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66화
제압한 대상이 나를 따르도록 만드는 스킬. 지배의 권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야말로 나를 위한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활용도가 높겠군.’
단순히 지배 하나만 봐도 대단한 능력일진대 숨겨진 옵션에 부가적인 효과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바로 영역 선포의 무효화! 나 하나에 한정하지만 이는 결코 간단한 의미가 아니었다.
천사의 영역, 다른 마족의 던전 등에서 아무것도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격’을 쌓은 이는 자신만의 영역을 자동으로 가지게 된다. 아니면 자체적인 스킬이 있을 수도 있고……. 그 자체가 무효화되니 이 효용은 값어치를 따지기가 어려울 수준이었다.
톡.
가볍게 심장 쪽을 두드렸다. 이어서 뇌신을 흘려보내자 심장 안에 갇힌 이프리트를 느낄 수 있었다.
‘나락 군주의 격이 지고한 불의 정수보다 높은 것이겠지.’
하기야 신에 도전했고, 그 가까이 다가간 인간이 얼마나 강하겠는가. 반신조차 되지 못한 이프리트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이히.”
“예, 마스터. 이히가 여기 있어요~”
부르기 무섭게 이히가 지근거리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왔다. 근처에서 대기하며 내가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눈망울엔 기쁨이 흘러넘쳤다. 내가 던전에 돌아온 이후부터 이히는 내 근처를 잘 떠나려 하지 않았다.
“막시움과 오스웬을 불러와라.”
“이히히! 넵!”
싱글벙글 웃으며 이히가 떠나갔다.
이윽고 나는 고개를 돌려 철창 옆에 놓인 얼음 동상을 바라봤다.
거대한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다크 엘프 여인.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
저주받은 그녀의 시체였고,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막시움과 오스웬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5분 정도가 지나자 이히를 필두로 막시움, 오스웬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히는 내 명령을 완수했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했고, 나머지 둘은 고개만 갸웃할 따름이었다.
“너희를 부른 건 다른 게 아니라 이 동상에 대해 묻고자 함이다.”
“매우 아름다운 다크 엘프군요. 저 이마의 문양은…… 하이어입니까?”
오스웬이 먼저 답했다.
“맞다. 그녀는 크리슬리의 친모다.”
“……!”
던전에서 생활하며 크리슬리가 누구인지 오스웬과 막시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주를 받은 채 죽었지. 나는 이 저주에 대해 너희에게 묻고 싶다. 익숙한 느낌이 나지 않은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으나…….”
“막시움, 기탄없이 말하라.”
“기억을 잃기 전, 황제 폐하가 가진 기질과 약간 비슷한 듯싶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사이합니다. 저로선 확답을 내리기 어렵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허나 그림자 황제는 아니다. 그와 비슷한 기질을 가진 무언가지. 하지만 그림자 황제는 하나뿐이고, 그의 흉내를 낼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다.”
단언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존재는 그림자 황제뿐이라고.
흉내를 낸다 하여 낼 수 있는 이가 아니다.
“……허무!”
오스웬이 손뼉을 쳤다.
그는 내가 진짜 나락 군주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신에 도전한 나락 군주. 허나 신이 되지 못한 그가 이후 간 곳이라면…… 허무밖에 없었다. 나는 오쿨루스에 의하여 콘테고놈이 소환된 걸 또한 알았다. 마찬가지로 마계에 나락 군주가 소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나락 군주가 허무에서 돌아왔다면 진마룡 아오진과 비견될 마력을 지녔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막시움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버젓이 이곳에 계십니다. 허무로 끌려간 이들은 현세에 결코 존재하지 못한다고 압니다만.”
“허무를 규정할 수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허무가 아니겠지. 하여…… 나를 잘 알고 있는 너희에게 묻고자 한다. 이 저주, 어떻게 풀면 되겠나?”
나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나락 군주가 허무에서 마계로 소환되었다고. 이곳 지구에 소환되지 않은 게 다행이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후에 마계의 상황이 허무에서 돌아온 나락 군주에 의해 엉망진창이 된다면 대공들의 움직임도 변화가 생길 것이었다. 어쩌면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무리가 나타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니 준비를 해야 했다.
만약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할 수 있도록.
한참이나 고민 끝에 막시움이 말했다.
“진정 황제 폐하께서 손을 쓰셨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나마 하나 있다면 저주를 튕겨 낼 ‘마구’를 만드는 수밖에는…….”
“저주에 특화된 마법 무구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시선을 돌려 오스웬을 바라봤다.
“만들 수 있겠는가?”
오스웬이 고개를 저었다.
“재료가 문제지요. 이만한 저주를 튕겨 낼 수 있는 마구라는 게…… 대장장이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 구상해 둔 게 있긴 합니다만, 전설의 오리하르콘이라도 어디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나락 군주에 의해 오스웬은 고통을 받았다. 나락 군주가 사용하는 힘 같은 것도 잘 알 테고, 방비하고자 여러 가지 구상을 해 뒀을 게 뻔했다. 예상대로 그러한 부분에서의 준비는 끝난 거 같았다.
“있다.”
남은 게 있다면 재료뿐!
“오리하르콘이 있다고요?”
“무구 몇 개 만들 정도는 구할 수 있었지. 가능하겠나?”
이히를 바라보자 이히가 재빨리 날아갔다. 이제 눈빛만 교환해도 적당히 알아들을 수 있는 눈치가 생긴 이히였다.
이윽고 오리하르콘 더미와 함께 이히가 돌아왔다.
그것을 본 오스웬이 입을 크게 벌렸다.
“……세상의 오리하르콘 전부를 긁어 오셨습니까? 제가 살아생전 본 것도 손톱만 한 게 전부인데…….”
“오스웬.”
“가능합니다. 충분하지요.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하겠습니다, 허허.”
오스웬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 필요한 건 없나?”
“저주를 살피고 재료를 보강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요정님에게 따로 말씀드리지요. 안 그렇습니까, 요정님?”
오스웬이 이히를 바라보며 윙크를 날렸다.
이히는 도도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히는 새로운 찻잔이 가지고 싶어.”
“당연히 만들어 드려야지요.”
“예전에 준 꿀통 있잖아? 그거 별로인 거 같아.”
“당연히 새로 만들어 드려야지요.”
아무래도 그간 모종의 거래가 오가고 있었던 듯싶었다. 크게 개의치 않을 수준이라 대놓고 내 앞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쯤은 나도 애교로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크리슬리의 차례는 조금 더 뒤로 가겠군.’
쉴라의 시체로 언데드를 만드는 것보다 이 저주를 해석하는 게 먼저다. 그리하여 대비한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생존을 모색할 수 있을 터였다.
‘나락 군주라.’
쉴라가 이 상태가 되어 죽은 시기는 상당히 오래전이었다. 진정으로 허무에서 돌아온 나락 군주의 소행이라면 이후 녀석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예상이 됐다.
그로 인해 대공들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할지도…….
나는 표정을 굳힌 채로 막시움을 바라봤다.
“막시움, 너는 따로 해 줄 일이 있다.”
* * *
다음 날.
막시움이 리치를 비롯한 수천 기의 해골 병사와 함께 던전을 나섰다. 눈에 띄지 않는 경로로 이동하며 태평양을 건넜다.
남아메리카 칠레에서 다시금 등장했으며 등장한 즉시 주변의 모든 걸 쓸어버렸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던전과 마수, 인간을 가리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죽이며 혼란을 야기했다. 시체로 병사를 만들고, 그렇게 숫자를 불리자 세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남아메리카는 대공 우파가 있는 본진과 같은 영역.
하지만 그들은 막시움의 출현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아리엘 디아블로와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대부분의 병력들이 위쪽으로 빠져 있던 탓이다.
북아메리카.
미국 라스베이거스.
던전이 있으나 지난 5년간 별다른 몬스터 웨이브가 없었기에 나름 평화로운 도시로서 각인된 장소다. 사람들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도리어 피해를 받은 세계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왔다.
사람들은 이 일상이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안주하고 있었다. 미국 최대의 휴양지로 이름을 드날릴 정도이니 두말은 필요가 없다.
실제로 모든 던전 중 거의 유일하게 몬스터 웨이브가 한 번도 안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200기의 데스 나이트.
500기의 다크 워리어.
수많은 오우거와 켈베로스, 기타 고급종의 마수들이 던전을 통해 나타났다.
그리고…… 최상급 마수 다크 홀스 위에 탄 아리엘 디아블로!
그녀가 등장한 즉시 시끄럽던 라스베이거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나 아리엘 디아블로가 선포한다. 인간들의 멸족을, 지구의 멸망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외견, 이마에 난 커다란 뿔, 압도적인 분위기, 그 모든 게 혼합되어 사람들의 정신을 앗아 갔다.
마수들의 갑작스러운 등장도 등장이지만 진정으로 모두를 압도한 것은 그녀 하나의 존재다.
하지만 아리엘은 대공이며 마족이다. 인간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이가 아니었다.
도리어 인간이라면 진절머리를 치는 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엘 디아블로가 차갑게 말했다.
“전부 밟아 죽여라.”
히히힝~!
다크 홀스가 거칠게 날뛰자 아리엘 디아블로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후아아아!
검에서 어두운 줄기가 길게 뻗어 나가 데스 나이트와 다크 워리어의 머릿속에 침투했다.
바로 ‘왕의 축복(Epic)’ 스킬이다. 동시에 어둠의 마력이 더욱 진해져 데스 나이트와 다크 워리어가 있는 곳은 아예 검은색 안개가 낀 것처럼 내비쳤다.
하지만 인간들도 이러한 상황을 아예 상정하지 않고 있던 것은 아니다.
정예로 구성된 각성자 1천이 근처에 항시 대기하는 중이었다. 허나 아리엘은 그 중심부로 뛰어들어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반경 수백 미터를 집어삼킨 폭발이 아리엘로부터 일어났다.
땅이 뒤집히며 동시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정예의 각성자들도 그 여파를 견딜 수 없었다. 다수의 각성자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졌다.
그 중심부에서, 아리엘은 차갑기 그지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종말의 시간이다, 인간들이여.”
* * *
쉴라의 동상과 관련되어 실마리를 얻었고, 막시움을 움직여서 혼란을 일으켰으니 나도 따로 준비를 할 차례였다.
“지브스, 케르피.”
불과 물의 정령들.
과연 어둠의 숲을 벗어나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을지 확인을 해야 했다.
내가 둘의 이름을 입에 담자 계약의 이행이 진행되었다. 작은 균열 두 개가 생성되며 머지않아 두 존재가 나를 반겼다.
“계약자여, 드디어 불러 주었구나.”
“다시 뵙게 돼서 반가워요, 계약자여.”
지브스와 케르피는 동시에 등장했다.
인간과 흡사한 외형 그대로, 그러나 조금 모습이 흐릿했다.
“둘 다 부상을 입었나 보군.”
“망할 어둠의 정령들! 이 원한은 백 배로 돌려줄 것이다.”
“마찬가지예요. 그들에게 물의 정령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해 주겠어요.”
웬일로 상극의 정령들이 의기투합을 하였다.
모두 어둠의 정령 덕이다.
그때 화염의 화수 지브스가 나를 쳐다보곤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계약자여, 그대에게서 매우 익숙한 느낌이 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지고한 불의 정수와 계약을 했다.”
“음……? 우리 아홉 불 중 한 분과 계약을 했다고? 잠깐…….”
킁킁!
지브스가 냄새를 맡고는 기겁하여 물러섰다.
“믿기지가 않는군. 분명히 계약이 되어 있다. 그것도 지고한 불과!”
“어쩔 것인가? 본래 돌려주는 게 우리의 약속이었지만 불의 정수는 나와 계약을 맺었다.”
나는 즉시 본론을 말했다.
그러자 지브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정령왕께 고하겠다. 나 혼자선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기다리고 있으마.”
쉬잉!
지브스가 급히 돌아갔다.
“계약자여, 신물에도 손을 댄 것은 아니겠죠?”
“걱정 마라.”
히아신스의 활을 건네자 케르피가 그것을 조심히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물의 정령왕께서도 매우 기뻐할 것이에요. 아, 그리고…….”
보답이라도 하듯 케르피가 내게 작은 돌멩이 몇 개를 건넸다.
“깊은 호수에서 건진 오래된 돌이에요. 이름 붙인 정령들이 곧 깨어날 시기이니 잘 보듬어 주세요. 그녀들과 계약하면 계약자의 성향에 따라 급속한 성장을 이룰 거예요. 정령왕께서 애지중지하던 아이들이랍니다.”
가만히 돌멩이를 받아 들고 유심히 지켜보았다.
확실히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요컨대 이게 정령의 씨앗이란 것이다.
“그럼, 저는 빨리 돌아가 봐야겠어요. 정령왕께서 기다리고 계신지라……. 좋은 소식과 함께 다시 찾아뵙겠어요, 계약자여.”
꾸벅! 고개를 숙인 케르피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금 지브스가 돌아왔다.
지브스는 표정을 잔뜩 굳히곤 말했다.
“이야기가 끝났다. 정령왕께서 계약자를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