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67화
불의 정령왕.
그에 대해 나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어둠의 정령을 제외한 나머지 정령은 마족들의 싸움에 관여하진 않은 까닭이다. 해 봐야 정령계에서 서로 치고받는 게 전부였다.
풍문으로 들은 몇 가지 정보가 있기는 했지만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도니스가 많은 공을 들였다고만 알고 있지.’
불과 빛, 번개의 정령이 가장 저항이 거셌다. 어둠의 정령왕 아도니스가 한계 돌파를 행하고 정령계의 절반을 차지했을 때조차 힘겨운 사투를 이어 나갔다고 들었다.
그중 하나인 불의 정령왕.
이름은…….
‘가랏쉬.’
기억해 내곤 고개를 주억였다.
과연 소문과 실체가 얼마나 같고 다른지는 만나 봐야 알겠지만 나도 조금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령왕께선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신다. 다소 거친 언행일 수 있겠지만 양해해 달라, 계약자여.”
“걱정 마라.”
단순히 언행이 거친 정도라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애당초 나는 상대의 말투 같은 것에 신경을 쓰는 부류의 마족이 아니었다. 공격적인 기세를 품고 있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저 말투 때문에 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었다.
“계약자여, 정령왕께서 있는 장소로 가려거든 ‘불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곳에 온 외부의 존재는 모두 이 3,600개의 계단을 건너게 되어 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그 위에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의 계단이 수없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균열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와 같은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3,600개라는 압도적인 숫자의 계단 모두를 오르는 게 내게 주어진 시련인 것 같았다. 붉게 달아오른 돌이 쉴 새 없이 타올랐다.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져 있는 것 같은데…… 이 위에 불의 정령왕이 있다면 대수롭지 않게 건널 수 있었다. 어차피 이따위 불길은 내게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다.
치이익!
계단 위를 오르자 무언가가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내 지능이 80 정도 선이었다면 조금은 고통스러웠겠다.
그러나 이미 100을 넘긴 지능 수치는 내 항마력 자체를 우월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계단을 오르자 지브스가 놀라 했다.
“중급 이상의 정령들도 쉽사리 오르는 게 힘들거늘. 지고한 불과 계약해서인가?”
“계약이 없어도 이쯤은 쉽다.”
확실히 불의 정수와 계약해서인지 이 불의 계단이 안락한 느낌마저 가져다줬지만 계약이 없어도 이쯤은 간단하게 오를 수 있었다.
“이 계단을 오르는 외부의 존재는 무척이나 오랜만이다. 다른 정령들도 궁금증에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는 게 어떻겠나?”
계단을 오르자 밑에서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길을 알아차렸다.
수많은 불의 정령들이 오로지 내게 집중하는 중이었다.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건만 이래선…… 비밀 유지는 힘들 듯싶었다.
‘엎질러진 물. 차라리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낫겠지.’
맞다. 불과 물의 정령들을 도운 시점에서부터 물은 이미 엎질러진 것과 같았다. 내 의도는 어디까지나 아도니스의 독주를 막고 판을 키우는 것. 이왕지사 불의 정령들과 관계를 트고자 하였으니 이미지 관리를 해도 나쁠 건 없었다.
손을 들고 한차례 흔들어 주자 주변을 오가는 불덩이들이 몸을 마구 떨어 댔다. 지상에서 공중으로 올라와 내 주변을 돌았다.
“정령들도 기뻐하고 있다. 계약자가 가진 불의 친화력은 상상 이상이어서 그들이 더욱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가?”
“내 수준의 격을 갖춘 정령은 안 되겠지만 하위의 정령 몇과 계약을 해 보는 건 어떻겠나? 계약자에 따라서 하위의 정령들은 빠르게 성장하기도 한다.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할 테니 계약자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계단을 절반가량 오르자 지브스가 말했다.
하위의 정령들과 계약이라. 케르피도 내게 아직 정령조차 되지 못한 돌멩이 몇 개를 건넸다. 그들이 정령으로서 태동한다면 내가 길러 주길 바라서다.
‘정령의 육성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지브스의 말대로다. 나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초월자의 영역에 발을 들인고로 하위 정령 몇과 계약한들 지장이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기껏해야 마력 조금 좀먹는 게 전부일 터. 그조차 이번에 들인 ‘정복자의 반지’로 인해 상쇄가 되었다.
마력 회복 효율을 급격하게 증대시키니 정령들이 소모하는 것쯤은 가볍게 웃돌아 버릴 것이었다.
“생각해 보겠다.”
짧게 읊조렸다.
지브스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정령왕께서 직접 언급을 하실 수도 있다. 아예 정령의 씨앗을 달라고 하는 것도 괜찮다. 계약자라면 아주 특이하고 훌륭한 불의 정령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악독한 녀석으로 길러지겠지.”
“하하! 계약자여, 그것은 농담인가?”
진담이다. 나를 닮아 성장하는 정령이 정상적인 성격을 지닐 리 만무했다.
굳이 말하진 않았다.
30여 분을 더 걷자 계단을 전부 오를 수 있었다.
이윽고 보인 광경은 제법 놀라웠다.
불덩이를 머금은 꽃이 수없이 늘어져 있고, 케르베로스 수십 마리가 그 사이를 오가는 중이었다. 바로 지척에 뜬 태양과 그 밑의 거대한 성도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조금 서두르겠다. 태양의 빛이 강한 걸 보니 정령왕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다.”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가?”
“아무래도……. 하여간, 계약자여. 나를 따라와라.”
지브스가 더욱 속도를 높여 앞서 나갔다.
* * *
불의 정령왕 가랏쉬.
그는 태양보다 붉은 머리칼과 텁수룩한 수염을 지닌 건장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붉은 망토를 착용했으며 10개의 반지와 값비싼 목걸이를 착용해 사치스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바라본 관점은 조금 달랐다.
‘착용한 아이템 대부분이 에픽 등급이다.’
심안을 이용해 가랏쉬를 살핀 결과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좋은 아이템을 둘둘 말고 있었다. 마계 옥션을 주관하는 어둠의 정령왕이 더욱 괜찮은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단순한 편견이었을까?
어쩌면 저런 모습 때문에 아도니스가 곤혹을 겪은 건지도 모르겠다.
‘단순 능력치는 내가 본 이 중 최강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저 세계에 돌아온 이후 내가 최강이라 여겼건만…….
아무래도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할 듯싶었다.
이름: 가랏쉬
직업: 불의 정령왕
칭호 :
* 화염의 지배자(Ex Epic, 모든 능력치+4, 불에 대해 완전 면역)
능력치 :
힘 107(+12) 지능 103(+7)
민첩 104(+12) 체력 104(+7) 마력 105(+19)
잠재력(523+57/550)
특이 사항: 불의 정령계를 담당하는 정령왕. 역대 불의 정령왕 중 최강자로서 불의 정령들에게 막대한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스킬: 태양 태엽(Epic), 태양 방패(Epic), 불의 위엄(Epic), 광합성(Epic), 지옥불(Ex Epic), 태양왕의 강림(Ex Epic)
적용 중인 스킬&아이템 효과: 태양 반지(Epic, 마력+5), 지옥불 반지(Epic, 힘민체마+2), 불타는 힘의 반지(Epic, 힘+5), 시르한의 목걸이(Epic, 지능+2 민첩+5), 위엄이 서린 갑주(Epic, 마력+7), 절명의 반지(Ex U, 모든 능력치+1)
[상대 비교]
가랏쉬
힘 119 지 110 민 116 체 111 마 124 잠재력(523+57/550)
랜달프 브뤼시엘
힘 105 지 105 민 100 체 107 마 110 잠재력(434+93/550)
거의 600에 다다르는 능력치 총합!
‘압도’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수치다.
한계 돌파를 행하고 포인트로 격을 올렸대도 과연 아도니스가 가랏쉬를 혼자 상대했을지 의아함이 들었다.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세력을 급속도로 넓힌 뒤 불의 정령계를 친 게 가랏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조급해할 만하군.’
아도니스. 그는 정령왕으로서 그다지 강한 축에 들지는 않았다. 당장 가랏쉬만 봐도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더불어서…… 어둠의 정령들이 수작을 부린대도 그다지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가 설명이 됐다. 마음만 먹으면 어둠의 정령 따위 짓누를 수 있다는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도니스가 어찌 조급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가랏쉬를 보고 모두 이해가 되었다.
‘하늘 위의 하늘이라.’
역대 불의 정령왕 중 가장 강하다지만 나로서도 살짝 의외였다. 설마 지금 같은 시기에 나를 능가하는 존재가 나타나리라고는. 이래서 안주하면 안 된다. 더욱 고삐를 붙잡고 길을 걸어야 했다.
“지고의 불 중 하나와 계약을 했다고?”
뒷짐을 진 채 작게 웃으며 가랏쉬가 먼저 운을 뗐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흐음, 이프리트의 계약자라면 우리와도 무관하진 않다. 환영하마.”
척. 가랏쉬가 손을 내밀었다.
“환영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처음부터 이들과는 호의적인 관계를 지속하자 생각했으니 손 정도는 시원하게 맞잡아 줄 수 있었다.
짧은 악수 끝에 가랏쉬가 말했다.
“짧게 말하겠다. 계약을 해지해라.”
눈썹을 찌푸렸다. 그야 상정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지만 대뜸 물어볼 줄은 몰랐다. 무례하다면 무례하고, 지브스가 말한 대로라면 과연 그랬다.
허나 나는 최대한 고요한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이프리트는 내 심장에 터를 잡았다. 억지로 계약을 해지하겠다면 실력 행사를 할 수밖에.”
강제로 계약을 해지하거든 그 여파가 없을 리 없었다. 특히 심장에 자리를 잡아서 자칫 잘못하다간 그대로 사망할 수도 있었다.
내 말이 끝난 즉시 가랏쉬가 기세를 내뿜었다. 불이 넓은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넘실댔다.
‘굉장한 마력이군.’
나조차 압박을 느낄 수준이다. 이런 경험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회귀한 이후에는 좀처럼 느껴 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전신을 맴돌았다.
하지만 내 지능과 마력 수치도 낮진 않다. 가랏쉬의 기세를 맞받아 칠 정도는 되었다.
오만의 불길을 터트리고 도리어 가랏쉬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어차피 그는 나를 해할 수 없다.’
이곳은 불의 정령계. 그중 심장부에 해당하는 장소다.
나나 가랏쉬쯤 되는 존재가 있는 힘껏 격돌하면 계단을 올라오며 보았던 수많은 정령은 대부분 소멸을 맞이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은인’의 입장이다. 그것을 가랏쉬가 모르진 않을 터.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격을 갖춘 존재는 그만한 위엄을 가지기 마련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가치를 더욱 높인다.
물건을 뺏자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이프리트와 계약을 할 만한 이인지 확인을 해 보겠다는 심보가 아니고선 이런 식으로 강경하게 나올 리가 없었다.
짝!
가랏쉬가 손뼉을 쳤다.
동시에 방 안을 맴돌던 강렬한 기운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는 살짝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대단하군. 어린 마족이 벌써부터 초월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니……. 그러나 완벽하게 초월자가 되지는 못한 듯싶군. 이질감이 매우 강해.”
순수 능력치로 초월자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그 점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오만의 불길을 꺼트렸다.
“시험은 끝났나?”
가랏쉬가 피식 웃었다.
“합격이다. 지고한 불의 계약자로서 충분한 격을 갖췄다. 마족이란 점은 마음에 안 들지만 듣기로 그대는 다른 마족과 다른 노선을 타고 있다지?”
처음과는 전혀 다른 태도. 말문이 제대로 터졌다. 가랏쉬가 인정했다는 의미다.
나는 분노와 황제의 검을 한 차례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왕. 모든 대공을 꺾고 그 자리에 앉는 것이 나의 목표다.”
“마왕이라…… 나는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위를 지향하는 자를 좋아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실패하지만 성공하거든 세계가 움직이는 파장을 낳지. 하여간, 이프리트의 계약자여. 그대는 이제 우리 불의 정령의 친구와 같다. 그에 따라 선물 한 가지를 주고 싶은데…… 따로 원하는 게 있는가?”
시험 이후에는 선물이었다. 어쩐지 당한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기껏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하여,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원하는 것을 입에 담았다.
“불의 정령이 깃든 씨앗들을 대량으로 받고 싶다. 처음은…… 10만 개 정도면 충분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