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69화
* * *
정령의 씨앗은 받았지만 탄생에 관해서 나는 문외한이었다. 가만히 두어도 깨어나긴 하겠으나 환경의 조성과 같은 부분에 약했다.
즉시 크리슬리를 불렀다. 그나마 정령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그녀밖에 없는 탓이다. 이히도 대충 알고 있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차라리 크리슬리에게 정성스러운 답변을 듣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불의 정령이군요. 이만한 숫자의 씨앗은 처음 봅니다.”
크리슬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히와 비슷한 반응. 허나 금세 진정한 크리슬리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이것을 전부 탄생시킬 셈이십니까?”
“그렇다. 문제라도 있나?”
“이만한 숫자의 정령이 동시다발적으로 한 장소에서 발현되면…… 주변의 마력이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던전의 마력은 충분하다.”
던전의 등급이 오르고 근원의 나무가 존재한다. 어지간한 마력의 소비는 티도 안 날 수준이었다.
하지만 크리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체적인 마력의 양은 그럴지 모르나 불의 마력이 크게 증발할 테지요. 균형이 어그러지면 던전의 유지에도 많은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과연…… 그런 관점이라면 납득이 되었다.
던전을 이루는 마력은 수많은 종류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거의 모든 속성의 마력을 품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중 하나만 매우 부족해진다면 단번에 균형이 어그러지며 마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여 직설적으로 물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크리슬리다. 그녀의 머리나 임기응변의 능력은 제법 믿을 만했고, 도움을 받은 적도 많았다. 이제 와서 거리낄 건 하나도 없었다.
이미 답변도 정해 놨다는 듯 크리슬리가 거침없이 답했다.
“불의 정령이니 마스터께서 옆에 계십시오. 본래 마스터께서 가지고 계신 ‘오만의 불’과 지고한 불…… 둘 다 상당히 순수한 불의 마력을 지녔습니다. 정령들이 탄생할 때마다 약간의 탈수증과 같은 증세가 오겠으나……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결국 내가 답이란 소리였다.
하기야 지고한 불의 정수를 흡수 비슷하게 한 나다. 정령계에서조차 아홉 개밖에 없는 불 중의 하나를 말이다. 거기다가 오만의 불도 있었으니 사실상 불의 마력을 대체하기엔 더없이 적절한 대상이었다.
“옆에 있으라니, 하루 종일 말인가?”
“예, 씨앗들이 익숙해지며 반응하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립니다. 마스터께서 곁에 계신다면 정령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테고요.”
크리슬리는 단호했다. 적당히 쉬어도 된다고 말해 봤자 내가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못을 박아 버리는 쪽이 더 낫다는 것도.
적어도 전생에선 없었던 일.
나를 잘 아는 이도 없었고, 당연히 내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보는지 아는 이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히가 있기는 하였으나…… 지금의 성격과 전생의 성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데 크리슬리라는 걸출한 다크 엘프가 생기며 일을 처리하는 게 간편해졌다.
“언제 탄생할지는 알 수 있나?”
그러나 나도 바쁘다. 마냥 정령의 씨앗을 돌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 걸 잘할 자신도 없었고……. 나는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지금 이 일은 내가 ‘못’ 하는 부류에 속해 있었다.
“던전임을 감안하고 씨앗의 성숙도를 봤을 때…… 늦어도 한 달 안팎이 아닐는지요.”
“한 달간은 꿈쩍 못한다는 말이로군.”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나머지 일 처리는 모두 저에게 맡기십시오. 로이와 로제, 막시움에 관한 일이라면 제가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크리슬리가 푸근하게 웃었다.
나는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지금 지구의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판도가 바뀌고 있다.
던전 안에서 한 달간 머무르는 게 현명한 판단일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지친 적을 잡아먹는다는 발상도 가능은 하겠지.’
그것도 전략 중 하나가 되긴 할 것이다. 게다가 크리슬리의 일 처리라면 믿을 수 있었다.
‘정령의 가치도 그에 못지않다.’
무려 10만의 정령.
이것들을 탄생시키고 육성하며 얻어 낼 이득을 생각하면 한 달쯤은 가만히 있어도 된다. 그사이 나 스스로의 발전을 꾀하면 하지 못할 건 없었다.
“크리슬리, 너에게 맡기겠다. 한 치의 빈틈없이 관리하도록. 막시움은 내가 귀띔한 게 있으니 알아서 잘하겠으나 로이와 로제 쪽은 변수가 많다.”
특히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게 로이와 로제였다. 로제가 똑 부러진다고 할지라도 둘 다 지극히 어린 다크 엘프. 임기응변으로 변수를 헤쳐 나갈 지식은 없었다.
지금 한국은 급격하게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서울을 회복하며 수많은 인간이 다시금 모이는 중이었다. 코어를 이용한 기술로 대개의 것들을 대체하며 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로이와 로제가 있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간들을 끌고 가는 게 가능하다. 로이에게 마검을 준 것도 그와 같은 이유다.
간간이 일이 생길 때마다 수정구를 통해 내가 지시했으나, 정령들의 씨앗이 어찌 변형될지 모르는 이상 그런 시간조차 생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마스터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겁니다.”
“믿는다.”
이 한마디면 족했다.
이후 크리슬리가 짧게 읍을 하곤 물러났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씨앗들에 시선을 줬다.
‘그럼…….’
정령의 탄생은 빠를수록 좋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
불의 마력을 발산하며 씨앗들을 감싸는 일.
이런 일은 처음이라 반신반의였지만 본래 모든 일의 처음은 다 그런 법이었다.
나는 씨앗이 널려 있는 중심지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지고한 불의 정수가 가진 마력과 오만의 불을 발산시키며 씨앗들을 천천히 덮어 갔다.
* * *
[사용자 ‘랜달프 브뤼시엘’이 가진 불의 마력이 층 전체에 도포됩니다.]
[정령의 씨앗이 반응합니다. 천천히 자아가 각성 중입니다. 각성률 18.5%]
[불의 마력이 너무 강합니다! 358개의 정령이 탄생하지 못한 채 소멸되었습니다.]
[불의 마력이 너무 약합니다! 각성률이 떨어집니다.]
[불의 마력이 적당합니다. 각성률이 크게 오릅니다. 각성률 19.9…….]
마력을 발산하며 유지시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덜하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게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는데, 중간을 벗어나는 순간 어김없이 문제가 생겼다. 특히 정령들이 소멸했다는 메시지를 읽었을 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을 정도다.
‘힘들군.’
차라리 검을 들고 미친 듯이 휘두르는 편이 내 적성엔 맞았다. 가만히 앉아서 마력만 조종하고 있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각성이 느려.’
게다가 걸리는 점은 또 있었다. 크리슬리는 한 달을 보았지만 2주일이 지난 현시점에서 각성률은 고작 20% 안팎이었다.
이 속도로는 한 달이 아니라 두 달이 걸려도 힘들다. %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각성률이 느는 폭도 줄고 있었다.
14일이 지나자 집중력도 살짝 흐트러졌다. 마력의 조종이라는 게 새삼 힘들게 느껴졌다.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섰으나 반쪽짜리다. 지금 나는 힘만 센 아이와 다를 바 없다. 효율적으로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에 약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단계를 밟아서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능력치 하나를 100까지 끌어 올린 적도 없는데, 모든 능력치가 그와 같다. 전생과 전혀 다른 이 느낌을 제어할 방법에 대하여 나는 무지했다.
‘본래 마력의 조종이라는 건 싸우다 보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싸움만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내게 부족한 것을 인지하고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계 돌파를 행했을 때도 ‘깨달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싸움만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깨달음이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내 마력은 너무 거칠다. 야생마와 같다. 달릴 줄 밖에 모르지.’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 고민하다 보니 이 결론에 봉착했다.
정령의 씨앗을 보듬는 데 내가 가진 마력의 성질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
거칠기 그지없으니 각성률도 낮게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씨앗은 알과 같다. 따듯하게 보듬어 주고 감싸 줘야 부화를 한다.
‘따듯한 마력이라…….’
단순히 양의 성질을 띠는 그런 마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품고자 하는 성질. 하지만 역시 나와는 맞지 않는다.
‘맞지 않다고 시작부터 포기할 순 없다.’
맞지 않다면 억지로라도 맞추는 게 필요하다. 포기하면 발전은 없다. 부딪치고 깨져도 도전하는 게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물론 힘들고 어색한 점은 분명히 있지만 하다 보면 요령이 늘 것이다.
여태껏 내가 보고 느낀, 가장 따듯한 마력을 지녔다고 생각한 이를 떠올렸다.
‘대지의 수호자 아시스.’
인간이다. 미국에서 불현듯 나타난 각성자. 그녀는 대지를 움직일 줄 알았다. 언뜻 보면 오쿨루스와 비슷했으나 근본적인 성질 자체가 달랐다.
그녀는 싸움을 극도로 싫어했다. 식물이건 인간이건…… 심지어 마족이건, 누군가가 다치는 걸 볼 때마다 몸을 떨어 댔다. 억지로 감투를 쓰고 싸우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느낀 마력 중에선 그녀가 가장 따듯했다.
그녀는 아낄 줄 알았고, 사랑할 줄 알았으며 보듬어 줄 줄 알았다. 그 성향이 워낙 극심해서 결국 마족도 아닌 일개 뱀파이어에게 농락당한 채 죽고 말지만 살아생전 세운 업적도 나름 대단했다.
아시스에겐 있고 내겐 없는 것.
그게 무엇일까.
‘마음의 유무인가.’
내가 누군가를 보듬고 다듬으며 사랑한다?
발상부터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떠올리자 닭살이 돋았다. 솔직히 상상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시스와 같은 포근함을 나는 정령들에게 베풀 수 없다. 그건 도전 이전에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일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식대로 변형을 가하고자 하였다.
‘일어나라. 내가 너희를 이끌어 주마.’
냉소를 짓고 씨앗들을 바라본다. 다른 건 몰라도 길을 잃지 않게는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저들이 방황할 때 하나의 지표가 되어 주며 나를 따를 수 있도록.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뾰롱.
뾰로롱.
마치 바람이라도 부는 양 씨앗들이 작게 흔들거렸다.
[불의 마력이 따듯해졌습니다. 각성률이 크게 오릅니다. 각성률 32.7%]
[사용자 ‘랜달프 브뤼시엘’이 가진 마력의 효율이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1 오릅니다.]
단순한 발상의 전환.
그런데 10%가량이 상승했다.
‘이 방향이 맞나 보군.’
더불어서 내 마력도 1이 상승했다.
놀라운 일이다. 90을 넘긴 마력은 어지간해선 상승하지 않을진대, 이로써 내 순수 마력은 95에 도달했다.
나는 조금 더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방향이 맞다면 따로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확히 3주가 지난 시점에서 정령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뾰롱. 뾰로롱.
이제 막 깨어난 불의 정령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작은 불덩이와 같은 형태로 씨앗에서 솟아 나와 내 주변을 맴돌았다.
[대단한 업적! 마족 중 최초로 정령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300,000PT를 얻었습니다.]
[업적 점수 900점이 추가됩니다.]
메시지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하나둘 깨어나는 정령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태어난 정령들은 마치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내게로 몰려들었다. 내 주변을 맴돌며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열 번째, 백 번째, 천 번째…… 모든 정령들이 한결 같았다.
마지막 씨앗이 깨어나는 데까지 3일이 더 걸렸고, 나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정령이 깨어나며 내 주변으로 날아들자 또 다른 업적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100,000개의 씨앗 중 99,318개의 정령을 탄생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믿기지 않는 업적! 1,986,360PT를 얻었습니다.]
[업적 점수 1,800점이 추가됩니다.]
[‘정령과의 교감’ 스킬이 추가되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상태창에서 확인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