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71화
정령은 딱히 부모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그나마 있다면 윗대의 정령이지만 그들도 그저 이름을 지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정령과 사실 들어맞지 않는다.
짚이는 이유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프리트다. ‘지배’를 담당하는 지고의 불. 그 마력을 집어삼키고 스킬을 얻게 된 나이니 조금 다른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애써 표정을 원상태로 복구하며 담담하게 행동했다. 예상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정령들이 나를 진심으로 따른다면 내 전력이 크게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계약의 내용도 입맛에 맞게 조정할 수 있으니 일석 몇 조의 효과와 같았다.
“너희는 보다 많은 계약으로 경험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너희가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는 길을 밝혀 줄 이가 필요하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요.
―아직 많이 부족해요. 가르쳐 주세요.
레이와 세라. 두 정령은 꺄르르 웃어 대며 살랑살랑 따듯한 불을 내뿜었다.
“나는 너희의 길을 밝혀 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계약으론 한계가 있다. 내용의 수정이란 바로 그 점을 뜯어고치겠다는 말이다.”
혹시 몰라서 재차 확인했다. 직접적인 계약과 관련된 사항은 몇 번을 확인해도 부족하다. 특히 일방적인 수정이니 어르고 달래야 함이다.
어르고 달래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아버지의 말씀이 옳아요!
―세라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다지 필요 없는 작업이었던 듯싶다.
‘흠.’
그저 호칭만이 아니라 무한한 믿음이 그 근저에 같이 깔려 있었다. 나로선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맹목적인 믿음이다. 그저 태어났을 때 먼저 본 존재라고 하여 믿을 수 있다니. ‘지배’의 영향이 이토록 큰 것일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이런 내용이다.”
이후 제법 길게 수정의 내용을 늘어놨다.
이중 계약. 내가 ‘주’가 되고, 다른 이들은 ‘부’가 되는, 일반적인 경우라면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을 입에 담았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가서 욕심을 부렸다.
내 명령은 절대적으로 우선하며 심하면 다른 이와의 계약 해지까지 귀결된다는 이야기를.
―아버지, 이제 된 건가요?
―그럼 세라와 계약을 해요.
정령은 근본적으로 계약에 얽매이게 된다. 나는 지금 그들의 근본, 본능을 건드린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럼이 없다. 그저 계약만 하면 좋다는 듯이 행동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정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와 세라가 즉시 계약의 인장을 꺼냈다.
정령의 전신에 불로 이루어진 작은 글자가 떠올랐다. 기본적인 계약 사항과 내가 수정한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랜달프 브뤼시엘! 나의 아버지. 레이와 계약을 해 주시겠어요?
―아빠, 세라와도 해 줄래요?
“……좋다.”
익숙하지 않은 분위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히 때와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르다.
크리슬리와 함께할 때 아주 간혹 느껴 본, 하지만 정작 그 실체를 몰랐던…… 그런 것들이 지금 두 정령에게서 마구 뿜어지고 있었다.
내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전신의 글자가 타올랐다. 그러자 근원의 나무는 가지를 움직여 두 정령을 감쌌다.
[하급 정령 ‘레이’, ‘세라’가 사용자 ‘랜달프 브뤼시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근원의 나무가 두 정령을 축복합니다. 그 여파로 근원의 정수가 소모되었습니다.]
[하급 정령 ‘레이’와 ‘세라’가 중급 정령으로 진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근원의 정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둘은 보다 높은 ‘격’을 획득할 기회와 마주했습니다.]
[정령은 계약자와 교감하며 성장을 이룹니다. 반대로 교감이 약하다면 기회를 얻었더라도 성장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10,000PT를 획득합니다.]
가지 속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레이와 세라는 크기가 1.5배쯤 커져 있었다. 아직도 불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른 정령들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버지, 다른 아이들과도 계약을 해 주세요.
―세라는 이대로도 괜찮아요.
고개를 돌리자 근원의 나무와 놀던 10만의 정령들이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레이와 세라의 계약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이름 짓는 것도 일이겠어.’
불현듯 든 고민이었다.
어쩌면 이럴 줄 알았기에 이히도 ‘불일, 불이, 불삼’이라 이름 지은 건 아닐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시스템 메시지도 말했지만 정령의 성장에는 ‘교감’도 한몫하고 있었다. 대충 지었다간 교감은커녕 감흥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짓는다고 전부 외울 수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일단 이름만큼은 제대로 지어 주자고 마음먹었다.
‘미치겠군.’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나긴 계약을 끝마치자 3일이 훌렁 지나가 있었다. 그간 500여 정령이 하급으로서의 격을 갖췄으며 레이와 세라처럼 중급이 된 경우는 아예 없었다.
아무래도 근원의 나무가 내린 축복을 무시할 순 없었다. 정수를 소모해 가며 벌인 일이니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정수가 아깝지는 않았다.
상위의 ‘격’을 갖출 기회를 얻었다는 것.
다시 말해 정령왕으로서의 격 또한 갖출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만 된다면 정수 한두 개쯤은 웃으며 투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케르피가 건넨 씨앗도 있었지.’
물의 정령 케르피.
그녀가 건넨 돌멩이 몇 개가 있었던 걸 깜빡했다.
워낙 불의 정령의 숫자가 많아서 기억 속에 파묻혀 버린 것이다.
‘물의 정령왕이 애지중지하던 씨앗이라고…….’
마법 주머니 속에 있는 돌멩이들을 꺼냈다. 그 숫자가 정확히 다섯이었다.
케르피는 이것을 내게 건네며 정령왕을 언급했다. 물의 정령왕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지라 의아스럽지만 그래도 명색이 정령왕이란 존재가 특별히 여긴 씨앗이니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냥 해 본 말일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기존의 불의 정령들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더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지긴 하였다.
‘주머니 안에 있어서인가? 별반 변화는 없군.’
하지만 주머니 안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예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었다. 턱을 쓸며 다섯 개의 돌멩이를 바닥에 차례대로 늘어놨다.
―아버지, 이게 무엇인가요?
―그런 거 말고 나를 봐요, 아빠!
레이와 세라가 나머지 정령들을 이끌고 내 주변으로 다가왔다.
둘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레이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편이었고, 매사가 꼼꼼하다면 레이는 말 그대로 철부지 어린아이를 연상케 했다.
그 극명한 차이 때문인지 둘은 자주 부딪혔고, 둘을 중심으로 10만의 정령들도 나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또 의외인지라 중재를 할까 하다가 경쟁은 성장의 원동력임을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기에 그대로 두었다.
대립각을 세우다 보면 부작용도 있겠지만 장점 또한 발휘되리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불의 성격 탓인지 조신한 레이보단 세라 옆으로 더욱 많은 정령들이 모여 있었다. 6:4 정도의 비율이었다.
“물의 정령이 깃든 씨앗이다.”
답해 주며 슬쩍 둘의 반응을 살폈다.
레이와 세라, 다른 불의 정령들은 평범한 정령에 비해 특이한 구석이 많았다. 불과 완전히 반대되는 물이라면 마땅히 싫어해야 정상이나…….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서 돌멩이를 꾹꾹 매만졌다.
호기심이 왕성한 얼굴. 딱히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그럼 막내가 되겠군요.
―동생들이 생기는 거예요?
세라도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아버지, 어서 보고 싶어요. 제가 도울 게 없을까요?
―빨리빨리 나오렴. 나랑 같이 놀자.
둘의 관심은 지대했다. 뒤에 나열한 10만의 정령들도 나보단 돌멩이 쪽을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나 혼자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어차피 내 마력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불의 정령들이다. 나와 크게 다른 마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으니 도와준다면 괜찮은 효과를 낳을 것 같았다.
“정성을 가지고…… 잘 보듬어 주면 될 것이다.”
정성과 보듬어 주라는 말. 어쩐지 입에 익지 않았다. 마치 처음 꺼내는 양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의미는 잘 전달이 되었는지 레이와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맡겨 주세요.
―세라도 할래요.
이럴 때만 의견이 맞았다. 이윽고 둘은 그윽한 눈빛으로 물의 정령이 깃든 돌멩이를 보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일 후.
돌멩이에 마치 알이 깨지듯 금이 가더니 그곳에서 물의 정령이 탄생하였다.
[극상성의, 수많은 정령의 보살핌을 받고 태어난 정령입니다.]
[본래라면 조화를 잃고 소멸되어야 정상이나 사용자 ‘랜달프 브뤼시엘’의 마력으로 강화되어 훌륭하게 균형이 잡혔습니다.]
[한계치가 크게 늘어납니다. 근본은 물의 정령이지만 미약하게나마 불도 품고 있습니다.]
[물의 정령들은 칭호 ‘불과의 조화(Epic)’를 갖게 됩니다.]
뾰오오…….
불의 정령들이 탄생할 때와 마찬가지로 물의 정령들도 물방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다만 겁을 먹었는지 좀처럼 다가오질 못했다.
주변의 눈치도 강하게 보았다.
―겁먹지 마렴. 나는 레이라고 한단다.
―세라! 언니야.
레이와 세라는 슬그머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다섯 개의 물방울이 천천히 다가가 두 정령의 손에 닿았다.
―아버지! 이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름이 없으면 불쌍해요.
―맞아요.
이름. 또 이름이었다.
불과 며칠 전, 10만 개의 이름을 짓느라 골머리를 싸매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고작 다섯이라 하지만 또다시 이름을 짓는 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일, 물이, 물삼, 물사, 물오.”
이럴 땐 이히의 작명 방법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히는 선견자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처음에는 비웃었으나 불일, 불이, 불삼은 희대의 작명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예쁜 이름이에요.
―……아무 말도 안 할래요.
두 정령마저 그저 짧은 답만 하고는 회피할 지경이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 * *
씨앗에 깃든 정령들이 탄생하며 나와 계약을 맺었지만 방출하기엔 시기가 이르다. 조금 더 세상에 적응하고 존재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거기서 나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정령들은 내 기분 같은 것에 특히 민감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냉소적이었고, 이 특유의 태도를 바꾸는 건 어려웠다. 대다수 마족이 가진 분위기이기도 하거니와 나름의 생을 살아오며 쌓아 올린 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보통 때라면 내게 맞추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맞추기보단 남이 내게 맞추도록 하는 게 나답다.
그러나 정령들은 민감했고, 입장 또한 미묘하게 달라서 대하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레이와 세라를 제외한 정령들이 나를 점점 어려워했다.
좋지 않은 징조다.
‘다른 이를 위해 나를 바꾼다니.’
그게 가능할까?
도움이 된다면 조금 더 살갑게 구는 수준은 가능하다. 실제로 여러 번 그래 왔으니까. 그러나 그런 ‘연기’를 정령들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단박에 눈치채곤 거짓이라 여기며 더욱 거리를 둘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이어 나갈 어느 날.
눈앞으로 몇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근원의 요정 ‘이히’가 영혼에 크나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근원의 요정 ‘이히’는 지난 몇 년간 ‘던전’과 ‘근원의 나무’를 오로지 존재력으로 지탱해 왔습니다. 그 여파가 뒤늦게 영혼의 결여로 나타났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던전의 근간인 요정이 사라진다면 던전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