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70화
정령과의 교감이란 이름의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 나는 즉시 상태창을 열어 스킬란을 확인하곤 고개를 주억였다.
정령과의 교감(Epic, Passive)- 교감이란 서로가 반응하는 것이다. 수많은 정령을 탄생시킨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전.
* 정령이 진화 시 ‘격’에 따라 보상 지급.
최하급 → 하급: 500PT
하급 → 중급: 5,000PT
중급 → 상급: 500,000PT, 업적 점수 500점
상급 → 최상급: 잔여 능력치+1
* 최상급 → 정령왕: 스킬이 ‘정령왕과의 교감(Legend)’으로 변화
당장 내게 이로운 스킬은 아니나 기대치가 매우 높았다. 굳이 내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 일단 격만 올리면 내게로 혜택이 돌아온다는 점을 따져 봤을 때 이 스킬은 에픽 등급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물론 격의 변화, 진화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빠르게 그것을 가능토록 만든다면…… 대략 10만에 다다르는 이 정령들은 나의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이었다.
‘나 혼자서는 확실히 한계가 있겠군.’
이제 막 태어난 정령들 10만. 계약하는 것 자체는 내게 아주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계약을 하게 되는 순간부터 정령들은 내 마력을 좀먹게 되지만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서고 나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정령들은 수많은 계약자를 거쳐야 더욱 빠른 성장이 가능하지.’
바로 그 것이다.
수많은 종류의 마력과 경험을 말미암아 진화를 하는 게 정령이다. 나 혼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보다 높은 격에 이르게 하려거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나는 턱을 쓸었다.
‘정령의 계약, 그와 관련된 정보는 모든 종족에 할 것 없이 널리 퍼져 있다. 허나…… 지구의 인간들은 이 점에 대해서 무지하다.’
어느 누가 계약은 평등하다고 하였는가?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게 계약이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누군가와 계약을 시켜야 한다면 그 내용은 내가 따로 정할 수 있었다. 아는 이라면 말도 안 된다며 거부할 조항을, 무지하고 절박한 이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요컨대…… 이중 계약을 하면 되겠군.’
팔짱을 끼곤 차갑게 미소 지었다. 내용이야 내가 ‘주’가 되고 다음 계약자가 ‘부’가 되는 그런 계약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정령들이 성장했을 때 온전히 내가 써먹는 게 가능해진다. 내가 사용할 카드가 몇 개 더 생겨나는 셈이다.
정령의 계약을 건드는 건 정령계에선 금기에 해당하지만 가랏쉬는 씨앗을 맡겼고, 생사여탈을 쥐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정령계가 아닌 나의 던전이다. 내가 주인인 이곳에서 정령들이 태어났으니 나의 마수로 분류해야 옳았다.
정령들을 정령왕 가랏쉬에게 돌려주는 건 순전히 나의 호의일 따름이다. 그에겐 강제로 회수할 권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걱정이 사라졌다.
뾰롱. 뾰로롱.
누그러진 분위기에 따라서 정령들도 둥실둥실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육아와 비슷한 일인지라 그 부분에선 약간의 우려가 생겼으나…….
‘어느 정령이 먼저 격의 변화를 겪을지 맞춰 보는 것도 재밌겠어.’
한쪽 구석으로 밀어 버렸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10만에 이르는 정령들이 함께 이동했다. 그 광경은 마치 거대한 불의 해일이 밀려드는 것과 같았다. 나를 본 마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눈이 휘둥그레져선 자지러지기 일쑤였다.
“이건 조금 골치가 아프군.”
3일 차. 저도 모르게 쓴 소리가 나왔다.
설마 이 정도로 밀착하여 나란히 이동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수 초 떨어져 있는 걸 마다한다. 억지로 떨어지면 불안함에 소멸해 버렸다. 아직은 정신적으로도 연약하기 그지없는지라 조금이라도 내가 보이지 않으면 그대로 존재 의의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이대로 던전 바깥을 나갈 수도 없고…….’
슬쩍 눈길을 돌려 정령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며 가장 먼저 내 시야에 닿으려고 안간 애를 써 댔다.
주인 된 자로선 기뻐 마땅한 일이지만 이게 하루 종일 반복되면 과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히히. 불일, 불이, 불삼! 좌로 정렬, 우로 정렬. 어허, 반응이 느리다. 다시 한번 좌로 정렬, 우로 정렬!”
작게 한숨을 내쉬며 최상층에 오르자 던전 코어 주변에 위치한 이히를 발견했다.
이히는 한참 자신에게 배정된 세 정령들을 대상으로 훈련을 시키는 중이었다.
“일이하고 삼이! 이히가 보니까 너희 농땡이 부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우리 불이가 얼마나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지 정말 안 보여? 다시 한번 좌…… 아니, 우로, 아니 좌, 아니 우로 정렬! 이히히히히!”
작은 불덩이 세 개가 이히의 구호에 맞춰서 바쁘게 움직였다.
거의 혹사 수준에 해당하는 노역이었지만 이히는 그저 기뻐 죽겠다는 듯이 웃을 따름이다.
‘용케 탄생을 시켰군.’
반쯤은 이해가 안 됐지만 이히는 악하기 보단 천진난만 한 것이다. 악에 대한 정의가 얇고 그냥 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그것도 일종의 따듯함이라면 따듯함일 것이었다.
“아이구, 재밌다, 이히히. 3형제는 그대로 이히를 따라와. 자, 엄청 빠르게 날아간다. 시작!”
슈우우웅-
나는 안중에도 안 보인다는 양 이히가 빠르게 허공을 날았다. 그 뒤를 따라 작은 불덩이 세 개가 나란히 따랐다. 아직 허공을 나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 불의 정령들이 이히의 무자비한 비행에 제대로 따라붙지 못하고 있었다.
툭!
뒤따라오는 정령들을 바라보며 비행하던 이히가 내 가슴팍에 부딪혔다.
“아야!”
이히가 이마를 문지르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우씨, 뭐야?”
“너야말로 뭘 하고 있는 거냐.”
“어…… 마스터!”
이히는 한참이나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상황이 정리된 이히가 재빨리 이제 막 따라붙은 불덩이들을 가리켰다.
“훈련 중이었사와요!”
“훈련?”
“어렸을 때 확실하게 기선을 잡아 놔야 이히한테 안 대들죠~”
훈련을 시키는 게 그런 의미였나.
애당초 이히에게 깊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게 무리이긴 하지만…… 고개를 돌려 이히의 정령들을 바라봤다.
‘성장이 굉장히 빠르군.’
벌써부터 빠르게 비행을 할 수 있다니. 저 셋과 비교하면 내 정령들은 완전 기어 다니는 수준이다. 이히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을 시켰는데 예상외였다.
“이히, 정령들의 성장에 관해 아는 게 있나?”
“이히도 잘 몰라요. 음…… 아! 근원의 나무가 정령들을 되게 좋아해요. 막 이히한테 자기가 있는 쪽으로 놀러 오라고 가지를 마구 움직여 대요.”
“근원의 나무라.”
나는 근원의 나무와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근원의 요정으로 승격한 이히는 어느 정도 그게 가능하다.
근원의 나무가 정령의 성장에 영향을 끼친다면 한 번 고려해 볼 법한 사항이었다.
“마스터, 혹시 이히에게 훈련을 맡겨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이히가 아주 자알~ 훈련시킬 수 있사와요.”
“필요 없다.”
즉답이었다. 이히에게 맡겨도 그닥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히잉…….”
“크리슬리에게 안부를 전하도록. 사건의 진척이 있다면 바로 내게 보고하라.”
한국의 서울에서 대립각이 세워졌다. 수많은 인간이 서울로 유입되다 보니 로이와 로제를 따르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로 나뉜 것이다. 그 해결을 온전히 둘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크리슬리가 출동한 상황이었다.
“넵. 마스터.”
이히의 대답을 듣곤 발을 옮겼다.
근원의 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다시 한번! 좌로 정렬, 우로 정렬! 한 바퀴 굴러! 아이구 잘한다. 이히히히히히히!”
이히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재차 던전 안을 울렸다.
물론 악의는 없지만 세 정령들에겐 재난과 같았다.
근원의 나무 근처에 자리를 잡자 정령들이 조금 더 활발히 움직였다.
근원의 나무도 가지와 뿌리를 들썩이며 정령들을 받아들였다.
‘상성이 좋나 보군.’
알아서 잘 놀았다.
내 근처에서만 서식하려던 녀석들이 지금은 근원의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선 재롱을 피우는 중이었다.
‘잘하면 더 떨어져도 되겠어.’
정령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자리에서 벗어나 봤다. 혹시 몰라 멀리는 못 갔지만 평소보다 열 발자국 정도는 더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정령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나를 찾기 시작했다.
[열일곱 정령이 불안함에 몸을 떱니다. 주의하십시오. 아직 자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정령의 경우 불안함에 소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 되는군.’
혀를 차며 근원의 나무 근처로 돌아오자 난리가 났다.
우르르르!
10만 대군이 단번에 몰려들었다.
아기 주먹만 한 작은 불덩이도 10만 개가 일제히 움직이면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나 내게는 씁쓸한 광경일 뿐이었다.
‘아직 계약도 안 했건만…….’
탄생한 직후 본 게 나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 영향으로 태어나서 그리된 걸까.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어쩔 수 없지.’
이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다. 일단 어느 정도 자아를 갖추고 계약을 하면 조금은 편해질 것이다. 지금은 계약을 하기엔 정령들의 상태가 너무 불안정했다.
멀뚱히 서서 근원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정령들과 근원의 나무가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이름을.
-이름을 지어 주세요.
4일이 더 지난 시점. 정령들이 탄생하고 정확히 일주일이 된 그때 머릿속을 관통하는 두 개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있었다.
‘앞으로 나타나라.’
회답을 주자 아이 얼굴만큼 자란 불덩이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정령들보다 두 배는 커다란 크기. 확실히 비교가 되었다.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름이 가지고 싶어요.
두 불덩이는 허공을 빙글빙글 날았다. 재촉하는 듯한 태도지만 절실한 감정도 함께 느껴졌다.
‘이름은 본래 윗대의 정령이 지어 주는 게 아니었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령이 씨앗이 되는 과정 중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있었다. 상위의 정령이 이름을 지어 주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희한하군.’
하여간 지어 달라니 지어 주긴 해야 했다.
“레이, 세라로 하지.”
무난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입에 담자 두 정령이 방방 뛰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어요. 레이!
―내 이름은 앞으로 세라예요.
화아악!
잠시 후 두 불덩이가 강렬한 빛을 뿜었다.
[정령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최하급 정령 ‘레이’, ‘세라’의 격이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최초로 사용자에게 이름을 허락받은 정령들입니다. 다른 정령보다 성장의 폭이 넓어집니다.]
[계약을 하게 된다면 앞으로 ‘레이’, ‘세라’는 사용자를 보다 진심으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1,000PT가 주어졌습니다.]
짧은 메시지를 뒤로하고 나는 두 정령의 변화를 주목했다.
잠시 후…… 두 정령은 모습이 바뀐 채로 나를 맞이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 크기는 이히와 비슷할 정도로 훨씬 작지만 ‘자아’를 확실하게 갖추었다.
“레이, 세라. 계약을 하자.”
뜸이 들었으니 남은 것은 계약밖에 없었다.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건네자 둘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좋아요.
―세라도 할래요.
“계약의 조건은 내가 정하겠다.”
정령이라면 계약에 대해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걷고 뛰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 누군가가 계약을 건드는 걸 못마땅해야 정상이다.
여기선 나도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정령은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단어를 들어서다.
아버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