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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68화 (168/242)

던전 사냥꾼 168화

10만 개!

격이 존재하지 않는 정령의 씨앗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무리한 숫자다. 요정과 정령은 아주 오랜 기간 잉태되어 태어나는 존재. 선뜻 10만이란 숫자를 내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적은 숫자로는 의미가 없었다. 최하급 정령들과 계약을 한들 내게 크게 도움이 되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네들만이 가능한 일도 거의 없었으니 사실상 있으나 없으나 같다는 소리다.

하지만…….

‘내가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는 이들. 던전의 방파제 역할을 할 한국의 인간들…….’

로이와 로제는 이미 한국 인간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거기에 기린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지하는 수준이었고, 실상 내가 뒤에서 한마디만 한다면 그들을 움직이는 일은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한국의 각성자들이 정령을 품고 계약을 함으로 인해 나의 던전은 더욱 안전해질 것이다. 다시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들이 톡톡히 방파제 역할을 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정령의 계약은 엄격한 기준을 두고 선별해야 함이었다. 힘을 간절히 갈구하는 자들로 말이다. 그들의 절박함이 하늘에 닿을수록 나를 따르게 되어 있었다.

더불어서…… 그와 관련된 업적을 노려볼 수도 있겠다.

기타 등등의 이유로 나는 가랏쉬에게 씨앗을 요구했다.

한 말이 있으니 아예 거절하진 못할 것이고, 얼마나 많은 수량을 허락할 지가 관건이다. 그의 배포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유심히 그를 지켜보자 가랏쉬는 턱을 쓸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로군. 10만 개의 씨앗을 가져가도 그것들이 장성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터인데?”

가랏쉬의 지적도 옳지만 던전 안이라면 정령들도 빠르게 깨어날 것이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했다.

“그건 내가 고민할 문제다.”

가랏쉬가 작게 미소 지었다.

“좋다. 허나 너도 하나를 내놔야 할 것이다.”

의외로 시원스럽게 허락이었다. 그 정도는 별반 걸릴 것도 없다는 듯.

“원하는 게 있나?”

“내가 원하는 건 정보다. 어둠의 정령들, 아니…… 아도니스. 그 검은 개구리가 꾸미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

검은 개구리라. 가랏쉬가 보는 아도니스의 이미지라는 게 딱 그 수준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같은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격의 차이가 나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진정 몰라서 묻는 건가?’

허나 그와 별개로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둠의 정령왕 아도니스가 경매를 열고 불과 물의 정령들을 공격한 저의를, 가랏쉬는 정녕 모르고 있어서 내게 묻는 것일까?

“정령계의 지배다.”

직구부터 날려 보았다. 가랏쉬는 흠! 하고 침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일차적인 목표다. 궁극이라 칭할 순 없다. 나는 놈에게 그 ‘시스템’이란 걸 보여 주길 바랐지만 극구 숨기더군. 격을 올리고, 내리고, 균열을 열고…… 시스템이라 불리는 그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내가 묻고자 하는 건 그 시스템을 이용해 아도니스가 궁극적으로 행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아아.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내가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을 소환했을 때 봉인된 지저 세계가 흔들렸고, 그곳을 어둠의 정령들이 탐사하던 도중 불과 물의 정령들에게 걸린 일로 시스템에 대한 걸 요구했다고 하던가…….

불의 정령왕 가랏쉬는 시스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는 듯싶었다.

‘어둠의 정령들, 특히 아도니스가 시스템을 이용해 행하려는 것.’

나도 이건 생각해 본 바가 없었다. 시스템은 이 게임에 참여한 모두에게 적용되고, 굳이 누가 소유했다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도 이 시스템을 이용해 아도니스가 무언가를 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따져 보자면 애당초 아도니스가 정령계 전체를 지배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령계는 넓다. 정령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들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정령왕이라 칭해지는 존재도, 당장 밝혀진 것만 스물을 넘는다.

반면 아도니스는 혼자다. 아무리 시스템을 이용해 한계 돌파를 행했대도 혼자서 정령계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을까? 마계 옥션과 포인트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어불성설이다.

마족과 달리 정령들은 극상성만 아니라면 적아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 ‘계약’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것처럼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정령이 더욱 많다.

하면…… 시스템을 이용해 그들이 뭉치지 못하도록 한 걸까? 아도니스가 다른 정령과 연합을 했다는 이야기 역시 들어 본 적 없으니 실로 이상한 일이긴 하였다.

‘어둠의 정령들은 항상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고자 노력해 왔지.’

특히 균열과 관련된 것들.

억지로 열고 내게 연락을 취해 온 것만 봐도 허점을 잘 이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균열을 마음대로 열고 닫는 게 가능하다면?

각 정령을 따로 떨어트려 놓는 것이 가능해진다.

연합이 불가능해지니 각개격파 하는 것이다.

대균열을 연다면 세계의 구멍을 열고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전생에서 아도니스가 정령계를 지배한 시기는, 아리엘 디아블로가 마왕으로 낙점된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나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정령계를 일통한 아도니스와 마왕 아리엘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

억측인가?

아예 똑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됐을 것 같긴 하였다.

그제야 나는 아도니스가 내게 보인 행동들이 더욱 입체적으로 와닿았다.

정령계의 지배가 그저 1차 목표일 뿐이라면.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될 셈인가 보군.”

신!

바로 그랬다.

신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전 차원을 일통한다면 최상급 신위를 가져도 이상할 게 없을 업적이다. 사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에서 신이 되는 것도 가능하리라.

아도니스, 어지간한 탐욕은 상대도 안 되는 강렬한 욕망을 지닌 놈이었다.

“너도 그리 보느냐?”

가랏쉬가 눈을 번뜩였다.

그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시스템에 대해, 너희가 하는 그 게임이라는 것에 무지하다. 그래서 아도니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일까 예상만 했었지.”

예상은 확신이 되었다.

도리어 그게 퍽이나 재미있다는 듯 가랏쉬의 미소가 진해졌다.

“말했다시피 나는 가장 아래에서 가장 위를 바라보는 자를 좋아한다. 그런 자가 나와 마주하며 전력을 뽐낸다면 무척이나 짜릿할 테지. 아직은 덜 익었고…… 녀석이 알을 깨길 기다려야겠군.”

한마디로 한계 돌파까지 기다려 준다는 뜻이다.

살짝 이해가 안 되는 사고방식이었다.

‘이놈도 정상은 아니군.’

자신을 위협할 적이 될 게 확실한데 방치한다?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 사고방식이었다.

적이 될 것 같으면 싹을 쳐 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일부러 키워서 무성하게 만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잠시의 침묵. 그 끝에 가랏쉬가 말했다.

“랜달프 브뤼시엘, 지브스를 통해 씨앗을 보내겠다. 제법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프리트에겐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아홉 번째 불은 현재 불길을 더욱 강하게 일으키고자 ‘의식’에 들어갔다. 앞으로 3년간은 잠들어 있을 터.”

“지고한 불의 정수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게 아니었던가?”

“아홉 번째 불은 가장 나중에 발현되었다. 하여간…… 나머지는 이프리트에게 물으면 답해 줄 것이다.”

이프리트는 나락 군주의 심장으로 인해 갇혀 있는 상태다. 억지로 꺼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나도 꺼내는 게 주저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10만 개의 씨앗, 기대하고 있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등을 돌렸다. 그러자 가랏쉬가 등 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 마족이여. 너의 행보를 지켜보겠다.”

던전으로 돌아온 직후 나는 잠시 사색에 빠졌다.

‘느낌이 좋지 않군.’

가랏쉬. 그는 강하다. 현재의 나보다도, 전생에서 전성기를 자랑하던 대공들만큼이나. 그러나 아도니스와 같은 치열함은 없었다.

결국 저런 여유가 그를 좀먹을 가능성이 다분하였다.

‘아도니스, 근원의 정수로 말미암아 지금쯤이면 한계 돌파를 행했을 것이다.’

한계 돌파를 행하고 잠재력을 채우는 건 시간이 필요하다. 한데 가랏쉬의 태도로 보아하니 그 시간은 충분히 주어질 것 같았다. 아도니스가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면 과연 그가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마왕이 되는 게 전부라고 여겼건만.’

확실히 안이한 감은 있었다. 마왕이 되고 그 좌에서 크게 웃어 보는 것. 그게 내 꿈이었고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왕이 된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장을 살아가는 것조차 벅찰진대 아주 먼 미래의 일까지 대비할 여력은 없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여유가 생겼고, 확신이 있는 만큼 대비를 해야 했다.

아도니스는 잠재적 적이 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이미 불과 물의 정령과 접촉함으로써 어느 정도 등을 돌린 상태이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눈을 빛냈다.

분노와 황제의 검을 꺼내 들었다.

‘내 자신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강해지는 것.’

가랏쉬와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현재 마족 중에선 내가 제일 강할지 모르나 적은 온전히 마족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쿨루스의 때처럼 무언가가 추가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 더 이상 적수가 없을 때까지 강해질 수밖에.

그렇게만 된다면 아도니스가 정령계를 집어삼키고 나를 노려도 두려울 게 없었다.

* * *

가랏쉬의 행동력은 인정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고작 3일 만에 10만 개에 달하는 씨앗을 지브스를 통해 보내온 것이다.

주로 그을린 나뭇가지나 반쯤 탄 나뭇잎 등이었지만 그 속에서 아주 미약한 생명력 같은 게 느껴졌다.

“계약자여, 이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제대로 성장시켜 우리에게 돌려보낸다면 정령왕께선 계약자에게 막대한 보상을 지불할 것이다.”

지브스의 말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만큼 이 씨앗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꼭 돌려보내야 하는 건가?”

“기본은 계약자의 의사에 따른다. 그러나…… 잘 생각하고 결정하라. 우리에겐 보물이 많다. 정령왕께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전설적인 물건도 있지.”

가랏쉬가 착용한 아이템은 모두 범상치 않았다.

그런데…… 전설급의 무언가가 있다니 이건 좀 의외였다.

‘구미가 당기는군.’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 얼마나 대단한 효력을 발휘하는지 아는 나로선 끌릴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알겠다.”

“그럼 씨앗을 전했으니 나는 돌아가 보겠다. 조금 쉬고 싶군.”

3일 만에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지쳤을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브스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마스터, 이게 다 뭐예요?”

그를 기다렸다는 듯 이히가 등장했다.

나는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의 씨앗이다.”

“앗! 그러고 보니 불의 마력이 느껴져요. 우와! 이렇게 많은 정령의 씨앗은 이히도 처음 봐요.”

이히가 빙글빙글 돌며 씨앗들 사이를 오갔다.

잠시 후 돌아온 이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사뿐히 내 어깨 위에 앉았다.

“이히히, 마스터. 이거 전부 던전에 둘 건가요?”

“일단 발현은 하도록 만들 셈이다.”

“그럼요~ 이히가 몇 개 가져가도 될까요?”

이히가 자처하여 나서는 게 불안하긴 했으나 몇 개라면 그다지 티도 나지 않는 숫자다.

“세 개만 가져가도록.”

그래도 혹시 몰라 숫자를 제한했다.

“이히히히! 그럼요~ 씨앗은 이히가 골라도 되나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이히히히히!”

이히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던전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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