황했던가.
이제는 확인할 차례였다.
불의 정령에게 돌려주기 전에 내 궁금증을 먼저 해소할 것이었다.
덜컥!
철창의 잠금쇠를 풀었다. 문을 열고 놈을 바라보자…….
그르르르르!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
그 중심에서 나는 눈을 떴다.
‘여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공간이었고, 이런 곳으로 이동한 기억이 없었다. 불의 정수가 내게 달려든 직후 벌어진 일이라는 것만 추측할 수 있었다.
“네 안에 든 것을 내놔라.”
새하얀 공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이윽고 눈에 익은 존재가 나타났다.
“불의 정수인가?”
두 발 달린 용.
용인이라 칭한 그놈이었다.
여기는 놈의 심상 세계쯤 되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은 이프리트. 아홉 개의 불 중 하나. 콘테고놈이 훔쳐 간 내 반쪽은 네게 이전되었다. 내놓지 않으면 네놈을 멸하리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추측 가능한 점이라면 내가 콘테고놈을 죽였고, 그 순간 무언가가 나한테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프리트, 네 말이 맞다 해도 내게 온 것은 그 순간부터 온전히 내 것이다. 거래라면 응하겠으나 단순한 협박으로 건네줄 생각은 없다.”
“내 비록 지금까지는 갇혀 있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이곳은 나의 세계이니 너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 내놓지 않겠다면…… 그 몸을 통째로 차지하리라!”
그그그그긍.
세계가 떨리며 이프리트의 몸이 불어났다.
잠시 후 변형된 이프리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